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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있는 형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의 언더우드잉크타자기 회사가 세계 제일의 회사로 발돋움할 때, 형이 미국으로 와서 사업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 그리어슨 의사가 보는 앞에서 편지를 찢어버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분칠한 별장에서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살면서 방방곡곡에서 찬송하는 소리를 듣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멋진 삶이 아닌가!” (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해마다 4월이 되고 부활절이 오면 우리는 1885년 부활절 오후 3시에 제물포에 내려 그날 밤 한양 도성을 넘어 들어온 첫 내한 목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1859-1916)를 떠올린다.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첫 선교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인격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빚진 자
그의 가슴에는 바울처럼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엔진이 불타고 있었다. 뉴브룬스위크신학교 시절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고후 9:16)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다양한 전도 사역에 참여했다. 신학교 졸업 후 인도 선교사로 준비하면서 의학 공부를 하던 그는 1884년 한국 선교의 문이 열렸으나 보낼 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 자원자를 물색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인도로 가기 위해 지원서를 보내려고 하던 순간 “왜 너는 한국에 가지 않는가?”라는 도전에 직면했다. 하루에 수천 명이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는 한국인의 참상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소명에 그는 응답했고, 그 이후 한국에 대한 선교의 부채 의식이 삶의 동력이 되었다.

그리어슨 부부(사진 위쪽)와 언더우드 가족, 서울-소래 전도 여행 중, 1898년.
선교로서의 삶(Life as Mission)
다음은 김재준 목사가 1959년 토론토에서 92세의 그리어슨(Robert Grierson) 목사를 만나 대화한 내용 중, 그리어슨 의사가 내한 초기에 경험한 내용이다.
“맨 처음, 전혀 미개척 지대인 함경북도로 들어갈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들먹거리네. 나는 해안을 따라 장마당마다 찾아가서 전도하고, 맥래 목사는 산지를 찾아다녔는데, 첫 전도 여행을 끝내고 선교사 모임에서 귀환 보고를 할 때, 맥래 말이 산수갑산 지방에는 귀리와 감자밭은 꽤 넓게 개간됐는데, 사람 사는 집은 별로 보이지 않더라고 하면서 그리로 이민을 많이 보내야겠다고 주장하데 그려! 그는 한국 사람들이 골짜기 언덕 밑 가운데 집을 숨겨 놓고 산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길가에 집이 보이지 않으니까 집인 없는 줄만 알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내가 시정을 해 줬지!
언더우드 목사는 역시 거물이었어, 난 원두우 목사를 따라다니면서 얼마 동안 전도했는데, 하루는 시골 농촌 논두렁을 둘이 걸어가다가 앞에 가던 원두우 목사가 나를 불러 세우고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면서 “자네 이 편지를 읽어 보게!” 하길래 읽어봤지. 그건 타이프라이터 기계를 발명해 가지고 한참 돈벌이에 바빠 돌아가는 그의 형님께서 온 것이었어. 그 편지 내용이 뭔지 짐작하겠나? 선교사 그만두고 돌아와서 나하고 이 일을 같이 하자. 이익을 절반씩 나누기로 하고! 하는 것이었어! 원두우 목사는 그 편지를 빡빡 찢어버리면서 “이 나라 구석구석마다 찬송 소리 들릴 것을 생각해 봐! 백만장자의 분칠한 별장쯤이 문제나 되겠는가!” 하더군. “굵직한 믿음이 아니야?” 하였다. [중략]
그날 밤 스콧 박사 부부도 멀리 60마일 차를 몰아 정거장에까지 나왔다. 그이도 72세다. “내가 다시 젊어져서 또다시 평생 사업을 고를 수 있다면, 확실히 나는 또 한국으로 나갈 거야!”하고 말한다. 그것이 그의 진심이란 것은 그가 벌써 내 듣기에도 네 번이나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을 것이다.1)
뉴욕에 있는 형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의 언더우드잉크타자기 회사가 세계 제일의 회사로 발돋움할 때, 형이 미국으로 와서 사업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새로 내한한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 의사 등을 데리고 함경도 탐사 여행을 하던 어느 날 한 시골 들판에서 그 편지를 보여준 뒤 그리어슨 의사가 보는 앞에서 편지를 찢어버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분칠한 별장에서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살면서 방방곡곡에서 찬송하는 소리를 듣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멋진 삶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떠밀려 산 자
그에게 선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고후 5:14)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언더우드가 가르친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그는 1887년 10월부터 지방으로 전도 여행을 가면서, “만일 그리스도만 전하고 그의 사랑의 메시지를 들려준다면, 나머지는 주님과 살리시는 성령의 능력에 맡겨야 한다”라는 믿음으로 복음의 씨를 뿌렸다. 1888년 봄, 명동 천주교 성당 건립 문제로 한국 정부가 모든 기독교 선교 사역을 중지하라는 칙령을 내리고 미국 공사가 지방에 나가 있는 언더우드를 소환했을 때, 언더우드는 “우리는 사람들을 향한 불멸의 사랑의 메시지가 있으므로, 입을 막고 있을 수는 없으며 그 메시지를 전해 주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반대는 그곳에서 멈추어 버렸다. 언더우드는 사랑의 메시지를 가진 불덩어리였다.
