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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복음을 뒤섞는 대신 기독교적 관점으로 신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면 거기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수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고, 신화를 위해 복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자연의 영역에 제공된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풍성하게 발견할 수 있다. 크세니아도 당연히 그 하나고 약속을 지키고 의리를 지키는 일도 포함될 수 있다.  (본문 중)

 

권수경(목사, 일원동교회)

 

호메로스의 고전

 

세 여신이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내기를 벌였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였다. 여신들은 심판을 맡은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에게 은밀하게 뇌물을 약속했다.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 한 아프로디테를 우승자로 선언했는데 그 아름다운 여인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였다. 파리스는 즉각 스파르타로 가서 메넬라오스 왕의 환대를 받다가 왕비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아로 도망을 갔다. 메넬라오스 왕은 아내 헬레네를 돌려받기 위해 그리스 연합군을 결성해 트로이아로 진격해 갔는데 십 년 공격에도 난공불락이던 트로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목마 작전에 넘어가 결국 함락되고 만다.

 

호메로스의 대작 『일리아스』는 트로이아 전쟁의 마지막 몇 주간을 다룬 서사시다. 그리스와 트로이아 양편에서 수많은 영웅이 등장해 지략, 실력, 용기를 겨루며, 신들까지 가세해 열심히 자기편을 도왔다. 호메로스의 또 다른 역작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다음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오디세우스는 전쟁 후 신들의 방해로 고향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십 년 세월을 방랑하며 고난을 겪고 부하도 다 잃는다. 그런 다음 겨우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 부인 페넬로페 주변의 구혼자들을 무찌른 다음 부인과 재회한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리스 신화의 여러 대목이 거기 압축되어 있다. 신화는 말로는 신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사실은 신들을 내세운 사람 이야기다.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뇌물도 준다. 인간의 삶을 이루는 사랑과 미움, 신뢰와 배신, 잔인함과 자비, 살고 죽는 문제, 이승과 저승, 정의와 평화 등 방대한 주제를 다룬다. 호메로스의 이 시집 두 권은 거의 삼천 년 동안 서양 문화의 큰 축을 이루어 왔다.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성숙함과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편성을 함께 가졌기에 앞으로도 인류에게 많은 감동과 영감을 선물할 것이다.

 

영화 <오디세이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로 새 영화를 만들었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서양에서 이미 수십 번이나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만든 작품마다 큰 인기를 끌었고 이번 놀란의 영화도 한국에서만 천만 명 넘게 관람해 고전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놀란의 <오디세이아>는 할리우드다운 스케일을 갖추었다. 아이맥스로 보아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화면이 크다. 음향도 얼마나 웅장한지 돌비 스테레오로 들으면 몸까지 떨린다. 거대한 영화가 내용도 많아 거의 세 시간이다. 상업 영화인 만큼 자극적인 장면도 많다.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잔인한 장면이 꽤 있다. 키클롭스가 사람을 삼키는 이야기나 키르케가 사람을 돼지로 바꾸는 장면은 불필요하게 길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나의 얼굴 반을 흉터로 덮은 이유에 대해서는 논란도 좀 있었다.

 

가장 관심을 끈 점은 영화의 주제다. 놀란은 『오디세이아』 이야기를 제우스의 법을 기초로 새로 해석한다. 제우스의 법은 크세니아(Xenia)라고도 하는데, 손 대접 규칙이다. 주인은 나그네를 환대하고 친절하게 대접해야 한다. 행색이 초라하다고 박대해서는 안 된다. 또 나그네는 주인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유익한 대화로 주인의 친절에 호응해야 한다. 주인과 손님은 상황이 뒤바뀔 때도 똑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법은 나그네의 수호자를 자처한 제우스가 만든 법으로서 어기는 자는 신의 왕 제우스에게 큰 벌을 받는다.

 

Photo by Melinda Sue Gordon/Universal Pic/Melinda Sue Gordon – © Universal Studios. All Rights Reserved.

 

제우스의 법

 

『일리아스』에는 크세니아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잘들 지키지만 혹 어기면 후유증이 크다. 작품의 주제인 트로이아 전쟁부터 이 제우스의 법을 어긴 일 때문에 시작된다. 헬레네를 돌려받는 일이 실제 목적이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명분은 제우스의 법을 어긴 왕자 파리스에 대한 응징이었다. 『오디세이아』에도 크세니아는 곳곳에서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특히 마지막에 오디세우스가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사람들을 징벌할 때 명분으로 삼은 하나가 나그네로 대접만 받고 제우스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놀란의 영화에서 특이한 점은 오디세우스의 목마 작전을 크세니아 법을 어긴 사례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목마 작전은 거대한 목마 안에 정예 부대를 숨겨 두고 그 목마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 믿게 만들어 트로이아 성으로 갖고 들어가게 한 작전이다. 군인들이 밤을 틈타 목마에서 나와 성문을 열고 그리스군을 맞아들여 결국 트로이아가 함락된다. 분명 속임수를 쓴 것이고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 했으니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우스의 법을 어긴 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아의 손님이 아닌 침략자였다. 제우스의 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제우스의 법을 어긴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게 사실 영화 전체를 꿰는 주제다. 호메로스의 원작은 영웅들의 활약을 칭송하고 오디세우스 자신도 자신의 역할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으므로, 놀란의 영화는 원작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난이 마치 자신의 죄를 씻는 연옥의 고행처럼 그려진다.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고 아내와 함께 서쪽으로 떠나는 장면도 원문에는 없는 자기 비움의 결단이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인데 왠지 기독교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다.

