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하얼빈>

당신의 끝은 어디입니까

제르(구자창 기윤실 청년위원)

 

 

안중근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의 일대기를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할 때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라는 답만 나온다면 절반의 진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반쪽까지 읽어냈다면 ‘동양 평화론’이란 말이 나와야 한다. 김훈이 최근 내놓은 장편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을 적당한 수준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의 전환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중근의 최종 목표는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 평화론’을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이토의 동양 평화론은 약육강식의 세계 질서 아래에서 일본 제국이 서구 열강처럼 세력을 키울 명분으로 앞세운 논리였다. 폭력으로 평화를 이룬다는 이 논리는 언어도단이었다. 안중근의 거사는 이를 해체하고 재정립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쓰러지는 장면 너머를 향해 있었다.

 

박영선 화백 그림

 

김훈은 ‘하얼빈’을 쓸 때 일부러 이토 저격 장면에서 힘을 뺐다. 이 소설은 후기와 주석을 제외하면 280쪽 분량인데, 이토가 사살되는 장면은 166쪽에 나온다. ‘벌써 죽었어?’라고 느꼈다면 소설의 호흡과 잘 동화된 것이다. 그는 이토 저격 장면을 향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휘몰아가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소설은 114쪽에 걸쳐 이어진다.

소설은 이토가 살해된 하얼빈역이 아닌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공판정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총알 대신 말이 날아다녔다. 이토를 향했던 안중근의 총알은 이제 피고인 진술로 변해 일제의 허울을 파고들었다. 하얼빈역에서는 이토의 몸에서 피가 흘렀지만,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일제가 만든 지배 논리의 구조적 결함이 드러났다.

피고인석에 선 안중근이 말하고자 했던 건 결국 ‘평화’였다. 복수는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조선이 평화와 독립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길은 제국의 틀 안으로 순입하는 것”이라는 이토의 ‘동양 평화론’을, 안중근은 무너뜨리려 했다. 이토가 말한 평화는 무력과 살상과 힘에 의한 굴종이었다. 이토의 평화는 강한 자에게 굴복해서 이뤄지는 거짓된 침묵이었다.

안중근의 ‘평화’는 상식적이고 명쾌했다. 그는 교수형 당하기 전 남긴 미완의 ‘동양 평화론’에서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한다”고 자명한 이치를 적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뺏거나 착취하면서 이뤄지는 평화는 없다. 공판기록에 따르면 안중근은 “그대는 한국의 장래가 어떻게 되리라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만약에 이토가 생존한다면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드디어는 멸망하리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의 평화는 일제를 적대시하거나 말살하는 게 아니라 회복시키는 변혁적 과업이었던 셈이다.

젊은 혈기의 안중근이 가진 평화론은 당대의 야만과 조화되지 못했다. 그의 평화론은 시대를 초월하고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인데, 안중근은 1908년 두만강에서 의병 투쟁을 하던 시절 일본군 포로들을 살려 보낸 일이 있었다. 포로 한 명이 “총기 없이 돌아가면 처형된다”고 하자 소총을 쥐여준 채 석방했다. 일본군 포로들은 복귀하자마자 안중근 부대의 위치와 규모를 보고했다. 그들은 진압부대의 선두에 섰고, 안중근 부대는 패퇴했다. 이토 저격 사건 직전 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안중근의 이상은 이후에도 꺾이지 않고 유지된 것 같다.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는 검찰 단계의 피의자신문 절차에서 “그대가 말하는 동양 평화란 어떤 의미인가”라고 물었다. 안중근의 답은 “동양의 모든 나라가 자주독립하는 것”이었다. 미조부치가 “그중 한 나라만이라도 자주독립하지 못하면 동양 평화가 아니란 말인가?”라고 다시 묻자 안중근은 “그렇다”고 답했다.

안중근의 거사에 대해서는 ‘악으로 악을 몰아낸 자리에는 악이 남는다’는 오래되고 강력한 비판론이 있다. 평화주의자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살인이라는 악을 저질렀다는 지적에 응수하기란 쉽지 않다. 검찰관 미조부치는 ‘사상범’이라고 주장하는 안중근에게 “살인은 사람의 도리에 반하는 일이다.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살인은 죄악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준비돼 있었다. 그는 천주교에서 살인을 죄악으로 규정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고 받아쳤다.

