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신앙은 복음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공적 신앙은 복음의 진리에 관해서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들을 숨김없이 공적인 영역에서 밝히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적 신앙은 겸손과 다른 이들을 향한 존중을 담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복음의 진리를 공적인 영역에서 우리 자신이 믿는 바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을 향한 존중과 겸손을 담아서 전할 수 있을까요?(본문 중)
김상일(보스턴 대학교, 실천신학 박사과정)
이번 글에서는 팀 켈러가 공적 신앙을 어떻게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펼쳐 나가는지에 대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켈러는 공적 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공적 신앙이란, I)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말할 때, II)진정으로 마음에 담고 있는 것들을 공적으로 밝히는 일, III)그것도 겸손과 다른 이들을 향한 존중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1] 필자는 켈러의 정의를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우선 공적 신앙은 복음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공적 신앙은 복음의 진리에 관해서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들을 숨김없이 공적인 영역에서 밝히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적 신앙은 겸손과 다른 이들을 향한 존중을 담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복음의 진리를 공적인 영역에서 우리 자신이 믿는 바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을 향한 존중과 겸손을 담아서 전할 수 있을까요?
공적 신앙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이며, 그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상대방은 복음을 믿지 않는 문화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공적 신앙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공적 신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켈러에 의하면 공적 신앙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 중 하나는 결국 복음 메시지와 문화 사이에 접점을 만들어서 일종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켈러는 이 작업을 바로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상황화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 시기와 특정 지역에서 사람들이 삶에 대해 갖는 질문에 대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형태로, 그리고 그들이 힘 있게 느낄 수 있는 호소와 논증을 통해서, 비록 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심지어 반대할지라도, 성경의 답을 주는 것이다. (『센터처치』, 189)
그렇다면 이런 상황화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켈러에 의하면, 성경이 말하는 상황화의 공식은 ‘맞서기 위해 적응하기’(Adapt in order to Confront)입니다. 켈러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서 상황화에 대한 통찰을 찾아내지만, 그 중에서도 고린도전서 1:22-25이 상황화의 기본 원리를 잘 드러낸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이 구절이 어떻게 상황화의 기본 원리를 보여주는지에 대한 켈러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은 문화의 복합적인 특성에 대해 상정하고 있다. 그는 헬라인에게 말할 때는 그들 문화의 우상인 지혜에 대하여 맞선다. 헬라 문화는 철학이나 지적 성취, 그리고 예술 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가르침이나 깨달음을 통한 구원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구세주를 통한 구원은 완전히 어리석은 것이었다.
이와 달리 유대 문화는 전혀 다른 것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했다. 바울은 이것을 세 가지 동의어로 표현하고 있다. ‘표적’과 ‘능력’, 그리고 ‘강함’이다. 유대 문화는 헬라 문화와는 달리 매우 실제적이며 행동이나 결과를 중시한다. 담론적인 사상보다는, 능력과 기술을 통해서 일을 성취하는 것에 가치를 두었다. 유대인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구원이란 비효과적인 것이었다. 메시아라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해야만 했다. 고통받고 약한 구원자는 유대인들에게 전혀 다가오지 않았다. (『센터처치』, 237)
이처럼 유대 문화와 헬라 문화는 문화적 이상이 달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식으로 불쾌와 경멸을 표시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목수 출신 자칭 예언자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라는 소식은 능력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지적이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켈러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바울의 상황화를 통해 어떻게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전달되었는지를 알기 쉬우면서도 통찰력 있게 분석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복음이 각 문화에 대해 다소 불쾌하게 비치는 면이 있지만, 반면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헬라인들은 십자가가 궁극적인 지혜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로움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지혜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십자가가 참된 능력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가장 강력한 적들(죄, 죄책감, 죽음 자체)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센터처치』, 237)
