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신앙 문제는 여전히 답을 받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신앙은 지속되었다. 심지어 전통적 신학을 우수하게 대변했던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질타를 받는다. 하지만 이 결론은 역설적으로 귀중한 가르침을 전한다. 신앙의 문제는 ‘신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문 중)

못되게 읽는 욥기1)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욥기에는 하늘과 땅 사이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이 둘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욥기 서두에 보면, 하늘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의결된 결정은 곧바로 실행되고 그 결과 땅에 처절한 고통이 내려진다(1:13-22; 2:1-13). 그런데 이 하늘의 회의가 땅에는 철저히 감춰져 있다. 땅에서는 왜 이 처참한 고통이 한 사람에게 내리는지 알 길이 없다. 땅은 하늘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어서 깊은 시름에 빠진다.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욥기에 담긴 길고 긴 논쟁이 펼쳐졌다. 마치 하늘에서 사탄이 하나님께 도전하였듯이(1:8-12), 땅에서 욥의 친구들은 욥의 신념에 도전했다.

 

많은 성서 연구자가 욥기를 아이러니의 글로 본다. 욥기의 종합적 의미를 찾는 일에서 아이러니는 매우 주목해야 할 장치다. 가장 심오한 아이러니는 서두에 그려진 하나님과 사탄 간에 있었던 일종의 내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선, 내기가 있었던 하늘의 모임은 아주 짧지만 이로 인해 벌어진 땅의 논쟁은 너무 길어서 진이 빠질 정도다. 그 내기 사건 하나 때문에 그토록 처참한 욥의 고통이 생겨났고 그것 하나를 몰라 그 장구한 입씨름이 벌어졌는데, 알고 보니 사탄과 하나님 간의 어처구니없는(?) 내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씁쓸한 아이러니다.

 

긴 고통 끝에 욥은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이 얼마나 장엄한 우주의 주관자이시며 지혜와 공의의 신인지를 스스로 드러내신다. 사실 욥의 근본적인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셨다. 대신 회오리바람 가운데에 나타나셔서 욥에게 풀 수 없는 수많은 질문을 퍼부으시고, 그가 이 우주의 섭리를 파악하기에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 확인시켜 주신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놀라운 우주 질서를 자랑스럽게 선포하시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욥의 친구들이 이미 설명했던 내용이었다(11.5-12; 15.7-8; 22.12 이하).2) 욥의 대답을 보면, 그가 창조주께 압도되어 무릎을 꿇게 된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잘 듣고 이해하게 되어 순종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42:1-6)

 

욥의 신앙 문제는 여전히 답을 받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신앙은 지속되었다. 심지어 전통적 신학을 우수하게 대변했던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질타를 받는다. 하지만 이 결론은 역설적으로 귀중한 가르침을 전한다. 신앙의 문제는 ‘신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연설에 있는 신학적 내용이 아니라, 절대자를 오감으로 체험한 기막힌 만남이 욥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장구하게 길었던 친구들과의 신학적 토론은 참 허망하게 구겨져 버렸다. 허망하지만 은혜로운 결론이 아닐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또다시 발견된다.

 

 

욥기의 세계에는 하늘과 땅만 있지 않다. ‘독자’의 세계가 있다. 마지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연설은 창조 세계 속에 나타난 놀랍고도 장엄한 그분의 행위를 밝힘으로써 독자를 압도한다. 그 속에 나타난 화려하고 수려한 문체는 독자들의 마음으로부터 까다로운 신학적 질문들을 몰아내 버릴 만큼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면밀한 독자의 의구심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이 과연 그렇게 전적으로 옳았는가?’ 하는 못된 생각을 말이다.

 

사실 독자는 알고 있다. 욥이 왜 그토록 고통받게 되었는지를. 하나님은 이 사실 만큼은 끝까지 욥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독자는 서두에서 사탄과 덜컥 내기를 하셨던 그 알 수 없는 하나님 모습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 많은 독자는 하늘의 내기 사건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에 가서는 망각하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망각이 아니라 그저 눈감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마지막 연설에서 자신을 장엄하게 드러내시면 드러내실수록, 면밀한 독자에게는 오히려 서두에 나타난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묘한 아이러니가 형성된다. 욥이 알고 싶은 정답은 밝히지 않으시고 욥을 무섭게 몰아치시니 말이다. 결국 욥기는 읽고 나서도 여전히 골치 아픈 미지의 책으로 남는다.

 

이 책의 묘한 결말은 독자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욥의 입장을 고려하여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어?’ 깁슨은 “이것이야말로 욥기가 어떠한 책인가에 대한 근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라고 말한다.3) 진중한 신학적 이슈들을 조롱해 버리는 다소 불편한 이 요소가 어쩌면 욥기를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문헌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4) 욥기는 은근슬쩍 하나님을 조롱하는 책인가? 아이러니한 것은, 욥기의 또 다른 전승인 ‘욥기 전서’(The Testament of Job)는 신정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열렬히 옹호하는 책이지만 위경으로 남게 되었고, 오히려 도발적인 책인 성서의 욥기는 유대-기독교의 정경 속에 남아 영원히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 욥기를 우리에게 읽으라고 주셨다.

 


1) 이 글은 저자의 다음 논문의 일부를 번역하고 쉽게 개정한 것임을 밝힌다. 기민석, “Ridiculing the God: the Shadow of the Heavenly Council in the Book of Job”, Y. M. Lee & Y . J. Yoo (eds.), Mapping and Engaging the Bible in Asian Cultures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 2009), 235-49.

2) 참조, John C. L. Gibson, “On Evil in the Book of Job”, L. Eslinger & G.Taylor (eds.), A scribe to the Lord Biblical & Other Studies in Memory of Peter C. Craigie (Sheffield Academic Press, 1988), 399-40.

3) Gibson, 윗글, 401.

4) 참조, J. H. Eaton, Job (Sheffield Academic Press, 1996), 6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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