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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표절 시비에 휘말린 논문처럼 느껴지거나, 신들이 등장하는 동화를 감히 성경과 비교하느냐며 불편을 느끼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비평가와 변증가는 문학적 영향이 성경의 권위와 독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동일한 전제를 공유한다. 양측은 문학적 영향을 성경이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형사 고발처럼 다룬다. 비평가는 검사가 되고 변증가는 변호사가 되며, 성경은 피고석에 앉는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1961년 미국 성서학회 회장 샌드멜은 한 연설에서 성서학자들에게는 ‘평행광’이라는 증세가 있다고 진단했다. 훗날 그 반대 증세인 ‘평행공포증’도 보고되었다. 무슨 병인지 다음을 보고 파악해 보자.
한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성실하고 유능해 주인의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게다가 잘생겼다. 어느 날 안주인이 그를 붙잡고 함께 눕자고 말한다. 남자는 단호히 거절한다. 거절당한 여자는 앙심을 품고 이 남자가 나를 범하려 했다고 남편에게 거꾸로 고발한다. 창세기 39장의 요셉 이야기다. 그런데 이 줄거리가 이집트에도 있다. 기원전 13세기 말의 도르비니 파피루스(Papyrus D’Orbiney)에 적힌 ‘두 형제 이야기’다. 성실한 청년 바타(Bata)가 보리와 밀 다섯 자루를 거뜬히 어깨에 지자 형수가 반했다. “자, 우리 한 시간만 같이 누워요. 좋은 옷도 지어 줄게요.” 바타는 “남부의 표범처럼” 격노한다. “당신은 내게 어머니 같고 형님은 아버지 같습니다. 이 무슨 큰 악한 말입니까!”
바타와 유사하게 요셉도 말했다. “어떻게 제가 이처럼 아주 나쁜 짓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창 39:9). 여인이 남편 앞에서 사건을 거꾸로 꾸미는 것도 같다. 다른 점도 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옷을 증거물로 내밀었지만, 바타의 형수는 기름과 지방을 발라 얻어맞은 사람처럼 특수 분장을 했다. 결백의 증명은 이집트 쪽이 훨씬 과격하다. 요셉은 변명 없이 감옥에 갔지만, 바타는 스스로 남근을 잘라 강물에 던졌다. 창세기는 보디발을 ‘사리스’라 부른다. 궁정 관리를 뜻하지만 ‘내시’를 가리키기도 하는 말이다. 이집트에서는 유혹을 거절한 청년이 남성을 잃었고, 창세기에서는 유혹녀의 남편이 어쩌면 처음부터 남성을 잃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이쯤 되면 누구나 묻는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많은 학자는 지금의 요셉 이야기가 파피루스보다 훨씬 늦게,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가운데서 문헌으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물론 이야기의 기원 자체가 그렇게 늦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작 도르비니 파피루스 자체가 서기관 수련생 에네네(Enene)의 필사 연습본이었다. 베낀 것으로 치자면 이집트의 이 문헌이 찐이다. 그 끝에는 이 문서를 비방하는 자는 토트 신의 원수가 되리라는 저주까지 적혀 있다.

ⓒUnsplash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표절 시비에 휘말린 논문처럼 느껴지거나, 신들이 등장하는 동화를 감히 성경과 비교하느냐며 불편을 느끼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비평가와 변증가는 문학적 영향이 성경의 권위와 독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동일한 전제를 공유한다. 양측은 문학적 영향을 성경이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형사 고발처럼 다룬다. 비평가는 검사가 되고 변증가는 변호사가 되며, 성경은 피고석에 앉는다. 이때, 유사성을 과장하고 한쪽이 다른 쪽에서 나왔다고 방향까지 단정해 버리는 과잉 증세가 평행광(parallelomania)이다. 반대편에는 이와 비슷한 것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평행공포증(parallel-onoia)이 있다.1) 하나는 모든 것을 베낀 것으로,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닮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사실 둘 다 고대의 이야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잊어서 생긴 병이다. 지금 우리는 녹음기와 동영상, 심지어 라이브 방송의 시대에 산다. 사건은 일어나는 순간 거의 있는 그대로 저장된다. 그러나 고대는 전혀 달랐다. 필기도구조차 유용하지 못했다. 정보는 기록이 아니라 삶을 살아야 했다. 어떤 사건이든 오랜 세월 이야기와 노래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며, 오히려 문서로 적히는 것은 이야기의 입체성이 상실되어 권위가 없게 보였을 것이다. 노래를 음악으로 듣지 못하고 가사만 보는 격이다. 그 시대에 중요한 것은 정보의 정밀한 기록이 아니라 생생한 전달력과 의미 있는 메시지에 있었다. 여기에는 공동체의 심층과 무의식을 깊이 울리는 힘도 있어야 했다.
