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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관계를 ‘고용 관계’가 아니라 ‘동역 관계’로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윤실에서는 교회 현장의 실제 상황과 법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한국교회 교역자 표준동역합의서”를 제시했다. 이러한 동역합의서 작성 과정을 가짐으로써 부교역자의 사역 안정성과 처우를 개선하고 교회 내 불필요한 갈등의 원인을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중)
신동식(빛과소금교회, 기윤실 공동대표)
부산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담임목사의 언어폭력 사건이 한국 교회를 흔들어 놓았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과 욕설이 쏟아지는 녹취록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들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를 들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해당 목사의 신학교 동기들이 “왜 하필 이 시점에 공개하느냐”라며 발표한 담화문이다. 그럼, 언제 내는 것이 좋은가? 과연 진실을 밝히기에 ‘좋은 시점’이 따로 있는가? 사실 이런 언어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 교회 밑바닥에 만연한 고질적 병폐 중 하나다.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기도를 드리기 위해 청평 지역의 한 기도원을 찾았었다. 그리고 저녁 집회 시간에 예배당 앞자리에 앉았다. 당대에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가 설교자로 강단에 섰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마침, 한 어르신이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자 들어왔다. 그러자 그 설교자는 ‘일찍 오지 않았다. 설교 중에 들어왔다, 뒤에 있지 앞으로 왔다’며 상상할 수 없던 욕설로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집에서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욕을 예배당에서 목사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로도 부흥회 때에 부흥사들을 통해 반말은 종종 들었다. 마치 대단한 권위라도 있다는 듯이 함부로 반말하는 것을 보았다. 당시에는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역 현장 경험을 배경으로 돌아보니 이것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적어도 나는 그동안 사역자의 길을 가면서 담임목사에게 이런 막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아슬아슬한 경험은 늘 있었다. 부교역자를 함부로 대하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신학교 시절에는 선배들이 후배들을 향하여 얼차려를 주기도 하였다. 서구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이러한 일들이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사회적 현상의 수준에서 볼 때 두 가지가 분명해 보인다. 첫째로, 유교적 서열 문화가 교회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서열 문화는 목회자 간의 관계에서도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후배 관계의 철저함이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니 이런 점에서는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간의 동역자 의식은 기대하기 어렵다. 철저히 서열만 존재한다.
둘째로, 군대 문화가 기독교 안에 들어와 있다. 한국 사회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는 군대 문화다. 명령과 복종의 방식이 목회 현장에도 스며들었고, 권위는 섬김이 아니라 통제의 언어로 표현되었다. 목회자들이 사역 현장에서 ‘조인트 까였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이다. 이렇게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가 목회 현장에 반복 재현되고 있다.
교회 내부 상황을 보면 더욱 서글프다. 첫째로, 교회 성장 지상주의가 괴물을 만들었다. 한국 교회는 ‘꿩 잡는 것이 매’라고 교인 수가 늘어나기만 하면 목사가 존경을 받는다. 그래서 교회만 ‘성장’시키면 목회자의 비윤리적 행태조차 ‘능력’으로 미화한다. 대형 교회 목사에게는 일반적인 도덕적 잣대조차 비껴가는 풍토가 문제의 핵심이다. 대형 교회 신드롬이 한국 교회를 유독 강하게 붙잡고 있다. ‘큰 물고기는 큰물에 산다’는 식의 말을 대형 교회 목사에게 적용한다. 큰 교회를 이루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특별한 목회자로 여기는 풍토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물의를 일으킨 사람 역시 교회를 대형 교회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일부 측면을 볼 수 있다.
둘째로, 미래 사역을 볼모로 잡는 악한 구조가 존재한다. 한국 교회는 교단 체제로 움직인다. 그래서 목사는 교단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작은 교단이라면 교역자의 이동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 악한 고리가 있다. 부교역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직전 사역지의 평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부교역자의 미래를 가로막을 수 있는 권력이 현재의 목사에게 주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는 이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교역자 간의 관계가 정상적인 동역의 관계가 되지 못하고, 일방적 관리 관계가 된다. 담임 교역자들은 감시자의 위치에서 부교역자들을 감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인격적인 행동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이뤄진다.
