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사람,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나의 무능함을 드러나게 만드는 타자는 내게 두려움과 답답함, 좌절감을 안겨 주지만 또한 내게 새로운 것을 열어 줄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소설은 잘 보여 준다. 멀쩡히 본다고 생각하기에 내 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이렇게 가려져 있을까. 나와 다른 이들을 통해 배울 자세를 갖춘다면 또 얼마나 많은 ‘보기’의 세계가 열릴까.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문학동네)의 표제 소설인 「대성당」 이야기는 ‘나’(남편)의 집에 손님이 찾아온다는 소식과 더불어 시작된다. 손님은 아내가 10년 넘게 알고 지낸 남자다. 하룻밤 묵고 갈 계획이란다. 엄청 불편할 것이 불 보듯 훤하다. 거기다 맹인이라니. 맹인과는 무엇을 함께 하며 무슨 이야기를 나눈단 말인가. 겪어보지 못한 낯선 존재의 방문이 주는 부담감과 거북함이 만만치 않다.

 

손님이 머무는 동안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도 문제지만, 손님 자체도 마뜩지가 않다. 그는 아내가 군인이던 전 남편과 사귀던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다. 첫 번째 남편이 직업상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던 터라, 결혼 이후 잦은 이사 끝에 그녀는 기존에 알던 사람들과 관계가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고립된 상태에서 그녀는 맹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서로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특별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아내는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과 나눌 만한 이야기를 테이프에 담아 그에게 보냈고, 맹인도 아내에게 그렇게 했다.

 

남자들이 잘 못하는 것, 그리고 맹인이 눈뜬 사람보다 잘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한 일. 듣는 것. 집중해서 듣는 것. 딴 데 시선을 두지 않고 듣는 것. 이 부분에서 남편이 모종의 열등감과 위기감을 느낀다 해도 이상할 것 없겠다.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서로의 사정과 속내를 다 들려주고 들어온 관계라니. 둘 사이에 어떤 감정적 교감이 있는지, 교류가 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남편은 불편하다.

 

맹인이 찾아오고 남편은 다소 퉁명스럽게 대화를 진행해 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아내와 맹인의 다정한 대화를 뒤로 한 채 남편은 마침내 TV를 튼다. 아내는 못마땅해하는 티를 팍팍 내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거북한 분위기를 도와주라고 있는 게 TV 아닌가. 다큐멘터리가 진행 중이어서 다른 곳으로 돌려봤지만 달리 볼 만한 것이 없었기에 결국 다큐멘터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내가 피곤하다고 잠시 눈을 붙인 사이, 맹인과 남편 둘 사이의 특별한 교류가 시작된다.

 

맹인 가르치기 1

 

대성당을 소개하는 TV 다큐멘터리는 여러 대성당의 영상을 보여주고 해설자가 대성당에 얽힌 여러 가지를 설명한다. 그런 언어적 설명이 제공하는 정보를 접했다고 해서 맹인이 대성당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남편은 맹인에게 묻는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건지 아시느냐는 겁니다.…누가 대성당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들이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개념이 잡히느냐는 거죠?”

 

맹인은 방금 다큐멘터리에서 들은 내용을 읊는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 년,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 한 집안이 대대로 대성당 하나에 매달린다, 대성당을 짓는 데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그 작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대성당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까? 이런 의미에서라면 대성당만이 아니라 큰 건물, 대를 이어 전수되거나 진행되는 어떤 기술, 사명, 가업 같은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맹인은 이어지는 말에서 바로 그것을 지적한다. “그런 식이라면 이보게.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그리고 맹인은 솔직하게 말한다. 해설자가 말해준 내용 말고는 대성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리고 남편에게 설명을 부탁한다. 뜻밖의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자 남편은 당황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한단 말인가. 그는 대성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높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대성당은 위로 높이 솟았다. 하늘을 향해서. 그리고 높은 대성당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버팀도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맹인을 위해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친숙한 구조물인 고가도로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맹인에게는 다 부질없는 시도다.

 

높다는 식으로 설명하려다 여의치가 않자 크기를 말한다. 정말 크다,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런 단어들로는 맹인에게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다. 그럼 재료는 어떨까. 대성당은 돌로 만들었다. 때로는 대리석으로. 그것도 부족하긴 마찬가지. 돌로 된 것이, 대리석으로 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당장 길바닥부터 돌이 아닌가. 높이, 크기, 재료로도 대성당을 설명할 수 없다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본질적인 것. 그렇다, 남편은 이제 대성당의 건축 목적을 꺼내 든다.

 

『대성당』표지, ⓒ문학동네

 

맹인 가르치기 2

 

“그 옛날에는 대성당들을 지으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거죠. 그 옛날에는 모두의 삶에서 하나님이 중요한 일부분이었습니다. 대성당을 지어놓은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대성당을 설명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남편은 대성당이 뭐 하는 곳인지, 왜 사람들이 그것을 만들었는지 이야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면 하나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대성당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에게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남편은 다시 대성당을 ‘보면’ 알 수 있는 느낌에 호소한다.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하고 으리으리한 대성당이 주는 어떤 경건한 느낌에 말이다. 하지만 대성당을 보면 찾아오는 느낌에 호소해서 맹인에게 그 건물을 설명할 수는 없다. 결국 남편은 설명을 포기한다.

