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와 정치적 극우의 동맹이라는 정치적·영적 스캔들이 발생해서 온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맹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들이 있겠으나,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믿는 사람들이 사적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 사랑의 기독교’에 빠짐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왜곡(歪曲)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

이병주(기독법률가회 대표, 법무법인 디라이트 변호사)

 

정치적 선악과(善惡果)와 기독교의 탈선

 

세상에는 절반의 보수주의자들과 절반의 진보주의자들이 함께 삽니다.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것은 자기의 이익과 주관과 성향에 따른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관계와 관점이 다른 것이지 절대적인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수에도 일리가 있고 진보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보수에도 잘못이 있고 진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를 절대 선과 절대 악으로 나누고 상대편 진영을 제거하려고 드는 것은 사람이 ‘정치적 선악과’를 먹은 탓입니다. 1)

기독교인들도 평균적으로 절반은 정치적 보수주의자이고 절반은 정치적 진보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세상의 진보주의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보수주의에도 들어 있고 진보주의에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대로 된 보수’와 ‘제대로 된 진보’, 그리고 ‘양자 간의 제대로 된 싸움과 협력’을 원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보수나 정치적 진보 중의 하나만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선악과’와 ‘신앙적 선악과’를 함께 먹은 합병증상입니다.

기독교인들 각자에게는 자기의 이익과 관점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보수주의를 지지할 자유도 있고, 진보주의를 지지할 자유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정치적 자유를 주장하고 존중받는 것만큼, 다른 사람의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이웃 사랑이며(막 12:31), 다른 사람이 나를 대접하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황금률’(golden rule)입니다(마 7:12).

정치적 민주주의의 현실에서,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는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기는 할지언정 배척과 제거의 대상은 아닙니다. 문제는 합리적 보수와 극우, 합리적 진보와 극좌 간의 경계가 애매하고, 많은 경우 그 경계선에서 섞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극우와 합리적 보수, 극좌와 합리적 진보 간의 경계는, 성경적 언어로 말하면, ‘선과 악을 판단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었는가 아닌가?’ 여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레 19:18)고 하신 것은 정치적 의견의 차이가 있더라도 이웃을 제거하려 하지 말고 공존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더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마 5:43-44)고 하신 것은 꼴 보기도 싫고 말을 섞기도 싫은 ‘정치적 원수까지도 사랑하고(즉, 견뎌내고) 극단적으로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의 기독교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와 정치적 극우의 동맹

 

오늘날 기독교와 정치적 극우의 동맹이라는 정치적·영적 스캔들이 발생해서 온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맹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들이 있겠으나,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믿는 사람들이 사적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 사랑의 기독교’에 빠짐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왜곡(歪曲)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는 본래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기독교인들도 인간의 죄 된 본성으로 인하여 자기들의 개인주의적 ‘자기 사랑’을 기도와 예배와 교회와 신앙 속에 끊임없이 끌고 들어옵니다. 그 결과 심하게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자기 부인조차도 신자들의 개인적 자기 사랑을 위해 이용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기독교, 자기 부인에 대한 부담감과 긴장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결국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섬기는 ‘자기 사랑’의 우상숭배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자기 사랑의 기독교가 개인적 차원에서 전개되면 개인적 이기주의, 성공이나 성장에 대한 우상숭배, 개인적 기복주의 신앙 등으로 비교적 온건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자기 사랑의 기독교가 집단적 차원으로 전개되면 금방 집단주의적 자기 사랑의 양상인 국가주의, 반공주의, 인종주의 우상숭배의 극렬한 폭력성과 결합합니다. ‘자기 사랑의 기독교’와 ‘자기 사랑의 극우주의’는 ‘자기 사랑’이라는 핵심적 교집합을 가지고 있으므로, 성질상으로도 비슷하고 심리적으로도 친근하고 현실적으로도 이해관계가 서로 합쳐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의 기독교와 자기 부인의 기독교

 

