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에서 어떤 현명한 실용적 선택의 지침, 지혜로운 삶의 길을 발견하려 한다면 오산이다. 백치 공작도, 나스따시아도, 로고진도 그런 면에서 보자면 빵점짜리들이요,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그림이다. 불행한 얼굴을 가진 이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연민에 사로잡혀 그를 위해 자신의 평판이나 안정, 심지어 행복까지도 내던지는, 정말 백치 같은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를 보게 된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스위스의 마리

 

그래서 명작이라고 하나 보다. 읽고 나서 이렇게 계속 생각하게 만들고, 내 생각이 돌아가는 방식과 전제와 한계를 들여다보게 만드니. 이상과 현실을 모두 부여잡고 그에 따른 긴장과 무게와 부담과 좌절과 고통과 막막함을 그대로 껴안고 그려 내기 때문에 이 작품이 고전으로 남았겠고, 도스토옙스키는 불멸의 작가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백치에게 어떻게 반응하는 사람일까?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자세로 사람을 대해야 할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백치는 소설의 주인공인 미쉬낀 공작을 부르는 별칭이다. 모두에게 순수하고 솔직하게 다가가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선의로 똘똘 뭉친 사람. 다른 사람이 해코지하려 하거나 무례하게 대해도 원한을 품거나 미워하지 않고 흔쾌히 용서한다. 어떻게든 용서할 구실을 찾는다고나 할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을 소개하고 시작하자. 그가 요양차 스위스에 머물 때 있었던 일이다.

 

노쇠한 어머니와 함께 살던 처녀 마리. 폐병 환자였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온 동네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떠돌이 프랑스 상인의 유혹에 넘어가 그를 따라 집을 떠났다가 일주일 만에 버림받고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동네 사람들은 다 그녀를 멀리하고 어머니조차 딸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딸의 보살핌은 받지만 결코 용서하지 않고 매몰차게 대한다. 동네 아이들도 그녀가 나타나면 쫓아다니며 놀리고 돌을 던진다. 그런 그녀에게 따뜻하게 다가가는 단 한 사람이 미쉬낀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판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따뜻하게 대하고 먹을 것도 주고 챙겨준다. 그 결과 미쉬낀은 그녀와 한 부류로 취급되고 무시를 당한다. 그러나 점차 아이들은 미쉬낀에게 감화를 받아 그녀를 돌보게 된다. 그리고 마리가 죽는 날까지 아이들은 마리 곁을 지키고 마리의 무덤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곳이 된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없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고 돕는 모습. 그로 인해 아이들을 감화시키고, 불행한 한 사람이 외롭지 않게, 존엄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주는 모습은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그런데 그런 미쉬낀의 행적은 과거의 일로 소개된다. 과연 그가 4년 만에 돌아온 러시아에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선의와 순수함이 아름다운 결과로 나타날까? 그런 선의와 박애적 태도로 다가가면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릴까? 세상이 아름다워질까? 그렇다고 주장하고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이 소설은 희극 작품이랄까 도덕 팸플릿이랄까, 선전물 같은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결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전체적 구도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 먼저 선의와 긍휼로 똘똘 뭉쳐진 아름다운 백치를 구상한다. 미쉬낀이다. 스위스 휴양지에서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선의와 천진함으로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어낸 경력이 있다. 이제 그를 열정과 허례, 질투와 위선, 죄악과 원망이 넘실대는 러시아로 데려온다. 그리고 나스따시아라는 불꽃같은 여성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만들어 내는 사랑과 열정, 질투와 죄의식, 오만과 두려움의 도가니 속에 백치를 던져 넣는다. 그리고 그가 그 현장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그의 반응이 다른 인물들과 어떻게 작용해 어떤 화학 반응을 만들어 내고, 또 다른 연쇄 작용으로 이어지는지 그려 나간다. 거기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작가도 글을 써 나가면서 알아 나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작가도 때로는 당황하고 놀라지 않았을까.