안중근의 최종 구상은 전 세계를 향한 기자회견을 법정에서 여는 것이었다. 피고인석에 선 안중근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나는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려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 이제부터 그 사유를 말하고자 한다”며 15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말했다.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한 이유 가운데 기독교 신앙에 연원을 둔 건 없는지 궁금할 법하다. 안중근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도마(Thomas)를 세례명으로 가진 천주교인이었는데, 그가 신앙을 이토 저격의 사상적 동기로 삼았다는 기록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에서도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 인류 보편의 윤리와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등 민족주의적 명분을 언급했을 따름이다.

다만 안중근이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점과 살인행위에 대한 고차원의 종교윤리적 논박을 준비했던 점을 감안하면 기독교 신앙 역시 그의 거사 동기에 중요한 밑바탕이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유언에서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쓰겠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라고 했다. 아내 김아려에게 남긴 편지에서는 “많고 많은 말을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라고 적었다.

김훈은 중앙일보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2022년 9월 16일자 보도)에서는 “안중근의 사상은 당면한 현실의 산물이다. 그의 사상은 생활의 바탕 위에 서 있다”며 “천주교 신앙인인 안중근은 천주교 교리도 자신의 사상 안에서 용해했다. 이것은 교회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사견을 밝혔다. 그의 의견에 한 표를 보탠다.

안중근과 본회퍼

 

 안중근의 삶은 ‘투사적 기독교인’의 표상인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와도 공명한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이후 처형됐다.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던 본회퍼는 1945년 4월 9일 39세 나이로 안중근과 동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다. 31세에 죽은 안중근보다 8살 늦은 나이였다.

본회퍼는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이토를 방치하는 게 더 큰 죄악이라는 안중근의 말과 나란히 선다. “이로써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라는 본회퍼의 유언 역시 안중근을 떠올리게 한다. 안중근은 ‘동양 평화론’ 말미에 “동양 평화를 위한 의로운 싸움을 하얼빈에서 시작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자리는 여순으로 정했다”고 적었다. 안중근에게 하얼빈역은 종착지가 아니라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기착지였다. 본회퍼는 야만과 폭력으로 얼룩진 이 세상 전체를 기착지로 여겼다는 점에서 안중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두 사람은 사후 복권 과정도 닮았다. 한국 천주교회는 안중근을 80년 동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겨뒀다. 1993년 8월 21일 당시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을 공식 추모하는 최초의 미사를 열면서 이 입장은 변경됐다. 김 추기경은 안중근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규정했고,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훈은 소설에 수록된 후기에서 이 내용을 앞세웠다. 독일 베를린 지방법원은 1996년 8월 1일 “본회퍼의 행동은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할 의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한 행동이었다”고 본회퍼의 명예를 복권했다.

안중근과 본회퍼의 삶을 포개어 보면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말을 곱씹게 된다.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 선수 로렌스 피터 요기 베라의 명언이다. 그의 말처럼 끝을 어디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삶의 지평은 달라진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을 종착지로 여기지 않았다. 그 덕분에 안중근을 ‘우발적인 범행’을 저지른 단순 살인범으로 만들려던 일제 수뇌부의 재판 방침은 좌초됐다. 역사는 안중근을 ‘단순 범죄자’가 아닌 ‘사상범’으로 기억한다. 본회퍼는 현세의 불의에 대항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내세에서 출발한다고 믿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본회퍼는 성경이 말하는 하늘나라는 현세와 내세를 모두 관통한다는 진리를 온 삶을 던져 드러냈다.

본회퍼는 그의 책<나를 따르라>에서 이같이 말한다. “제자들은 하늘나라만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이 세상에 파송받은 존재임을 잊지 않는다. … 예수께서는 자신을 소금이라 부르지 않고 제자들을 소금이라 부르면서, 그들에게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위임하신다. 그분께서는 자기의 일에 그들을 끌어들이신다. 자신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머무르시면서, 제자들에게는 온 세상을 맡기신다.” 이를 보면서 안중근과 본회퍼의 삶은 비극이 아니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삶에서 멈춰 있는 순간이야말로, 벌써 끝난 것처럼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야말로 비극이다.

 

 

이 글에 나온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 내용은 국가보훈처가 발간하고 윤병석이 역편한 『안중근전기전집』에서 인용했다.
글 마지막에 인용한 본회퍼의 문장들은 ‘복 있는 사람’이 펴낸 『나를 따르라』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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