‘모든 일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인과론’이나 ‘인과율’로 접근하는 것이 낯설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전제를 가지고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이 내게는 불편하다, 역사적 근거를 찾아서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도임에도 그렇다. 이런 접근은 누가 가해자인지를 규명하려는 길로 빠지기 쉽고, 진짜 피해자는 가려지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래서 나는 이 같은 분쟁이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일어난다는 전제부터 동의하지 못한다. (본문 중)

김동문(다타문화연구소 대표)

 

지난달(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오전(현지 시각)에 터진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무장 충돌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 무대는 가자 지구이다. 동서의 폭이 길어야 6-12킬로미터, 남북이 40킬로미터에 불과한 땅이다. 사면이 막혀 있다. 서쪽은 지중해로, 나머지 3면은 분리 장벽(또는 보안 장벽)으로. 이번 사건을 두고 그 배경을 짚어 주는 글이 많이 나왔고, 원인을 해설하는 말과 글도 많다. ‘모든 일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인과론’이나 ‘인과율’로 접근하는 것이 낯설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전제를 가지고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이 내게는 불편하다, 역사적 근거를 찾아서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도임에도 그렇다. 이런 접근은 누가 가해자인지를 규명하려는 길로 빠지기 쉽고, 진짜 피해자는 가려지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래서 나는 이 같은 분쟁이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일어난다는 전제부터 동의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분쟁과 전쟁 과정에서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죽음과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이들이 떠오르기에 이런 논의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곳에는 최소한 2007년 6월 이후부터 230만 명 넘는 주민이 고립되어 살고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170만 명 정도가 8개의 난민촌과 그 바깥에 사는 팔레스타인 난민이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가자 주민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대의를 위해 이렇게 죽음이 이어지는 것은 감수해야만 할까? 하마스의 무장 공격, 이스라엘 민간인과 군인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과 250여 명의 인질 납치, 그리고 그에 대응한 이스라엘군의 반격으로 소멸되고 있는 수많은 가자 주민의 ‘우주’는 대수롭지 않은 것일까? 권력을 가진 이들, 군사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명분 싸움 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생명은 전혀 가볍지 않다. 그런데도, 그 죽음이 그저 숫자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인과론을 따지는 접근은 멀리하고 싶다.

 

하마스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 등이 가져올 자신들의 고립에 대한 저항으로 이번 무력 공격을 자행했다? 그것은 가자 주민을 위한 선택인가? 아니다. 이란의 부추김을 받았다? 50년 전 10월 전쟁의 기시감을 노렸다? 그래서 가자 주민을 위한 전쟁인가? 아니다. 2007년 6월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협력 속에 지속되고 있는 가자 봉쇄에 대한 저항이다? 국제법을 지속적으로 위반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한 저항이다? 그래서 가자 주민을 위한 선택인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무력시위, 테러에 대해 정당한 응징을 하는 것이다? 하마스 세력의 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한 전쟁이다? 그래서 가자 주민을 위한 전쟁인가? 아니다. 무고한 주민의 피해는 그대로 감수하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과연 이것이 최선인가? 가자 주민을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인가? 이번 하마스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반격을 둘러싼 배경으로 다가가는 중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계속 일어난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라는 질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서 사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이들을 정복의 대상, 몰아내야 할 배타적 존재로 취급한 그 태도와 행위가 문제였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1948년 5월에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을 세운 것이 문제인가? 아니다. 이스라엘 건국 전후로 팔레스타인 주민의 생존권과 삶의 터전을 부인하고 무력을 행사하여 그들을 내쫓은 것이 문제였다. 사실 팔레스타인은 그전에도 유대인, 아랍 기독교인, 아랍 무슬림이 공존하던 땅이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가지 지구와 서안 지구를 지배하고 있던 이집트와 요르단을 몰아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땅을 점령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이후 56년간 점령지 주민에 대한 차별과 무법적 통치를 한 것이었다. 1993년 9월에 맺어진 오슬로 협정 이후 ‘한 땅 두 국가’ 해법을 추진해 오면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세워졌다. 그 과정에도 이스라엘 정치권의 극우 진영은 꾸준하게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며 인종 범죄로 규정될 수 있는 무력 행동을 통제하지 않았다. 불법적인 정착촌 건설을 방조하거나 확장했다. 지금은 서안 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을 점령지가 아닌 이스라엘 땅으로 합병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두고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나 대표자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주민의 권리는 철저하게 배제당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이러저러한 가깝거나 먼 배경이 있다고 하여 이번 하마스의 공격으로 촉발된 재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세우는 논리 뒤에 감춰진 목적이나 의도는 어느 편에나 존재할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건의 출구 또는 해결의 길을 모색하려면 행위 주체와 그 행위의 목적, 목표 같은 것이 드러나야 한다. 이스라엘이 대화 상대가 아니라 멸절시켜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하마스의 주류 세력과 지난달 12일 구성된 이스라엘의 전시 내각을 주도하는 베냐민 네타야후가 행위의 주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적과 하마스를 축출하고 궤멸한다는 두 개의 적대적인 목표가 맞서고 있다. 이 과정에 희생되는 이스라엘 군인과 시민, 가자 주민의 자리는 없다. 하마스의 테러와 이스라엘군의 전쟁 범죄 논쟁 사이에도 모든 희생은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다.

 

이글을 맺는 지금(11월 3일) 지난 화요일부터 이스라엘군은 자발리아 난민촌에 대한 세 차례 공습과 군사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는 뉴스를 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과 갈등이 지속하는 역사적인 이유…? 그것이 무엇이든, 이스라엘이든 하마스든 팔레스타인이든 어느 쪽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앞세울 배경과 명분, 정당성 등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당한 전쟁은 없다고 생각한다. 피해자에 주목하지 않는 전쟁의 정당성 논쟁도 의미가 없다. 애꿎은 피해자에 주목하지 않는 공격도 저항도 보복도 폭력일 뿐이다. 명분과 목적이 옳아도, 지난 과거에 나름의 정통성이 있다고 해도, 성경과 종교적 가르침을 앞세운 행동이라 하여도, 그 목적 실현 과정에 무고한 죽음을 당연시하는 폭력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전쟁은 게임이 아니다. 무너지고 파괴된 누군가의 일상과 목숨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런 전쟁을 두고 영화나 게임을 보듯이 관전평을 늘어놓는 것 같은 우리의 거친 현실이, 우리의 메마른 시선은 또 다른 폭력이고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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