 

러시아의 나스따시아

 

마음의 병으로 4년간 스위스에서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 미쉬낀은 열차에서 로고진이라는, 막 갑부가 된 사람을 알게 되고 그가 열렬히 사모하는 여인 나스따시아에 대해서도 듣는다. 로고진은 금세 미쉬낀에게 호감을 보이고 자기 집에 찾아오라고 한다. 로고진과 헤어진 미쉬낀은 하나뿐인 먼 친척 예빤친 부인 집을 찾아가서 자신을 소개하고, 그녀와 그녀의 세 딸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스위스에서 있었던 일도 들려준다. 그런데 예빤친 장군의 비서로 그 집에 출근하던 가브릴라는 나스따시아의 지참금을 노리고 그녀와의 결혼을 꿈꾸고 있었다. 가브릴라의 속셈을 알게 된 미쉬낀은 그 사실을 나스따시아에게 알려 줘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다.

 

나스따시아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자신을 거둬준 지인 지주의 시골집에서 자라다가 그의 눈에 들어 결국 지주의 정부가 되었던 여인이다. 그러나 나스따시아는 대단한 미인이자 지주가 감당할 수 없는 여인으로 성장한 터였다. 결국 지주는 그녀에게 지참금을 주어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기로 한다. 가브릴라는 그 지참금을 노린 것이었으나, 가브릴라의 가족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미쉬낀이 하숙하게 된 가브릴라의 집으로 찾아온 나스따시아는 뻔뻔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그 집안을 휘젓지만 미쉬낀은 그녀의 원래 모습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나요? 당신은 정말 그런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이 말에 그녀는 자신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급히 집을 빠져나간다. 순수하고 여린 나스따시아의 실제 모습이 잠깐 드러나는 장면이다.

 

1부의 뒷부분에서 나스따시아는 자기가 가브릴라와 결혼해야 하겠느냐고 미쉬낀에게 묻는다. 미쉬낀은 결혼하지 말라고 답하고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도도하고 성질이 불같은 나스따시아 안에 있는 여린 마음을, 아픔을, 불행을 알아보고 불쌍하게 여긴 데 따른 결정이다. 그리고 미쉬낀이 먼 친척 공작의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스따시아는 지주의 시골집에 있을 때 그런 공상을 한 적이 있었다. “정직하고 착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이 문득 나타나 ‘당신은 죄가 없어요. 나는 당신을 존경해요!’라고 말하는” 공상이었다. 그런데 그 공상이 별안간 현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깊은 상처와 아픔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와 결혼하면 공작마저 자기를 멸시하게 될 테고, 결국 순수하고 착한 공작마저 불행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공작의 제안을 거부하고는 로고진을 택한다. 로고진은 환희에 차서 나스따시아와 함께 떠난다.

 

그러나 2부로 들어가 보면 나스따시아가 로고진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달아났다가 다시 붙잡혀 가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로고진을 사랑하지 않고, 함께 있으면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한번은 공작을 찾아와 한 달 동안 그와 함께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도 나스따시아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타락한 여인이라 여기고 그 자괴감을 떨치지 못한다. 마치 행복해지는 것은 자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녀는 로고진에게 돌아간다. 자기를 무조건 받아 주고 열렬히 사모하는 로고진에게로.

 

 

공작의 사랑

 

정리해 보자. 공작은 나스따시아가 불쌍했다. 그녀를 구해 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가브릴라의 손아귀에서, 나중에는 그녀 자신으로부터도. 나스따시아는 어떤가? 그녀는 공작의 호의가 너무 고마웠다. 한때 꿈꿨던 상황이다. 그녀는 공작을 사랑했다. 하지만 자신이 타락한 더러운 여인이라는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급기야 공작을 다른 좋은 여자(아글라야)와 이어 주기로 결심하고 아글라야에게 간곡한 편지를 쓰는 등 자존심도 꺾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아글라야는 공작의 고결함과 순수성, 신뢰성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자부심을 안겨주는 귀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미 공작을 버리고 달아난 나스따시아가 자신과 공작 사이의 감정 문제까지 간섭하려 들고, 거기다 편지에다 공작을 사랑한다고 공공연히 밝히는 것에 대단히 분개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과 공작 사이에서 나스따시아를 완전히 몰아내리라 마음먹고 나스따시아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 방문은 두 사람 중에서 공작이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분명히 확인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아글라야의 매서운 도발 끝에 그녀의 목적을 확인하게 된 나스따시아도 마침내 발끈하고 만다. 서로 자기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두 여자 앞에서 공작은 “몹시 불행한 여자”를 택하고 만다. 아글라야는 수치와 분노에 떨며 떠나가고, 잠시 정신을 잃었던 나스따시아는 이렇게 외친다. “당신은 내 거야. 내 거! … 내가 그년에게 당신을 내주려고 했다니! 왜? 무얼 하려고? 미쳤지!” 그리고 나스따시아의 뜻에 따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다.