여기서 바울은 각 문화가 가진 이상(ideal), 즉 ‘지혜’와 ‘능력’ 자체를 긍정하면서도, 그런 이상이 궁극적으로 스스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폭로합니다. 이런 폭로는 그리스도께서 문화의 이상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대안이 되시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문화가 가진 이상 그 자체를 긍정하지만, 그러한 긍정은 궁극적으로 도전을 위한 긍정이며, 따라서 앞에서 말했던 상황화의 공식인 ‘맞서기 위해 적응하기’(Adapt in order to Confront)의 예를 잘 보여줍니다. 따라서 켈러는 바울이 실천했던 상황화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각 사회의 기저에 있는 문화적 내러티브에 적용하는(맞닥뜨려 완성하는) 모습을 보면 놀라울 뿐이다. 그는 이 일을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모두 해낸다. 바울은 각각의 문화가 갖고 있는 우상들에 도전하면서, 그들의 열망과 궁극적 가치들을 긍정적으로 부각시킨다. … 문화에 대한 바울의 접근은 완전한 부정도, 완전한 긍정도 아니다. 바울은 단지 헬라인의 지성에 대한 자만과 유대인의 능력에 대한 자만을 강력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선들을 추구하는 방식들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헛된지를 보여준다. 바울은 문화 안에 있는 치명적인 모순들과 내재하는 우상들을 밝히 보이고 난 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이것이 상황화의 기본적인 공식들이다. (『센터처치』, 238)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문화에 대한 긍정은 한 번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이 자신이 속한 문화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면, 이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화에 들어가 그 문화에 대해 확인하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명심하라. 이것은 한번 하고 지나가는 ‘단계’가 아니다. 언제나 존중과 공감을 표현하라. 문화에 맞서거나 비판할 때도 언제나 이렇게 말하라. “여러분들이 이에 대해 불편해할 것이라는 건 압니다만.” 당신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라. 사람들이 비록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이슈에 대해서건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하라. (『센터처치』, 264)
이 점은 자칫 잘못하면 복음이 어떻게 문화에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급급하다가 문화에 대한 존중을 놓칠 수 있는 많은 이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돌이켜 보면, 공적 신앙의 근본 정신은 i) 복음에 관해서 진정으로 마음에 담고 있는 것들을 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ii)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겸손을 담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주의의 DNA 안에는 i)에 대한 강조가 많은 반면, ii)에 대해서는 강조가 부족한 경향이 있습니다. 켈러는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독자들이 잘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런 도식적인 설명만으로는 실제로 상황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켈러는 자신이 실제로 뉴욕 맨해튼 속에서 기독교의 죄 교리를 어떻게 상황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삶을 어디에 건설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열정과 선택을 빼앗아갈 것이고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설교했다. 나는 종종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에서 죄를 ‘고장(disorder)난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을 언급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진리보다 자신의 평판을 더 사랑한다면,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는 우리가 가족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승진 때문에 자녀들을 소홀히 하게 될 것이다. 고장 난 사랑은 언제나 불행과 붕괴로 귀결된다. 우리의 사랑을 ‘고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젊고 세속적인 직장인들에게 두 가지 이유에서 아주 효과적이었다. 첫째, (잠깐이라도) 포스트모던한 사람들의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을 중화시켜 주었다. 당신이 그들에게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네, 그렇지만 문화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면 도덕 기준도 달라집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포스트모던한 사람들도 결국에는 진리에 대한 그들의 순진한 관점을 재고해야 한다. 그러나 우상숭배의 개념은 어떤 철학적인 이슈를 논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센터처치』, 271-272)
상황화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면, 공적 신앙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적 차원에서 펼쳐 내기 위한 토대는 바로 교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교회만이 상황화를 이루어내는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교회가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각 성도들이 자신의 삶에서 복음을 어떻게 상황화 할지를 고민할 기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부르심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이고, 두 번째는 교회가 처한 시대적, 지역적, 문화적 상황에 대한 고려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역동적으로 공명하면서 교회가 특정한 상황 속에서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도록 이끕니다.
켈러는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선교적 교회 운동(missional church movement)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자신이 사역하는 리디머 교회의 정체성을 선교적 교회 운동 속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선교적 교회란, 교회를 둘러싼 일반 문화가 이미 비기독교적으로, 심지어 반기독교적으로 변했음을 인정하고, 교회가 세상에 다가갈 때 마치 선교사들이 선교 지역에서 하듯이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게 선교는 더 이상 이전의 서구 교회들이 했듯이 교회가 맡아서 해야 할 어떤 직무가 아니고, 교회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됩니다. 서구 사회가 기독교 왕국(Christendom) 시대를 벗어나게 되면서,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고 사역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켈러 또한 자신의 사역지인 뉴욕의 맨해튼 지역의 문화에 대해 선교적 교회의 정체성을 가지고 접근해야만 제대로 복음을 전하고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켈러가 선교적 교회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주된 이유는 자신이 사역하는 미국의 도시 지역에 과연 선교적 교회론을 접목할 수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고민을 염두에 두고, 켈러는 센터 처치의 신학적 비전이 수용하는 선교적 교회의 여섯 가지 표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 교회는 반드시 사회의 우상과 맞서야 한다.