정보는 잘 담아야 했다. 눈에 익은 ‘그릇’에 담아야 사람들이 안전하게 여겼고, 귀에 착 달라붙는 ‘랩’처럼 리듬과 가락에 실어야 오래 기억되었다. 항상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해야 마음이 푸근하게 열렸고, “그래서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야 들은 이야기를 마음에 고이 간직했다. 영웅은 웬만하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야 했고, 이스라엘에서는 “양 치는 목동”이어야 했다. 그래야 영웅담은 그 극적인 힘을 얻고 오래 보존되었다. 그러니 중요한 일이 생기면 이야기꾼이 할 일은 하나였다. 그 일을 담을 알맞은 그릇을 서둘러 찾아 거기에 담고, 담은 것은 리듬과 운율로 튜닝하는 것이다.
역사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실제로 일어난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그릇을 찾을 일도 없다. 잘 알려진 그릇에 담겼다는 것은 그만큼 꼭 전해야 할 일이었다는 역설적 증거다. 노아의 홍수도 요단강의 열두 돌도 그런 과정 속에 전해진 것이다. “책은 다른 책들로 만들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의 그릇을 가져와 거기에 담긴다.2) 글에는 ‘무에서 유’가 없다. 이는 오직 창조에만 있었던 하나님의 전매특허다.
그릇이 같다고 담긴 것까지 같지는 않다. 할로(William Hallo)라는 저명한 학자는, 비교란 성경을 그 배경 위에 ‘실루엣’으로 드러내는 일이라고 했다. 배경이 밝아지면 실루엣이 선명해지듯, 요셉 이야기의 윤곽이 오히려 선명해진다. 바타는 가족의 질서를 근거로 거절했지만, 요셉은 이 말을 덧붙였다.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바타가 부르짖자 태양신은 즉시 악어가 우글거리는 강을 만들어 그를 구했고, 바타는 황소로, 나무로 변신을 거듭하다가 왕으로 다시 태어난다. 요셉에게는 그런 기적이 없다. 그는 그냥 감옥에 간다. 그런데 요셉 이야기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유독 창세기 39장에만 여덟 번 등장한다. 하나님은 감옥 문을 열어 주지 않으셨다. 대신 감옥 안으로 함께 들어가셨다. “요셉은 거기 감옥에서 지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셔서…”(창 39:20-21). 동행, 이것을 이스라엘은 이 그릇에 담았다.
성경은 하늘에서 진공 포장되어 떨어진 책이 아니다. 이웃의 언어와 이야기 그릇을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에게 왔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말씀이 이웃과 그릇을 나눈 것쯤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베낀 것이 아니라 ‘담은 것’이다. 그릇은 공유해도 담은 것은 하나님의 동행이었다.
1) Samuel Sandmel, “Parallelomania,”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81 (1962): 1–2. ‘평행공포증’은 에일버그-슈워츠(Howard Eilberg-Schwartz)의 표현인데, 다음을 보라. Christopher B. Hays, Hidden Riches: A Sourcebook for the Comparative Study of the Hebrew Bible and Ancient Near East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4), 32.
2) Hays, 윗글, 34쪽. 월튼(John Walton)도 “차용은 쟁점이 아니다. 고대 세계의 문화들 사이에는 그저 공통의 인식 환경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John H. Walton, Ancient Near Eastern Thought and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20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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