‘자기 사랑의 기독교’는 두 가지 방향에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위험하게 합니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사회적 정의와 민주주의를 공격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사랑의 기독교가 기독교 자체를 어지럽히고 망치는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자기 부인에 대한 부담과 긴장을 잃고 개인적·집단적 자기 사랑에 매달리면 기독교 신앙은 그 핵심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한 예수를 믿는’ 도리라고 할 수 없게 되어 ‘기독교’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 없어집니다. 이 경우 십자가는 자기 부인의 상징이 아니라 그저 종교적인 자기 사랑의 부적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다음으로, ‘자기 사랑의 기독교’가 세상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어지럽히고 위험에 빠뜨리는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의 민주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자기 사랑의 대원칙’ 위에서 서로 다른 ‘집단적 자기 사랑’이 다투는 제도적 틀(rule of game)을 제공합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집단적인 자기 사랑 간의 충돌 때문에 세상이 이생의 지옥으로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 사랑의 폭주를 막기 위한 ‘집단적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제도’들을 만들어서 운용하고 있습니다. 평화·법치주의 원리에 따라 권력을 제한하는 선거 제도, 경제적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한 타협 등이 그런 예입니다.  이에 반하여, ‘극우적 자기 사랑’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자기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민주주의 제도의 자기 부인 장치 일체를 부정하고 파시즘적 독재를 선호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기독교는 극우적 자기 사랑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자기 부인의 필요성과 기능을 알지 못하거나 망각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의 기독교가 극우적 자기 사랑과 동맹 관계를 맺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민주주의를 해치고 이웃을 공격하는 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이것이 코로나 사태로 인한 국민들의 안전과 위험을 무시하고 자신의 정치적 욕망만을 추구하다가, 나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한국의 개신교회 전체를 무분별한 사회적 위험 세력으로 전락시킨 ‘전광훈 사태‘의 본질입니다.2)

결국 자기 사랑의 기독교가 극우주의와 정치적, 영적으로 결합하는 동맹 관계는 민주주의와 기독교 양자 모두를 해치는 행동입니다. 자기 사랑 기독교의 정치적 탈선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해서’ 기독교를 해치고, ‘자기를 위해서 이웃을 공격하여’ 민주주의를 해칩니다. ‘자기 사랑의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위하여) 회개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하여) 회개하여야 합니다. 전광훈 사태로 한국 개신교회의 사회적 평판이 크게 떨어지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일 때문에 ‘자기 사랑의 기독교’의 허구적인 본색이 드러난 것은 오히려 반가운 일입니다. 이제는 고치지 않으면 망한다는 각성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전광훈 사태를 통하여 ‘자기 사랑의 기독교’의 벌거벗은 모습이 드러났으니, 이제 우리는 ‘자기 부인의 기독교’를 다시 배우고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고치고 무엇을 어떻게 회복해 나갈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이 진지하고 성실한 기독 시민으로서 함께 구체적인 답을 찾고 실천해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1) 선악과 금지의 계명(창 2:17)은 사람이 정치와 이념의 영역에서 극우의 자리에 앉아서 진보나 좌파를 악하다고 심판하고 정죄하지 말 것과 극좌의 자리에 앉아서 보수나 우파를 악하다고 심판하고 정죄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이병주, 제6계명과 정치적 민주주의, <좋은나무>, 2020.4.3, 참조.

2) 2017년 한국의 탄핵 반대 집회와 2019-2020년 전광훈 사태에서 나타난 ‘태극기와 십자가의 동맹’은 집단적 자기 사랑의 기독교와 집단적 자기 사랑의 국가주의가 결합한 사례입니다. 또한, 미국의 트럼프 사태에서 나타난 일부 기독교인들의 반기독교적인 정치적 행태는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White Evangelicals)의 집단적 자기 사랑이 트럼프로 대표되는 백인 민족주의(White Nationalism)의 집단적 자기 사랑과 결합한 결과입니다.

 

 

 

<코로나19와 한국교회 연속토론회 – 시즌2>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교회의 민낯, 외부의 시선으로 성찰하다.”

기윤실은 지난 4월 <코로나19와 한국교회> 시즌1 토론회를 “코로나가 드러낸 한국 교회의 민낯, 정직하게 마주하고 아프게 성찰하다”라는 주제로 개최한 바 있습니다. 이 토론회를 통해 코로나19 집단감염을 통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교회들은 개신교 내에서도 비판을 받던 일부 교회지만, 그들이 그러한 집단감염을 일으키게 된 왜곡된 신앙의 양태는 한국 교회 전반에 퍼져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한국 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왜곡된 신앙을 개혁하지 않으면 이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음을 뼈아프게 반성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6월 한달 간 매주 월요일마다 <코로나19와 한국교회> 시즌2 토론회를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교회의 민낯, 외부의 시선으로 성찰하다”라는 주제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연속 토론회 시즌2 바로가기

연속 토론회 시즌1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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