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YVE letter 66호 보러가기
<로잔 언약>이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1974년 6월, 스위스 로잔에서 「세계 복음화에 관한 국제대회」가 개최되었는데, 로잔언약은 이 때 논의 된 “그리스도인/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총체적 복음, 총제적 선교”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문서입니다. 이후로 언약의 정신과 실천이 확산되어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이고, 사회적이며 개인적이고, 물질적이면서 영적’이라는 신학의 정립(휘튼선언, 1983)과 ‘사회의 구조적 악과 폭력에 대한 예언자적이며 성육신적인 지적과 투쟁이 필요하다’선언(마닐라선언, 1989)까지로 이어지게 되었죠.
아무튼 복음주의 교회, 복음주의 사회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 이 로잔언약, 로잔운동은 내년(2024년)에 50주년을 맞게 되는데요. 기윤실을 포함한 복음주의 사회선교단체 몇몇이 모여 로잔의 정신과 우리의 걸음을 되짚어보고 한국교회의 갱신 및 사회선교운동의 역할 과제를 제안하고자 격월로 <연속 심포지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10월 31일, 세번째 심포지엄은 “로잔운동과 청년의 공감”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습니다. 2030 청년들이 대화, 공존, 여성, 급진적 순종과 화해, 곁에 서는 감각, 이중언어 등의 키워드로 발제에 나섰는데요. 현장에 참여했던 저는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발제자들은 많은 청년들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사회 속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있을 이야기들을 담담한듯 단단한 어조로 풀어내주었습니다. 로잔운동, 한국교회, 그리고 앞선 세대들이 말하고 보여주었던 정신과 태도에 대한 다면적 평가와 소망 어린 요청들이 무척 ‘공감’되었습니다.
2023년 지금 여기에서 우리 청년들이 바라는 것은 모두가 동등하다는 감각, 더 깊이 뿌리내리되 저 멀리까지 다양한 것에 연결되는 삶의 자세, 적극적이지만 낮은 태도로 당사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로잔언약’들에는 시대와 세대, 문화와 인종을 너머 의제가 확장되고 일치되는 모습이 발견됩니다. 여성, 청년, 노동자, 구석진 곳에 있는 한 사람에게까지 우리의 관심과 논의가 모아지고 일치되는 것, 이들을 둘러싼 유무형의 악과 폭력을 거두는 일, 차별과 소외 없는 교회와 사회를 만들 책임을 다하는 일이 ‘현재적’이고 ‘성육신적’인 복음의 실천이며 로잔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심포지엄 ‘로잔운동과 청년의 공감’에서 다루어진 논의는 그 날의 것으로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청년들은 물론이고 온 세대와 온 교회가 함께 더 크게 더 자주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청년들이 공감의 온도를 측정하는 것은, 그 공동체의 과거, 현재, 미래의 온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 웨이브레터는 그 이야기들을 모았고, 또 다른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도록 초청합니다. 로잔 너머, 우리의 현재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길 바라봅니다. 🙂
– 시앤 드림
아래는 <로잔너머 심포지엄 3차 – 로잔운동과 청년의 공감>에서 발표한
박다혜, 김서진님의 발제문을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하였습니다.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것에서 시작하기
박다혜 변호사
1. 들어가며
(전략)어린 시절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캠퍼스 선교단체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신나게 신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분명하고 구체적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다른 운동에 비한다면 교회나 교계, 복음주의 운동, 하나님나라 운동 등에 대한 일종의 소속감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입니다. “(아직도) 교회를 다니냐”며 저를 낯설고 신기해하는 질문을 교회 안팎에서 자주 받아 왔습니다. 한번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교회가 제 고민이자 숙제라고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2. 로잔정신의 무엇에, 어떻게 공감하는가
(전략)그 시절 제가 공동체라고 부르던 교회나 선교단체의 지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함께 모여 열정적으로 예배하는 기쁨을 배웠지만, 아쉽게도 어디에서도 세상 한 복판에서 같은 뜻을 품는 이, 동지(同志)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어떻게 복음이 나와 이웃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도록 할 것인지,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는 나의 노동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조금이나마 실천할 것인지와 같은 고민이 가득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부르던 이들과 그것을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중략)
저는 ‘복음의 총체성’이나 ‘하나님의 선교’ 등의 개념을 잘 알지 못했지만, 감사하게도 자연스럽게 복음을 총체적으로 인지함으로써 세상 곳곳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구하며 예배하여 왔습니다. 재판을 준비하며 조용히 책상에 앉아 밤을 새워 법원에 제출할 서면을 써내려가는 시간을 통해 그 어느 순간보다 간절하고 실제적으로 이웃들의 삶을 헤아립니다. 누군가를 저주하기도 하고, 주께 탄원하기도 합니다. 세세한 기도와 찬양으로 올려 드리기도 합니다. 여러 일터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분투하며, 때로는 사건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온갖 책과 논문과 보고서를 뒤지며 근거와 논리를 찾아 헤매는 순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진실된 예배이자 선교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지지받는 안정감 속에서 노동의 과정과 열매를 드리고 있습니다. (중략)
성경이 보여 주는 인간의 노동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는 노동이 창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의 일부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각기 다른 소명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우리의 노동하는 삶 전체가 사역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케이프타운 서약 2부 행동요청 A항).