 

졸지에, 세상이 볼 때 공작은 순결한 처녀를 농락한 뒤 내버리고 창부와 결혼하는 불한당이 되고, 공작과 나스따시아는 천하의 악당 커플이라는 악평을 얻는다. 그러나 공작은 평판 따위는 개의치 않고, 사랑하는 여인 아글라야와의 행복한 결합도 포기하고, 불행한 여인 나스따시아를 품어 내고 살려 보려고 한다. 공작은 스위스에서 마리를 대한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태도로 불쌍한 나스따시아를 대했다. 그녀를 향한 공작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아글라야를 버리고 나스따시아와의 결혼을 선택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지인에게 공작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매한가지에요. 결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어떻게 매한가지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요? 그게 하찮은 일이오? 당신은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채워 주기 위해 그 여자[나스따시아]와 결혼하는 거요. 아글라야는 그걸 자기 눈으로 보고 확인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요?”

“행복이라니오? 그건 아니에요. 나는 그저 결혼하는 거라고요. 나스따시야가 원하니까요. 나의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지요? 나는, 그래요. 결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나스따시야는 반드시 죽었을 겁니다. 이제 알게 되었지만, 로고진에게 시집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어요. … 그때 두 여자가 서로 마주 보고서 있었을 때, 나는 차마 나스따시야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어요. … 나스파시아의 얼굴은 견딜 수가 없어요. … 나는 이미 그날 아침 [공작이 예빤친 장군 집을 처음 찾아갔던 날, 가브릴라가 나스따시아에게서 받아온 그녀의] 사진에서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는 나스따시아의 사진을 보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이 “두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스따시아는 미쳤다고 말한다. 그 말에 대화 상대가 묻는다.

 

“당신은 두려움 때문에 결혼한다는 말이오? …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게 가능한 일이오?”

 

그러나 그 말을 공작은 부인한다.

 

“아니에요. 나는 진정으로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알다시피, 그녀는 … 어린애니까요. 지금 그 여자는 어린애예요. 완전한 어린애! 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그러면서 아글라야에게도 사랑을 고백했소?”

“아, 예, 그랬어요!”

“뭐요? 그러니까 두 여자를 다 사랑하길 원하는 거요?”

“아, 예, 그래요!”

 

이 대화를 공작이 바람둥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여기서 공작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사실은 두 가지 ‘다른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작이 남자로서 사랑하는 여인 아글라야가 있고, 그가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측은한 동정심으로, 스위스의 마리처럼 돌봐 줘야 할 연민의 대상으로서 사랑하는 나스따시아가 있다. 그런데 아글라야는 그 차이를 알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했던 것이다. 자기가 더 사랑받는, 아니 유일하게 사랑받는 여인임을 나스따시아 앞에서 보란 듯이 입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은 커다란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의 선택, 그녀의 선택

 

자신이 유일한 연인임을 보여 달라는 아글라야의 촉구 앞에서 공작은 난감해 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더 약한 사람, 불쌍한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오판한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아글라야의 압박 앞에서 공작은 겉으로 볼 때 너무나 통념에 맞지 않고, 어른답지 않고, 대책 없는 선택이자 부도덕해 보이고, 그래서 수많은 이들의 오해와 비난과 공격을 초래하는 선택을 내렸다. 그러나 그로서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백치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이전의 수많은 대화와 사건들과 만남들은, 백치가 여기서 내리는 선택이 오해되지 않도록, 어떤 면에서 백치로서는 필연적인 선택이었음을 설득하기 위한 기나긴 준비 작업이었다.