 

맹인은 괜찮다고 하면서 질문을 하나 한다. “자네에게 어떤 형태로든 신앙심이 있는가?” 갑자기 웬 신앙심 이야기일까? 남편이 대성당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 옛날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려 보자. 맹인은 대성당의 건축 목적에 대해 옛날 사람에게 그랬다더라 식의 다큐멘터리 해설자 정도의 설명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대성당을 만든 사람들의 심정, 동기를 이해하는가? 그것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뭘 믿는 건 없다고 봐야겠죠. 아무것도 안 믿어요. 그래서 가끔은 힘듭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대성당에 관한 대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떠올려 보자. 남편은 맹인에게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남편은 그 질문이 ‘대성당이 어떻게 생긴 건지 아느냐?’는 질문과 동일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여러 시도를 거치며 그 생김새를 설명하는 데 실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편은 포기하지 않고 대성당의 건축을 가능하게 만든 근본 동력이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소환한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 아느냐는 질문이 그 건축물의 생김새에 대한 질문 그 이상의 것임을 시인한 셈이다. 그리고 그 핵심 동력인 신앙심이 자신에게 없다고, 시각적 경험 외에 대성당에 대해 경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이렇게 정리한다. “대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르쳐드리기가 어렵군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대성당이라고 해서 나한테는 뭐 특별한 게 아니거든요. 아무 의미도 없어요.” 자신의 실패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처리하려는 심사겠다. 나한테 뭐 큰 의미가 있는 대상도 아닌데 설명 못 할 수도 있지. 신앙심이 없는 나에게 대성당은 별 의미가 없는 곳 아니겠느냐고 둘러대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이렇게 설명자로서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인정했을 때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 그 얘기를 해보자.

 

맹인에게 배우기

 

눈이 멀쩡한 남편은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를 포기하지만, 맹인은 대성당에 대해 배울 기회를, 맹인 특유의 방식으로 대성당을 ‘볼’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남편이 눈 뜬 사람으로서의 설명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남편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볼 수도 없는 사람이 종이와 펜을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맹인은 남편에게 펜을 들고 종이에 대성당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펜을 든 남편의 손에 자기 손을 얹는다. 남편은 집처럼 생긴 네모를 그린다. 그 위에 지붕을 얹고, 지붕 양쪽 끝에다가 첨탑을 그린다. 바보짓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다음, 남편은 맹인의 격려를 받아 가며 아치 모양 창문들, 버팀도리까지 그린다. 그리고 사람들까지. 맹인의 말대로, 사람이 없는 대성당은 말이 안 되니까.

 

그리고 공동작업의 절정부가 찾아온다. 맹인은 남편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멈추지 말고 그리라고 한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맹인이 이제 눈을 떠서 그림을 보라고 했지만, 남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있고 싶다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맹인이 묻는다. “어때? 보고 있나?” 남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집 안에 있었지만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맹인은 남편의 손을 빌려 자신만의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남편에게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덕분에 남편은 자기 힘으로 결코 전달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맹인에게 대성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도 그렇게 ‘본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와는 다른 것이요, 그 못지않게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정보였다.

 

맹인이 그렇게 손으로 볼 수 있는 정보량은, 눈으로 보는 정보량에 비할 때 아마 제한적이고 빈약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맹인이 자신의 형편에서 경험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최고의 직접적 지식이었다. 그래서 그 세계, 그 경험에 참여한 남편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생김새를 안다는 것일까? 눈 뜬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남편도 대성당의 모습을 보았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되었으니 대성당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맹인에게 대성당을 설명하면서 남편은 자신이 그 겉모습과 주변의 이야기만 알 뿐, 대성당을 대성당이게 만드는 것, 그 핵심이라 할 신앙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은 대성당은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큰소리치지만, 신앙이 없어서 오는 아쉬움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눈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하지만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남편은 맹인을 통해 배우게 된다. 그 배움은 그가 자신이 본 것을 눈먼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했다. 짜증을 내거나 허풍을 떨거나 완고하게 굴지 않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설명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맹인의 인도를 따라갔다. 그럴 때 비로소 새로운 ‘보기’의 세계가 열렸다.

 

나와 다른 사람,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나의 무능함을 드러나게 만드는 타자는 내게 두려움과 답답함, 좌절감을 안겨 주지만 또한 내게 새로운 것을 열어 줄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소설은 잘 보여 준다. 멀쩡히 본다고 생각하기에 내 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이렇게 가려져 있을까. 나와 다른 이들을 통해 배울 자세를 갖춘다면 또 얼마나 많은 ‘보기’의 세계가 열릴까. 이 소설은 내게 그런 타자와의 정직하고 겸손한 만남을 통해 주어질 ‘눈 뜨는’ 삶을 조금은 설레며 기대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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