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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재열의 후배 동재다. 그는 재열보다 훨씬 뜨겁게 소설을 쓰던 청년이었지만, 생활고 끝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원고 한 편이 재열의 손에 있었다. 한참 전에 받아두고도, 재열은 그 원고를 읽지 않았다. 후배의 재능이 자신을 압도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현실 속에서 불쑥 그 원고를 펼쳐 든 순간, 재열은 거기서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발견한다. 이제 원고는 유혹이 된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웹툰 『저궤도 인간』을 읽는 동안 한 인간의 내면을 가까이서 보는 듯했다. 섬세한 그림과 절묘한 문장이 맞물려 그의 양심이 흔들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주인공 주재열은 성실하고 순수한 문학도이자 강사다. 문학을 사랑했고, 연구에 헌신했고, 나름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왔다. 그러나 문단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가능성만 보여준 채 머물러 있었다. 강의하던 대학에서는 그가 과거에 표절 의혹을 정면으로 지적했던 교수가 학과장이 되면서 안 그래도 좁은 위치가 더욱 암담해진다. 부모는 끊임없이 경제적 도움을 요구한다. 그런 가운데도 그는 자신을 지키며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본인의 평가를 들어보자.

 

부정한 것은 탐낸 적이 없었다.

십 원 한 푼에도 값어치를 다하려 했다.

미움과 시기심이 피어오를 때에도

그것이 혀끝에는

달라붙지 않도록 했다.

몸은 낮은 곳을 기어다녀도

영혼은 아득바득 높은 곳에 앉혀두는 것.

나에게 그것은

단순히 품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이 독백은 재열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보여 준다. 작품은 그렇게 고결하기를 꿈꾸던 한 인간이 궁지에 몰려 점점 벼랑으로 밀려나는 과정을 그린다. 독자는 그의 절망에 깊이 이입하게 되고, 그와 함께 숨이 막힐 만큼의 답답함을 느낀다.

 

동아줄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재열의 후배 동재다. 그는 재열보다 훨씬 뜨겁게 소설을 쓰던 청년이었지만, 생활고 끝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원고 한 편이 재열의 손에 있었다. 한참 전에 받아두고도, 재열은 그 원고를 읽지 않았다. 후배의 재능이 자신을 압도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현실 속에서 불쑥 그 원고를 펼쳐 든 순간, 재열은 거기서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발견한다. 이제 원고는 유혹이 된다. “절박한 상황의 문학도에게 이 원고는 구원의 동아줄일까, 아니면 파멸의 덫일까?”

 

작품은 재열을 단순한 ‘도둑’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속이려 한 것이 아니다. 원고를 출판사 선배에게 보여 주었을 때에도 망설였고, 몇 번이나 진실을 밝히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누군가 등장해 말이 끊기고, 고백의 기회는 번번이 어긋난다.

 

결정적인 순간, 그를 무너뜨린 것은 생계보다도 ‘인정욕’이었다. 자신이 낸 원고를 들고 놀라워하는 편집자의 얼굴에서 재열은 처음으로 다른 가능성을 본다.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세계를 넘어 자신이 꿈꾸던 세계의 문턱에 서는 감각이었다. 그 세계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고, 편집자인 ‘그녀’가 예의상 건네는 것과 다른 표정을 보여 주고,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이 열리는 곳이었다.

 

웹툰 <저궤도 인간> 포스터.

 

아득바득 올려 두었던 영혼이 바닥으로 떨어진 그날

 

이 웹툰은 아직 연재 초반이지만, 향후 전개가 어느 정도 예견된다. 재열은 동재의 원고로 스타 작가가 될 것이다. 출판계 선배는 그를 높이 평가하고, 편집자도 그를 새롭게 볼 것이다. 학교에서도 기회가 열리고, 인세는 부모의 요구를 가볍게 넘길 만큼의 수입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정점에서 균열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기로에 설 것이다. 균열의 계기는 바깥에서 올 수도 있다. 작품의 진짜 저자를 아는 이가 나타나거나, 재열이 후속작을 통해 한계를 드러낼 수도 있다. 균열의 계기가 그의 내부에서 올 수도 있다. 이를테면 그는 양심의 무게에 짓눌려 붕괴할지도 모른다. 그의 붕괴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훌륭한 남의 원고 덕분에 출판사 사무실에서 환대를 받던 재열은 여러 번 동재의 이름을 꺼내려 하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친다. 그리고 결국 남의 원고가 자신의 이름으로 나가기로 정해진 그날, 그는 출판사 화장실에서 구토하고 출판사에서 나오는 길에 승강기 안에서 주저앉는다.

 

그다음 컷에서는 그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독백이 등장한다. 이 글 서두에서 인용한 그 독백이다. 그중 후반부만 다시 인용해 본다.

 

몸은 낮은 곳을 기어다녀도

영혼은 아득바득 높은 곳에 앉혀두는 것.

나에게 그것은 단순히

품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이 문장이 끝나자마자, 화면엔 베개가 보이고 ‘턱’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재열은 열에 시달리며 몸을 웅크린다.

 

아득바득 올려 두었던 영혼이

한 번도 닿아 보지 못한 바닥으로

사정없이 굴러떨어진 그날.

나는 한참을 앓아누웠다.

 

이 장면은 재열의 도덕적 붕괴를 감정적으로, 시각적으로 더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악인이 아니라, 버티다 무너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생존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떳떳한 삶이야말로 유일한 생존의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한참을 앓아누운 후 일어났을 때, 그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복잡하다. 거기엔 연민과 안타까움과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뒤섞여 있다.

 

쏘냐와 이희호

 

재열이 ‘자수’하려다 실패하는 장면들을 거듭 접하면서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렸다. 살인범 라스콜니코프 역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마침내 경찰서로 자수하러 갔다. 하지만 자수하러 왔다는 말은 잘 나오지 않았고 그 말을 꺼내려 할 때마다 번번이 누군가가 말을 끊거나 뭔가 일이 벌어지면서 결국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처음 의도와 달리 자수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경찰서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경찰서 맞은편에는 그를 진심으로 아끼는 쏘냐가 간절한 눈빛을 하고 서 있었다. 그 눈빛에 라스콜니코프는 쓴웃음을 지으며 경찰서로 돌아간다. 그 장면은 내게 『죄와 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 혼자 힘만으로는 엄중한 윤리적 선택의 무게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용기와 결단은 사랑하는 이의 응원과 격려와 눈길과 지지에 힘입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이 장면은 현실의 사례와도 겹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이희호 여사의 묵묵한 동행과 지지에 힘입은 바 컸다. 훗날 김대중은 군부의 탄압보다 아내 이희호에게 버림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고 고백했다. 동지이자 아내의 응원과 사랑이 그를 꿋꿋이 붙들어 주었다.

 

『저궤도 인간』의 주재열에게는 아직(!) 그런 쏘냐가, 이희호가 없다. 그가 진실을 털어놓고 싶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고, 그를 붙잡아 줄 누군가가 곁에 없다. 그래서 그는 유혹 앞에서 무너진다. 작가가 그에게 그런 인물을 붙여 주면 좋겠다. 그가 고립의 상태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재열을 지켜보는 우리 독자들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다. 『저궤도 인간』은 문학과 양심, 그리고 고립된 인간의 이야기다. 재열이 다시 일어설 때, 그 곁에 한 사람의 눈빛이 있기를, 우리 각자의 삶에도 그런 눈빛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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