- 교회는 반드시 실력 있게 상황화하고 일상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 교회는 반드시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선교를 수행하도록 구비시켜야 한다.
- 교회는 반드시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여야 한다.
- 교회는 반드시 상황화되어야 하며, 비신자들, 질문자들, 그리고 구도자들이 교회 생활과 사역 전반에 참여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 교회는 반드시 일치를 실천해야 한다. (『센터처치』, 568)
- 교회는 반드시 사회의 우상과 맞서야 한다.
공적 신앙을 펼치는 교회는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주입하는 우상과 선교적으로 대면해야 합니다. 특히 켈러는 개인의 자율성이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나타나게 되고, 결국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경향이 현대 사회 안에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복음으로 맞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어떻게 현대성이 개인의 행복과 자아실현을 절대화했는지를 배워야 한다. 이 우상이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물질주의인데, 이는 소비주의와 탐욕으로서 불의의 원인이 된다. … 대속적 속죄와 법정적 칭의의 고전적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 보다 검소하게 살며 정의를 행하는 강력한 신학적 토대와 내적 동기 부여의 원천이 된다. … 사실상,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죄인이며 회개와 순복이 필요하다는 단순하고 오래된 복음 메시지만큼 현대의 “자기중심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이라는 우상에 도전하고 맞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센터처치』, 563)
- 교회는 반드시 실력 있게 상황화하고 일상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일상 언어에 대한 강조는 그 자체로 상황화를 요구합니다. 이런 종류의 상황화는 공적 신앙을 살아내는 선교적 교회 공동체에게는 필수적입니다. 켈러는 그 필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죄, 구속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불쾌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기독교 고전 교리에 수정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전 교리를 공교하게 상황화함으로써 아직 온전히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복음 제시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센터처치』, 563)
- 교회는 반드시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선교를 수행하도록 구비시켜야 한다.
이 표지는 성도들이 공적 신앙을 살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기도 합니다. 특히 켈러는 교회가 성도들이 다음의 세 가지를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1) 사람들이 관계망 속에서 복음을 이야기하는 증인이 되는 것.
2) 사람들이 이웃과 도시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이루는 것.
3) 사람들이 믿음과 신앙을 통합하여 직업을 통해 문화에 참여하는 것. (『센터처치』, 565)
- 교회는 반드시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여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주변 문화에 대항하는 공동체가 되면서도 공익을 추구한다는 말은 일면 수수께끼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주변 이웃들이 모두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문화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그들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켈러는 본회퍼가 이해한 칭의 교리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본회퍼가 제시하는 복음은 중심에서 바깥으로 자아를 움직이게 하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더 깊고, 더 투명한 관계성의 길을 닦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교회가 대조 공동체가 되게 하고),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겸손과 섬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선교적 교회의 희생적인 봉사는 세상에게 세속주의가 교배시키는 개인주의적 자기 몰입과 종교가 교배시키는 자기중심적 의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센터처치』, 566-567)
- 교회는 반드시 상황화되어야 하며, 비신자들, 질문자들, 그리고 구도자들이 교회 생활과 사역 전반에 참여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상황화의 필요성은 공적 신앙을 살아내야 할 선교적 교회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 내의 신자들이 일상의 삶에서 앞의 3번 표지와 같은 준비를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비신자들이 언제나 교회에 방문할 수 있고,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낄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 또한 상황화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이 삶 가운데 어떻게 체화되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복음 메시지를 소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은 오직 모든 재료들이 제자리에 있고, 교회의 신자들이 “상황화”될 때만 일어난다. 즉, 문화 안에 있는 주변 사람들과 문화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영적으로는 다를 때 가능하다. (『센터처치』, 567)
- 교회는 반드시 일치를 실천해야 한다.
이 표지는 서구 역사가 교회와 교단들의 분열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중요합니다. 이전 세대가 특정 교단에 충성하는 경향이 강했고, 자신들이 어릴 때 다녔던 특정 교단에 속한 교회를 선호했던 것과는 달리, 요즘 세대는 애초에 교회를 다닌 경험이 없기 때문에 교단 간의 신학적 차이에도 익숙하지 않으며, 그런 차이를 중요하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교회들은 교단이 다르고 신학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함께 연합하고 협력할 길을 찾아야 하며,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팀 켈러가 바라보는 공적 신앙의 또 다른 중요한 표현인 직업 소명론에 관해서 그의 책인『일과 영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팀 켈러 블로그, 2013년 9월 27일. https://timothykeller.com/blog/2013/9/27/redeemers-public-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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