복음이 상황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고, 이면의 불의한 세계관과 체제에 도전하고 이를 변혁하지 않는다면, 악한 날이 올 때에 그리스도인의 충성은 헌신짝처럼 버려질 것이고, 사람들은 거듭나기 전의 충성이나 행위들로 되돌아갈 것이다(케이프타운 서약 2부 행동요청 B항).
구체적인 맥락과 결은 조금씩 달리 하지만 로잔언약과 이를 계승한 각 서약이 보여주는 로잔정신은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이 상황에 뿌리 내리라고, 교회 담벼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우를 범하지 말고 세상에 들어가 사랑하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저는 로잔정신에 공감하고 이를 계승하려 애쓰는 삶을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전략)각자의 몫과 과정은 모두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복음의 우산 안에서 가능한 정체성, 가능한 서사가 단 하나가 아니라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다른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언어, 이중언어를 쓰는 것을 널리 상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전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더 큰 불평등을 양산하는 불로소득 자본주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화답이 침묵, 무관심, 중립을 지킨다는 핑계로 그에 공모하는 것은 아닌지 아프게 돌아봅니다. 오늘도 7명 이상의 노동자는 일터로 출근했다가 생을 잃었을 것인데, 우리의 자리가 이윤추구와 시장의 논리로 다져진 매끈하고 평온한 길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리에 눈을 떴다고 하는 이들이 세상이 깨지고 상한 곳임을 인지했다면서도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예배하고 말씀 묵상하고 주변 사람들을 친절히 대하며 교회로 초대하고, 나머지 각자 일상은 ‘깨지고 상한’ 그 질서와 크게 다르지 않게, 혹은 그에 복무하며 산다? 우리는 진리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나라를 꿈꾼다는 사람들이라면서, 우리의 ‘복음’이 어쩌다 그렇게 귀결되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익숙한, 소위 믿음의 공동체에 갇히거나 안주하지 말고 세상에서(도) 동지와 공동체를 찾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나아가면 그곳에도 함께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께서 예비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과 손·발이 교회나 선교단체, 가령 이런 자리나 성서한국 대회에 모이는 단체들 같은 정도에만 한정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문 밖으로 나가 그곳에 참여하든 베껴와서 교회나 복음주의 운동 안에 변주하여 이식하든 말이지요. 다양한 옷을 입고 다른 언어를 쓰며 세상의 역사 속에서, 오늘의 현장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을 함께 목격하고 예배하는 동지들이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김서진 방송작가
1. 들어가며
(전략)로잔의 이름으로 모였으니 작은 이의 이야기도 담론이 될 수 있고, 닿을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밑바탕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남성 위주의 개신교 내부에서 여전히 자신을 던지며 싸우는 믿음의 여성 선배들에게 화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들이 지치지 않기를 바라고, 의지를 잃지 말아달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됐다. (후략)
2. 여성의 현실
(전략)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의제가 ‘나의 의제’가 아닐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여타 의제에 대해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교회 내 여성 청년들이 ‘미래에도 여전히 여성들은 교회의 주요 자리에 설 수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무력감을 갖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어떤 날은 참고, 어떤 날은 수긍하고, 때로는 속으로 분노한다. 왜 여성은 주요 자리에 설 수 없을까. 왜 여성에게는 주로 양육과 봉사에 한정된 사역만을 요구할까. (후략)
3. 연결되기 위해서는
숨통이 필요하다. 단숨에 교회를 뒤바꿀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당장 그럴 수 없다면 가진 의제를 부담 없이 터놓고 나눌, 함께 변화를 논의하고 지원해 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중략)
1)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전략) 복음주의권의 여성 청년들은 교회 안팎으로 소외의 두려움에 놓여있다. 여성 청년들에게는 다양한 전제와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는 공론장이 매우 필요하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감각의 개념을 넘어서는, 다른 세계를 끌어안는 일이다. (후략)
2) 시혜적인 태도와 침묵에서 벗어나 여성 의제를 주요 의제로 삼기
(전략) 교회든 로잔이든 이렇게 부분적인 허용과 참여 비율을 늘리는 등의 단순한 방안으로는 진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없다. 핵심을 외면하는 것이며 다분히 시혜적인 태도다. 시혜적인 태도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여성을 답답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태도가 ‘침묵’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대다수의 남성에게 여성 의제는 주요 의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견고한 남성 위주의 공동체에서 여성 의제는 대체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 (후략)
3) 자세를 낮춰 다가가기
기성세대에게 로잔이 얼마나 의미 있고 중요한지를 간접적으로 많이 들었다. (중략) 하지만 평범한 젊은이들에게 로잔은 참여의 허들이 꽤나 높은 운동이자 낯선 대회다. (중략) 사역자, 신학생 중심의 홍보가 아닌, 구석진 동네의 한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중략) 큰 교회가 조직적으로 만들어가고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모여 하나의 이어진 운동과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로잔의 원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모을 때다. 로잔이 여느 개신교 모임처럼 ‘그들만의 리그’로 남기 위한 곳이 아니라면.
