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받아들이고 그 책임을 기꺼이 수용하는 이 과정에서 자부심이 싹트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장애인들은 철저하게 비장애인에게만 맞춰진 세계에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온 삶과, 세상의 편견을 거부하며 형성한 장애 정체성에 자부심을 갖게 된다. 즉 우리는 장애 극복 스토리가 아니라 우리의 장애 수용 스토리가 자랑스럽다. (본문 중)

박은영1)

 

장애 자부심이란 말이 있다. 장애학을 배우기 시작한 무렵 한 세미나 자리에서 처음 배운 이 단어는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장애와 자부심이라니. 상호 이질적이라고 느껴지기 쉬운 두 단어가 태연하게 붙어있는 모양새를 한참 동안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떠오른 질문은 ‘장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나?’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장애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고 말해도 되나?’라며 예의를 차리는 가짜 질문을 던져본 게 새로운 단어에 대한 나의 첫 반응이었다.

 

비장애인 중심의 문화 속에서 ‘장애 자부심’은 이상하고 불가능한 개념으로만 보인다. 장애는 대체로 열등함, 건강하지 않음, 기괴함 등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표상되어 왔기 때문이다. 열등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에 자부심을 갖는 일에 대해 사람들은 이상하고 불편하다고 느낀다. 심지어 누군가는 그것을 비윤리적인 것으로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첫 반응은 이러한 기존 문화에 대한 소심한 눈치 보기였던 셈이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장애 자부심을 갖는 것이 가능한지, 혹은 그것이 바람직하거나 건강한 감정이 맞는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논의가 유의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장애 자부심은 나와 동료 장애인들 안에 존재하고 있음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칠 줄 모르고 진행되는 장애인 운동과 점점 확장되는 다양한 장애인들의 연대가 이를 더 화려하게 꽃피우고 확장시키고 있었다.

 

우리에겐 분명히 자부심이 있지만, 그걸 설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애 자부심이란 용어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낯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일 것 같았다. 장애 자부심은 비합리적인 자기 최면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장애 극복’을 이룬 장애인과 연결시킬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이 개념을 빌미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심각성을 낮게 평가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이후 장애 자부심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과 꼭 나누고 싶었다. 장애인이 스스로의 장애인 됨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평등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결국 이 짧은 글에서 가당치도 않은 그 시도를 한 번 해보려 한다.

 

실제로 많은 장애인들은 장애인으로서의 스스로에게, 또 정체성을 공유하는 장애인 공동체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단, 이는 장애가 있는 몸이나 차별적인 사회에 눈감는 것으로 가능해지는 일이 아니다. 정반대로 장애 자부심이 자랄 토양을 만드는 것은 장애인이 스스로의 장애를 수용하는 과정이다.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장애 수용이라고 말한다. 장애 수용은 장애인이 자기혐오나 세상의 장애 혐오에서 벗어나, 자신이 자유롭고 존엄하고 가치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결단하는 과정이다.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존엄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그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기로 하는 것이다.2)

 

장애를 받아들이고 그 책임을 기꺼이 수용하는 이 과정에서 자부심이 싹트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장애인들은 철저하게 비장애인에게만 맞춰진 세계에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온 삶과, 세상의 편견을 거부하며 형성한 장애 정체성에 자부심을 갖게 된다. 즉 우리는 장애 극복 스토리가 아니라 우리의 장애 수용 스토리가 자랑스럽다.

 

장애인들의 자부심은 동료 장애인들과의 연대와 더 큰 장애인 공동체를 통해 한층 더 확장되고 공고해진다. 나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른 문제에 부딪히지만 비슷한 차별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들의 지혜와 용기와 유머에 다시 힘을 얻는다. 가끔은 정말이지 ‘솔직히 우리가 최고!’라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서로가 자랑스럽다.

 

장애인들의 우정과 연대는 때로 우리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도 한다. 서로 연대하여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행동을 조직한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작업에 참여하다 보면, 우리의 이야기와 주장, 새로운 상상이 세상에 유익을 준다는 확신이 생긴다. 장애인 운동의 결실이 실제로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권리를 함께 증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장애인 공동체가 어떻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 장애인들은 사회가 ‘비정상적’ 혹은 ‘기형적’이라고 평가한 우리의 몸과 맘에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장애인 배우들은 고유한 걸음걸이와 몸의 형태, 전동 휠체어가 움직일 때 나는 독특한 소리로 무대를 채우며, ‘여기 있는 우리를 보라’고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정신 장애인들은 매드프라이드 행진에 나서고, 치료의 대상이었던 환청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목소리 듣기 운동’을 벌인다.

 

고유한 문화를 창작하고 세상에 내어놓는 장애인들은 장애를 부끄러운 약점으로 치부하던 문화에 의문을 제기하며, 세상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낸다. 이로써 사회공동체의 문화를 한층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기존 문화와 다른 조건과 색채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문화를 창출하고 변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장애인의 가치를 폄하하고 장애인의 존재를 계속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이렇게 보란 듯이 자부심을 구축한다. 사실 다양한 상황과 서로 다른 몸과 맘을 가진 장애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부심을 키워 내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서로의 자부심이 상충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 희미해지기도 하는 우리의 자부심은, 결국 서로의 자부심을 붙들고 다시 살아난다.

 

이 사회는 툭하면 우리를 분노나 슬픔에 빠트린다. 하지만 나는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자부심이 내 안에서 계속 호흡하고 있음을 항상 경험한다. 나의 경험과 독특함은 내게 어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반대로 삶에 대한 자신감과 의미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동시에 두 가지 작용을 모두 한다.

 

‘내가 비장애인이라면 삶이 조금은 더 편했겠지’란 생각이 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장애가 내 삶과 관계들을 더없이 풍성히 해준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떨리는 왼손과 뭉개지는 발음은 내게 불편을 주지만 결코 삭제되지 않을 나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계속 통증이 오가는 장소라는 것도 내 몸의 특성이다. 나는 통증에 자부심을 갖지 않으며, 통증을 줄여줄 온갖 시도를 한다. 하지만 통증은 나를 장애와 질병이 있는 동료들에게로, 또 고통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사유로 이끌어 주었다.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을 얻게 된 시간과 고통이 우리의 존엄과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못함을 증명하기 위해 고민한 시간만큼 나를 뿌듯하게 하는 건 없다. 나는 통증에서 해방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내가 보낸 그 값진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 않다.

 

가끔은 자부심 따위 다 내팽개쳐버리고 싶을 만큼 피곤하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혐오 발언을 하는 자들은 사라지지 않고, 장애인에겐 행정 절차도 유독 더 버벅대고, 사사로움이 없다는 물리 법칙도 우리보다는 비장애인에게 더 관대하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나를 다시 움직이고 싶게 하는 것 역시 장애 자부심이다. 장애 자부심이 주저앉아 있는 나의 욕망을 콕콕 찌르면, 어느새 다시 글을 쓰고 싶고, 친구들을 만나 일을 벌이고 싶다. 나밖에 못 쓰는 글, 우리밖에 못하는 일이 아직 넘쳐나므로. 얼마나 다행인가. 구제불능의 이 사회에 우리가 함께 살고 있어서.

 


1) 『소란스러운 동거』(IVP, 2022)의 작가이며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2)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 2018),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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