셋째로, 담임 목사의 부교역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다. 한국 교회에서 부교역자는 철저하게 담임목사의 목회를 위한 도구로 인식되고 있다. 마치 일회용 소비재처럼 인식하여 필요가 없으면 내버린다. 여기에는 한국 교회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재정 상황이 열악하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우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이 인건비다. 그래서 재정적 여유가 있는 교회에 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큰 교회에서 사역하면 일단 생활이 편안해진다. 그러다 보니 월급이 볼모가 된다. 사역에서 월급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급하는 월급만큼 확실하게 사용한다. 어떤 교회는 생명보험도 들어 준다고 한다. 자본주의 폐해의 정점이 교회 현장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인격적인 동역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기적이다. 담임목사는 자신의 사역에 부교역자가 도움이 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해고하지만, 이러한 현실에 성도들 역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비인격적인 일들이 교회에서 난무하고 있다.
거칠지만, 이처럼 사회적 현상과 교회 내부 상황에 비추어 담임목사와 교회가 부교역자와 맺는 비인격적 관계의 원인을 진단해 보았다.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원인이 되는 상황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교회의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인격적 동역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간단한 답은 없지만 반드시 해결해 나가야 할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성경적 동역자 관계로의 인식 전환이다. 성경에는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관계를 보여 주는 장면이 많이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바울과 디모데의 모습 등이다. 이들의 관계에서는 폭력적 권위주의가 없다. 오히려 이들의 인격적인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장면들이 많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내 아버지’라 부른다.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 부른다. 그들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비유되는 것이다. 이들은 사역의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이며 승계자이다. 그 관계는 억압적 서열 관계가 아닌 사랑에 기반한 승계와 동역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인격적인 관계였다. 이처럼 동역과 승계를 인식하지 않는 한, 갑질은 반복될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한 성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목사를 병들게 하고 변질되게 하고 비인격적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를 위해서는 성도들의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교회 성장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증표라는 생각의 독초를 먹으면 안 된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방인들이 교회를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성장주의에 사로잡혀서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기보다 자본주의 세상의 온갖 마케팅 기술을 교회로 이식하는 일들을 중단해야 한다. 성장시키지 못하면 무능하다고 여기고, 교역자에게 사임 압박을 하는 교회의 악행을 멈추어야 한다.
셋째로, 사역에서 동역 관계를 규범화하여야 한다. 한국 교회의 인사 문제는 거의 담임목사의 주도로 이뤄진다. 그래서 당회와 일반 성도들이 관여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깜깜이 인사 구조로는 건강한 사역자를 양성할 수 없다.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관계를 ‘고용 관계’가 아니라 ‘동역 관계’로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윤실에서는 교회 현장의 실제 상황과 법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한국교회 교역자 표준동역합의서”를 제시했다. 이러한 동역합의서 작성 과정을 가짐으로써 부교역자의 사역 안정성과 처우를 개선하고 교회 내 불필요한 갈등의 원인을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표준동역합의서”가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성도들이 알고 있다면, 많은 끔찍하고 서글픈 일들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목사의 욕설 파문이 왜 이 시점에 나왔을까? 정치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윤실이 발표한 2026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이고 불신한다는 응답은 74.5%이다. 목회자 신뢰도에 대한 응답 역시 신뢰한다는 응답이 21%이고 불신한다는 응답은 73%이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회생 불가 상태로 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늦지 않게 사이렌을 울려 경고하고 계신다.
한국 교회의 회복은 소수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서로 책임을 미룰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현장에 제도적 미비점이 있다면 보강하고, 교역자 관계는 비인격적인 도구화와 경쟁이 아니라 인격적 동역과 승계의 관계로 회복해야 한다. 이제라도 빙산의 일각이 만천하에 알려졌으니, 더 늦기 전에 재정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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