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블록이냐 아랫블록이냐, 이 대립되는 두 이미지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다. 아랫블록으로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하자면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은 미래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청년들의 마음에 상시적인 ‘불안’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가치관의 혼란(아노미?) 정도라는 말로 단정할 수 없는 거대한 압박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중)

박치현(대구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사회학)

 

한국 사회가 불평등한 사회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짧은 지면이라 통계 수치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과거에는 교육이라는 사다리를 통해서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작동하였다. 이는 한국 특유의 학력주의나 학벌주의의 작동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학벌은 인생 한 시점의 ‘시험’을 통해 엄청난 보상을 주는 시스템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것은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며, 교회에서도 과거 ‘기복 신앙’이 원활히 작동하던 배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다리가 치워졌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이 불투명해졌다. 취업 문은 더욱 좁아졌다. 안정적으로 경제적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직장은 10-20% 정도로 많이 줄어들었다. 다른 한편, 대학은 입학하기 쉬워졌다. 대학 정원이 고3 숫자보다 더 많다. 그럴수록 위계 서열상 더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당위는 더욱 강력해졌다. 인서울 대학의 가치, SKY의 가치는 더더욱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 지방 국립대의 위상조차 추락했다.

 

근본적으로는,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IMF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1)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평범하게 결혼하고 집을 얻고 출산하는 것조차 이제는 지난하고 고난에 찬 과업이 되고 말았다. 평범하게 살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그래도 과거보다 보편적 복지라는 것이 늘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가? 그나마 요즘에는 “청년들이 너무 눈이 높다”라고 말하는 어르신들은 많이 사라진 듯하다. 어르신들이 드디어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그냥 자의적으로 늦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못하거나 안 한다는 점을 확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예전에 중장년이 많이 수강하는 방송통신대학의 강의를 했는데, 강의를 듣는 분들에게 명절 때 ‘결혼 언제 하냐, 애는 언제 낳냐’ 등의 질문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농담조로 조언하곤 했다. 자꾸 그런 질문을 하면 조만간 명절 때에 안 나타날 거라고. 그저 ‘열심히 사니 고맙다’는 말을 해 주라고 말씀드렸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청년들은 멘토(자수성가한 부자나 명사들)들을 찾아다니거나, 노력하다가 힘들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에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 제목에 혹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공정성’에 심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데, 정규직들이 반대하고 취준생들이 반대하기 시작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하에서 오히려 학력주의와 학벌주의가 더 강력해진 듯하다. ‘시험을 보지 않고 정규직이 되는 것은 불공정하다’, ‘내가 고생하고 희생한 것에 대한 보상은 정당하다’는 생각이 있는 듯하다.

 

 

현재의 격차 사회는 격차를 해소하려는 집합적인 노력으로 귀결되기보다, 개인들이 격차의 윗블록으로 ‘각자’ 튀어 오르려는 ‘각자 격차 해소’의 경기장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개인들이 이런 선택을 하면 사회의 격차는 해소되기는커녕 더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격차 사회는, 보상의 격차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승자가 보상을 남들보다 훨씬 많이 받는 것이, 골고루 보상받는 것보다 더 공정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승자에게 몰아주는 보상 체계는, 일단 승자의 트랙에 올라탄 이들이 현재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갖게 만들고 말았다. 최근의 ‘능력주의’ 담론에 대한 관심은 이로부터 나온 것 같다. 윗블록에서 보면 확실히 한국의 정규직이나 대기업의 급여는 지속적으로 상향된 듯하다. 반면, 사회적 약자들에게 주어지는 기회의 배분조차도 이제는 ‘무임승차’로 여겨지고 있다.

 

윗블록이냐 아랫블록이냐, 이 대립되는 두 이미지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다. 아랫블록으로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하자면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은 미래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청년들의 마음에 상시적인 ‘불안’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가치관의 혼란(아노미?) 정도라는 말로 단정할 수 없는 거대한 압박이라고 할 수 있다. 적당히 욕심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과거에는 그러한 인생 지침이 어느 정도 먹혔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기존의 평범한 삶의 모델을 획득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삼포 세대, 오포 세대, 칠포 세대, 나아가 헬조선으로까지 진화하는 사회적 용어들은 평범한 삶의 불가능성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엄청나게 경쟁하고 노력해도 평범하게 살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다. 이처럼 평범하게 살기 어려운 생애 전망이 결국은 세계 최고의 저출생률을 낳고 자살률을 낳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불안은 상담이나 심리치료, 신앙 활동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는, 대단히 구조적인 현상이다.

 

청년들은 평범하게 살기 위해, 다시 말해 먹고살기 위해 엄청난 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회. 다른 한편에서는 ‘워라밸’이니 ‘소확행’이니 ‘주4일제’ 등을 이야기하지만, 역시 그것들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고 대단히 바쁘게 살아야 하는, 다시 말해 일상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 구조가 낳은 심리적 불안 시스템은 그 자체가 자립화하여, 청년들 개개인들의 영혼을 좀먹고 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파스빈더 감독의 1974년 영화 제목). 불안하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한다. 영어 학원을 다니든, 비트코인을 하든, 공시를 준비하든 해야 한다. 시간을 낭비하면 죄책감이 생긴다. 이는 청교도들의 죄책감과는 차원이 다른 죄책감이다.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doing이 있고, doing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다. 따라서 그 죄책감의 본질은 ‘자책’(自責)이다. 무능하고 실패할지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공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책과 자기 공격은 사회적 약자나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언제든지 전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시적인 불안 시스템에 대한 해결책은, 불안하지 않도록 사회 체제를 전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덜 느끼게 할 것인가? 그것은 루저가 되고 실패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삶의 계획과 전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상의 격차를 줄이지는 못하더라도, 당장 아랫블록도 생활 가능한 보상의 ‘최저선’을 합의해야 한다. 그것은 생활 임금이든 기본 소득이든, 대략적인 아이디어들은 나와 있는 듯하다.

 


1) “노동시장 이중구조란 노동시장이 임금, 일자리 안정성 등 근로조건에서 질적 차이가 있는 두 개의 시장으로 나뉘어 있고, 두 시장 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경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해고 보호가 잘 되는 대기업, 정규직 등 1차 노동시장의 근속연수는 13.7년으로 중소기업, 비정규직 등 2차 노동시장의 근속연수 2.3년에 비해 약 6배가 긴 것으로 파악됐다. 또 월평균 임금은 1차 노동시장이 2차 노동시장보다 약 2.8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조영화, “[알기 쉬운 경제이슈]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경기일보, 202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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