 

그리고 나스따시아는 공작이 어떤 사람이고 그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그런 선택을 어떻게든 피하고자 애써온 터였다. 아글라야의 도발에 발끈하여 공작을 차지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그리고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 그녀는 히스테리에 빠져 울부짖는다. 사람들이 문 앞으로 몰려오지만 그녀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고 공작만 자기 방으로 들어오게 한 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내가 무얼 하고 있냔 말이야? 당신을 어떻게 하자는 거지?”

 

공작의 다정하고 따스한 위로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결국 나스따시아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결혼식장으로 가려고 집을 나섰던 그녀는 집을 둘러싼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로고진을 발견한다. 공작과 결혼하기로 한 후, 그녀는 자신이 매몰차게 내쫓았던 로고진이 나타나 해코지를 할까 봐 두려워 떨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로고진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그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외친다.

 

“살려줘! 날 데려가! 어디든 원하는 대로, 지금 당장!”

 

그리고 로고진은 그녀를 마차에 태우고 떠나간다. 자기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던 로고진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 마지막 탈출구였다. 로고진은 나스따시아가 공작으로부터 자신을 잘라내기 위해 선택한 날카로운 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칼은 나스따시아라는 거친 숫돌로 숱하게 갈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날이 선 칼이기도 했다.

 

『백치』에서 어떤 현명한 실용적 선택의 지침, 지혜로운 삶의 길을 발견하려 한다면 오산이다. 백치 공작도, 나스따시아도, 로고진도 그런 면에서 보자면 빵점짜리들이요,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그림이다. 불행한 얼굴을 가진 이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연민에 사로잡혀 그를 위해 자신의 평판이나 안정, 심지어 행복까지도 내던지는, 정말 백치 같은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를 보게 된다.

 

그가 앞뒤 재지 않고 가엾은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결과, 스위스에서와 달리 모든 주요 인물은 처참한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게 뜨겁게 타오르고 장렬하게 산화함으로써 백치 공작이 가진 선의와 사랑과 긍휼이 오롯이 드러나는 것 같다. 마치 작가는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이런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귀결된다 해도, 공작 영혼의 고귀함과 그의 선의가 가진 아름다움은 여전하지 않은가? 그 가치는 설령 성공과 결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체로 충분히 빛나지 않는가?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그러나 지금까지의 내용을 읽고 허탈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선의, 긍휼, 사랑이 상대와 상황에 따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최악의 파국으로 끝날 수도 있다면, 그 어느 쪽으로 귀결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참 난감한 말이기 때문이다. 막막한 현실 앞에서 찬란히 산화하자는 말인가. 그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이런 서늘한 결론이라면 선의와 사랑, 긍휼에 대해 갖고 있던 일말의 믿음, 각오까지 다 사라지고 말 것 같지 않은가?

 

바로 이런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그림이 『백치』에 등장한다. 로고진의 집에 걸려 있는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 모조품이다.

 

 

이 그림은 무덤 속에 들어간 그리스도의 시체를 보여 준다. 인류라는 나스따시아를 위해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죽음의 길로 들어선 진정한 백치가 여기 누워 있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한, 생명이라곤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죽음에 정복당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기 있다. 로고진이 보여주는 이 그림을 보고 공작은 “있던 신앙도 다 없어지겠네”라고 말한다.

 

작품 속 또 다른 인물 이뽈리뜨도 죽음을 얼마 앞두고 쓴 글에서 로고진의 집에서 본 이 그림을 거론한다. 그는 소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그림에서 자연의 어마어마한 힘을 본다. 이 모습을 예수의 제자들이 봤다면 아무런 희망도 못 가졌을 거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저 그림 속에서 어떤 희망도 볼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가 직시해야 할 바라고 도스토엡스키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십자가 처형을 겪어 낸 그리스도의 주검은 사실 한스 홀바인이 그려낸 저 처참한 모습보다 훨씬 더한 상태였을 테고, 부활은 그것을 이겨 내고 이루어진 기적일 테니 말이다. 무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주검, 그 회생 불가능을 철저히 직시함으로써,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철저히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해 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새로운 소망과 부활의 기대가 싹틀 수 있다고 이 그림은 말하는 것 같다. 『백치』는 이 그림과 함께 되새길 때, 이 그림이 보여주는 백치 그리스도의 주검과 그 결말을 같이 묵상할 때, 비로소 희망의 메시지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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