전진하는 자
언더우드는 “가라!”고 명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마 28:19-20)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확신했다. 따라서 그의 표어는 “전진! 앞으로!”였다. 그는 본국 교회에 추가 선교사를 끊임없이 요청하면서 질문했다. “우리가 중단해야 합니까, 아니면 전진해야 합니까?”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언더우드의 확신은 1890년 네비우스 목사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더욱 강화되었다. 중국에서 40년간 활동하고 은퇴를 앞둔 네비우스는 선교 방법의 차이로 갈등하던 서울의 젊은 선교사들에게 ‘네비우스 방법’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된다”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 이후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전망을 묻는 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만큼 밝다. 하나님은 실패를 모르신다. 그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면 성공은 반드시 그리고 확실히 따라올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선교에 위기가 올 때마다 외쳤다. “우리는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일 그 명령이 주님에게서 왔다면 길이 열릴 것이다. 따라서 전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종말을 앞당기는 선도자
언더우드는 소망의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면 종말이 올 것이라고(마태 23:14) 믿었다. 그는 선교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앞당기는 선도자’라는 종말론적인 선교 이해를 가졌다. 그는 “이 세대에 전 세계를 복음화하자”라는 모토로 활동한 학생자원선교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전천년설적인 소망은 그리스도 없이 죽어 가는 자들의 절망과 결합되면서 강한 선교열로 불타올랐다. 언더우드는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또한 그가 한국인들을 처음 가르칠 때부터 이 소망을 그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일제 치하의 고난 하에서 하나같이 그날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인내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한국 사역 초기부터 한국 신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도록 기도했다. 성령 세례가 종말론적인 기대와 인내를 유지해 주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교 문화에서 머리로 교리만 믿는 신자가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으로 믿는 신자들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교사는 서서 일하는 데는 좀 더 적은 시간을 들이고 무릎을 꿇고 사역하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 교리와 정통 실천을 통합한 자
언더우드는 원칙이 걸린 문제에서는 필요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영국 불도그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교회에서 어떤 의견에 대해 홀로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는 “불가능을 일소에 부치고 무엇이든 반드시 될 수 있다고 말하라”라는 표어를 좋아했다. 그를 만나는 자는 마치 타오르는 횃불을 보는 듯했고, 그래서 모두 그를 지치지도 않고 놀라운 인내력을 가진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never-give-in-no-matter-what-happens) 성품을 지녔다. 1887년 1월 황해도 소래에서 3명의 신자들이 서울의 언더우드를 찾아와서 예수를 고백하는 것으로 인해 왕이 목을 쳐도 좋다는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겠다고 요청했다. 알렌 의사는 정부 관리로서 반대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선교 역사를 볼 때 정부가 선교를 금지하더라도 길이 열리면 불법이라도 우선 은밀히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중국에서 모리슨은 위험을 무릅쓰고 1814년 첫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1858년에 가서야 선교의 자유가 조약 문구에 삽입되었다. 일본도 선교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 후에 선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한국도 동일한 과정을 밟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전형적인 미국의 행동주의 선교사 언더우드의 적극 전도론이 알렌 의사의 신중론을 이기면서 한국의 초기 선교는 공격적인 전도 정책으로 나아갔고, 정부가 이를 묵인하면서 한국 교회는 급성장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인 중에 장로교인이요 정통파 중에 정통파였지만, 믿음에서의 정통 교리와 생활에서의 정통 실천을 통합한 자였다. 그는 복음 전도와 개인 영혼 구원의 우선권을 믿었지만, 교육과 의료 사업의 자체 가치를 믿었고, 기독교 문명과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를 통한 한국 사회 전체의 기독교화, 곧 기독교를 통한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믿었다. 그래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기독교대학을 설립하려고 했고, 1896년부터 독립협회의 시민운동, 교육 운동, 정치 운동을 지지했다. 평양의 선교사들이 전도와 영성 중심의 ‘교회’ 선교 모델을 지지할 때, 언더우드는 한국 사회 전체를 위해서 교육과 의료와 전도가 함께 가는 ‘하나님의 나라’ 선교 모델을 지지했다. 그의 마지막 사업이었던 기독교 연합 대학인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려는 시도였다.
언더우드는 32년간의 선교사 생활 가운데 끊임없는 질병은 물론 오해와 시기와 비난을 견뎌야 했고, 그래서 선교 본부에 여러 번 사직서를 냈으며, 티베트로 옮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역경을 그는 ‘불 동가리’ 선교 사명과 사랑으로 극복했다.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그는 ‘넓은 날개’를 타고 높이 올라가 곧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며 한국 교회와 한국의 미래를 정확히 바라보면서 비전을 제시하고 시련과 난관을 극복할 횃불을 전해 주었다. 사업가로서의 경영 마인드, 목회자로서의 영혼 구원의 열정, 교육자로서의 성실성, 학자의 정직성과 역사의식, 성경 번역자로서의 감수성과 치밀함, 이 모든 것을 갖춘 지도자였던 언더우드! 그와 같은 지도자가 한국 교회에 나타나기를 대망해 본다.
1) 김재준, “가나다 잡기 은퇴 선교사[그리어슨]의 면모 한두 가지”, 「기독교사상」, 1959. 7.,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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