4. 우리는 진짜 연결되고자 하는가?
(전략) 하나님은 사람을 공동체로 부르셨고, 때문에 사람은 실망감 속에서도 여전히 연결될 공동체를 찾는다. 사람과 사람이 늘상 완벽하게 연결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영혼을 향해 기꺼이 내딛자. 우리의 화해가 한 발자국에서 시작될 때 로잔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인 가수 ‘악동뮤지션’의 노래 <물 만난 물고기>의 가사로 마무리해본다.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예언하듯이 살길 live like the way we sing.’
로잔의 후퇴를 걱정하기 전에
– 세 번의 ‘로잔너머 심포지엄’에 참여하며 –
이명진 (기윤실 간사)
대학생 시절 경험했던 선교단체(IVF) 간사님들은 하나같이 ‘로잔언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74년 6월 스위스 로잔에서 150개 국가 135개 교파를 대표하는 이들이 선교에 대한 강조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결의한 덕에 우리의 신앙이 더 풍부해졌다고 배웠다. 이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전도와 사회참여를 고민하던 당시 젊은 개신교인들에게 ‘총체적 복음’이라는 해답을 주었다고 했다.
이후 로잔은 휘튼 선언과, 마닐라 선언, 케이프타운 서약 등을 지나 2024년 서울 대회를 앞두고 있으며, 현재 서울대회는 보수 성향이 강한 대형교회 중심으로 공식 준비팀이 꾸려졌다. 이 때문에 ‘로잔의 후퇴’를 걱정하는 개인과 단체들이 ‘로잔너머’라는 이름으로 연합했고, 로잔의 의미를 기억하고자 지난 6월부터 연속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10월 포럼은 서울영동교회에서 ‘로잔운동과 청년의 공감’을 주제로 모였다.
발제자로 나선 청년 세 분은 자신의 서사를 통해 ‘대화, 여성, 정체성’ 등을 강조하며 진솔한 소통의 필요성과 배제된 이들에 대한 주목을 강조했다.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로잔 이후 태어난 세대가 본인의 맥락에서 이해한 로잔의 의미를 설명해 준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논찬과 참가자 토론을 들으며 다른 온도를 느끼는 이들이 나타났고, 나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로잔의 후퇴를 걱정하며 이 모임을 주도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성찰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사실 로잔은 1974년 태동할 때부터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선언문 상당 부분에 교회의 선교적 영역을 강조한 것에 비해 사회적 책임을 기술한 부분은 현저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며, 이를 주도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한계 또한 분명하다. 일례로 선언문 초안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존 스토트 목사의 저서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보면, 젠더영역에서 만큼은 그도 보수적인 견해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로잔언약이 당대 진일보한 성과를 거두었음과 동시에 또 하나의 경계선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로잔이 강조한 총체적 복음에 처음부터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로잔을 넘어서자 주장하는 ‘로잔너머’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의 논의가 기존 언약이 놓쳐버린 총체성을 확장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수 교회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것과 동시에, 미약하더라도 우리의 선언은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해석이 담길 줄 알았다. 하지만 과거 로잔에 해답을 얻었던 우리의 비교군은 여전히 자본과 권력으로 비판받는 대형교회에 머물러 있었고, 그것에 비해서는 ‘더 나은 우리’에게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잔너머’ 모임의 분위기 속에서 ‘총체적 복음’에서 배제된 이들에 대한 미안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로잔언약을 국내에 알리며 근본주의 개신교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애써온 노력을 전부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누구나 본인이 처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기 힘든 것도 인정한다. 나 역시 그런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의 관점이 미치지 못했던 과오를 직면하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조금 더 진지해지자고 요청하고 싶다. 협소한 총체성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반복하고, 이를 개선하지 못하는 우리는 뼈아프게 성찰할 순 없을까. 이것이 아니면 우리가 넘고자 하는 로잔이 과연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당대 사회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분투했던 로잔의 흔적은 지금도 유의미한 해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또 하나의 경계가 되어 문자로만 남는다면 우리는 로잔을 ‘너머’설 수 없을 것이다.
매월 첫째, 셋째주 수요일에 찾아오는 WAYVE letter를 구독해주세요!
👉구독하기 : bit.ly/WAYVE레터_구독
👉지난 뉴스레터 보기 : bit.ly/WAYVE레터_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