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달력에는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라고 적혀 있지만, 장애인운동가들은 이날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지키며 차별적인 사회의 변화를 외친다. 매년 3월 말부터 시작하는 4‧20 장애인 차별 철폐 투쟁은 ‘장애 문제’가 ‘이상한 몸’을 가진 장애인들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정의의 문제임을 시민들에게 계속해서 알려 준다. 장애인운동가들은 올해도 우리 사회가 앞으로 일구어 나가야 할 정의의 모습에 대해 외치고 있다. (본문 중)
박은영1)
기후는 갈수록 심상치 않지만, 다행히 올해도 꽃들과 봄바람은 우리를 찾아 주었다. 장애계도 봄을 맞았다. 장애 운동판도 봄이 오는 3·4월은 더 바쁘게 움직인다. 지난 3월 23일 2023년 4‧20 투쟁을 위한 공동 투쟁단이 발족했다. 매년 달력엔 4월 20일 칸에 ‘장애인의 날’이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 이날은 몇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 왔다. 4월이니만큼 ‘4월 20일 이름 연대기’를 한 번 풀어 볼까 한다.
재활의 날
4월 20일에 처음 이름이 생긴 건 1972년이었다. 1970년대가 국제적으로 ‘재활의 10년’으로 지정되자, 의사, 사회사업가 등 재활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있던 한국신체장애자재활협회는 1972년 이날을 ‘재활의 날’로 정해 기념식을 열었다. 여기에 모인 전문가들은 ‘중증 장애인에 대한 국가의 평생 보호, 장애인에게 맞는 직종 및 직장에 장애인 우선 채용, 장애인 맞춤 주택 정책’ 등을 담은 장애인 복지 대책을 제시하며 장애인복지기본법 제정을 촉구했다.
이날 기념식에 모인 재활 전문가들은 ‘장애자 재활 사업 방안’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전문가들은 장애인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장애인들을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으로, 적어도 ‘사회의 짐’이 되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드는 ‘재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동안 방치되어 온 장애인들’의 재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역설했다.
이날 한 전문가는 ‘장애자의 잠재력을 키워 주어 신체‧정신‧직업적으로 유능한 사람으로 육성’하는 데 ‘재활’의 의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는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문장을 외우며 ‘조국 근대화’를 위해 뛰어야 했던 시대였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장애인들에게도 열심히 재활을 받아 ‘산업 전사’로 거듭날 것을 주문하는 글과 말들이 일반 언론에도 간혹 등장했다. 때문에 재활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유능한 산업화의 역군으로 거듭나기 위해 마땅히 최선을 다해야 할 장애인들의 의무 사항이 되어 버렸다. 장애인 스스로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이기 이전에 말이다.
장애자의 날/장애인의 날
‘복지 국가 구현’을 내세웠던 전두환 정부는 1981년, ‘재활의 날’이었던 4월 20일을 ‘장애자의 날’로 제정했다. 교육과 훈련, 의료적 개입을 통한 재활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장애인 복지에 대한 구호도 늘어갔다. 하지만 1980년대에도 장애인들이 교육, 의료, 노동 등 각종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는 마련되지 않았다.
장애인들은 기만적인 정부를 비판하며, 1987년 말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과 당시 실효성이 적었던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을 촉구하는 ‘양대 법안 투쟁’을 벌였다. 다음 해 그들은 실질적인 장애인 복지 정책은 수립하지 않으면서, 88올림픽과 함께 열리는 패럴림픽만 준비하며 복지 사회에 대한 빈 구호만 남발하는 정부를 비판하며 ‘장애자 올림픽 거부 투쟁’을 진행했다.
1990년에 ‘장애자의 날’은 ‘장애인의 날’로 한 번 더 이름을 바꾼다. 하지만 이름이 바뀌었다고 그날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4월 20일은 늘상 정부나 관변 단체, 교회 등이 장애인을 불러놓고 행사를 벌이는 날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언론들은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의 인간 승리 드라마를 보여주거나 비장애인의 후원이 필요한 ‘불쌍한 장애인’들을 취재하기에 바빴다.
국가적인 기념일이 된 4월 20일은 매년 장애인에 대한 시혜적 시선과 장애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 것으로 치부하는 관점이 재생산되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방송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장애인들이 유독 많이 클로즈업되는 날, 이날은 많은 장애인들에게 ‘TV를 꺼두는 게 맘 편한 날’이 되었다.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
1987년부터 양대 법안 투쟁과 장애자 올림픽 거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 장애인운동가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장애인의 날 행사의 기만성을 비판하며, 4월 20일마다 장애인 노동권 확보를 위한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이날이 장애인 운동 진영에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이후였다.
이동권 투쟁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2002년 봄, 4월 20일을 앞두고 ‘4‧20 장애인의 날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장애 해방을 선포하라!’ 등의 구호가 등장했다. 이들은 장애인에게,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장애인에 대한 기만적이고 시혜적인 시선도, 장애인을 ‘치료’하고 ‘훈련’하는 과정도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 없이는 복지 국가도 정의로운 사회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외쳤다.
지금도 달력에는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라고 적혀 있지만, 장애인운동가들은 이날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지키며 차별적인 사회의 변화를 외친다. 매년 3월 말부터 시작하는 4‧20 장애인 차별 철폐 투쟁은 ‘장애 문제’가 ‘이상한 몸’을 가진 장애인들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정의의 문제임을 시민들에게 계속해서 알려 준다. 장애인운동가들은 올해도 우리 사회가 앞으로 일구어 나가야 할 정의의 모습에 대해 외치고 있다.
점점 뜨거워지고 힘겨워져도 지구는 기어이 한 번 더 우리에게 새 이파리와 꽃잎을 선물함으로써 환경의 소중함을 드러내 주었다. 찬란하게 핀 각종 꽃들은 일정한 표준에 맞추지 않은 각자의 모습 그대로가 봄을 더 빛내 준다는 것을, 그리고 아름다움을 앞과 뒤, 위와 아래로 나누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우리 눈앞에 상연해 보이고 있다.
이 4월, 고맙게 돌아와 준 꽃들 사이에서 장애인들도 시위로 공연으로, 혹은 글이나 영상으로 우리 사회가 가꿔 가야 할 평등하고 아름다운 정의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모두가 그 아름다움을 부디 놓치지 않길,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침내는 그 봄을 이루어 가는 춤사위에 함께 어울려 들어가는 봄이 되기를 바라 본다.
1) 『소란스러운 동거』(IVP, 2022)의 작가이며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참고 자료
김도현. 『차별에 저항하라』. 박종철출판사. 2007.
비마이너 기획, 정창조 외 지음. 『유언을 만난 세계』. 오월의봄, 2021.
“재활협서 복지기본법 건의 ‘신체장애자에 연금 등 지급을’”. 「경향신문」, 1972. 4. 21.
“신체장애자 복지 향상 시급 자활의 날을 맞아 결의문을 채택”, 「동아일보」, 1972. 4. 24.
“420공투단 출범… 장애인 1천 명 ‘표적수사 오세훈, 너무, 부끄럽다’”, 「비마이너」,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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