 

환대의 이유

 

놀란은 제우스의 법이 곧 황금률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황금률은 서로 위치를 바꾸어 봄으로써 상대를 나와 동등하게 대우하며 존중하는 원리다. 하지만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는 아직 등가보복의 원시적 규칙이 주도하고 있었다. 개인과 개인도 그렇지만 도시 국가끼리도 서로를 적으로 대하며 살았다. 그래서 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황금률이 성숙한 사회 윤리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아직 오백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크세니아가 더 가치를 발한다. 제우스의 법은 호메로스 시대에도 중요한 규칙이었다. 그 시대의 종교인 신화 때문이었다. 신화에는 신이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난 이야기가 많다. 남루한 차림새를 하고 집주인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한다. 신인 줄 모르고 박대했다가는 큰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주인들은 행색이 초라한 사람도 내쫓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약간의 정성으로 대접했는데 그 사람이 신분을 감춘 신이었다면 두고두고 엄청난 보상을 받는다. 그래서 손님을 대접할 때 음식과 씻을 물을 제공하기 전에 신분부터 묻는 것은 큰 실례였다.

 

신이 인간으로 나타난다는 신화는 약육강식과 등가 보복 윤리가 지배하던 시절 약자를 보호하려는 양심의 구현이었다. 시대 정서에 어울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크세니아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다. 인간을 친절하게 대접하긴 하지만 사람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혹 신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도 잘 접대하라고 백 번 가르쳐도 듣지 않을 사람들이 신화를 읽고는 태도를 바꾸었으니, 신화의 크세니아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할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런 외적인 실천은 당연히 황금률의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신화와 기독교

 

놀란의 영화는 고대 신화에 기독교의 옷을 입힌 작품이다. 시대착오와 주관적 열정의 결합이다. 덕분에 신화가 품은 인간에 대한 통찰이 사라졌고 그것들이 복음과 갖는 관계도 뒤틀렸다. 물론 교회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초기 교회도 로마 건국 신화의 주역 아이네아스를 기독교 영웅으로 둔갑시켜 오랜 기간 칭송해 왔다. 신의 뜻에 복종하는 경건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이 특히 모범으로 부각되었다. 다신론 신화를 일신론 이야기로 각색한 셈이다.

 

신화와 복음을 뒤섞는 대신 기독교적 관점으로 신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면 거기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수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고, 신화를 위해 복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자연의 영역에 제공된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풍성하게 발견할 수 있다. 크세니아도 당연히 그 하나고 약속을 지키고 의리를 지키는 일도 포함될 수 있다. 연민, 자비, 정직, 공평, 정의, 평화 등 성경이 가르치는 인류 보편의 가치는 오늘도 자연계에서 은혜롭게 구현되고 있다.

 

놀란 감독은 영문학 전공자로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정통한 사람이다. 영화 대본도 직접 썼다. 가톨릭 신자답게 자연 가운데 있는 보편 가치를 중시한다. 다만 자연을 그 자체로 부각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회개 및 수난과 뒤섞여 자연과 계시 사이의 구분이 흐려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성숙함과 보편성을 통해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깊이 느끼는 가운데 은혜의 세계를 갈망하게 된다. 단테의 『신곡』이나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자연을 이용해 복음을 소개하지만 자연과 복음을 뒤섞는 혼란에는 빠지지 않는다.

 

우리의 크세니아

 

크세니아는 성경에도 나온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특히 교회 지도자라면 다 즐거이 손 대접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에도 사람인 줄 알고 대접했는데 천사였더라는 기록도 나온다. 신일 가능성 때문에 대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고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돕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환대의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환대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서로 손 대접을 하며 영적 나그네 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위로를 나눈다. 그런 실천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황금률을 실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상호 존중의 황금률을 넘어 사랑과 희생을 담은 황금률이다.

 

아마도 놀란 감독은 전쟁과 살상이 많아지고 배타와 혐오가 기승을 부리는 우리 시대를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특히 영웅 오디세우스의 참회에 초점을 둠으로써 지도자들의 책임을 일깨운다. 항상 악을 지향하는 인간 본성이지만 양심의 소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고 호메로스 시대에는 제우스의 법이 그 몫을 담당했다. ‘지금은 황금률이라는 성숙한 원리를 체득했으면서도 인류가 여전히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영화 <오디세이아>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기독교 영화 같다는 느낌은 또 다른 의문을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황금률까지 배운 교회가 배타와 혐오의 흐름에 선봉이 되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

 

* 크세니아와 황금률의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책 『황금률』(야다북스, 2025)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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