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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는 처음부터 ‘나 말고는 신이 없다’고 선포하지 않았다. ‘나의 앞에서 다른 신이 너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출애굽기 20:3은 다른 신을 인지하는 것 위에 표현되었다. ‘없다’가 아니라 ‘두지 말라’다. 학자들은 초기 이스라엘의 신앙을 그래서 일신숭배(monolatry)라고 부른다. 다른 신이 없다는 선언이라기보다는, 다른 신 말고 오직 야훼만 섬기라는 요청이다. 유일신론이라기보단 ‘유일사랑론’이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히브리 성서의 가장 근본적인 유대-기독교 신앙 고백은 ‘쉐마’라 불리는 신명기 6:4에 나와 있다. “들으십시오, 그대 이스라엘! 야훼 우리 하나님은 야훼 한 분이십니다.” 이 고백은 으레 ‘우주에 신은 단 하나 야훼뿐’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하나님은 한 분 야훼고,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를 믿는 것을 유일신 신앙이라 여긴다. 그런데 과연 이 쉐마를 처음 듣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렇게 이해했을까?
고대 서아시아의 종교적 지형을 보면, 이스라엘은 다신교 세계의 한복판에 있었다. 라스 샴라에서 1928년에 발견된 고대 도시 우가릿의 문헌은 엘, 바알, 아세라 등 수많은 신들의 판테온을 증거하는데, 가나안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가나안에 퍼져있던 이러한 세계관 안에서 살면서 결국 신명기 6:4의 고백을 지키지 못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에서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가나안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발달하지 않았다. 주변 문화와의 공유와 점진적 차별화를 통해 형성되었다.1) 성서의 전승을 따르자면, 야훼는 출애굽을 인도하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만나 광야에서 동고동락한 경험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이주했다. 그곳 최고신 엘의 지위를 통합하고, 구름을 타고 비를 내리는 바알의 속성도 흡수하면서 소위 종교 전쟁을 이어 나갔다. 시편 48:2이 시온을 ‘사판(북쪽) 끝’이라 부르는 것은, 바알의 거처 사판을 야훼의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전용한 흔적이다. 이렇게 야훼는 가나안의 종교를 점령해 나갔다. 물론 그의 백성은 이에 아랑곳없이 틈만 나면 이방 신을 섬겼지만 말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야훼는 처음부터 ‘나 말고는 신이 없다’고 선포하지 않았다. ‘나의 앞에서 다른 신이 너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출애굽기 20:3은 다른 신을 인지하는 것 위에 표현되었다. ‘없다’가 아니라 ‘두지 말라’다. 학자들은 초기 이스라엘의 신앙을 그래서 일신숭배(monolatry)라고 부른다. 다른 신이 없다는 선언이라기보다는, 다른 신 말고 오직 야훼만 섬기라는 요청이다. 유일신론이라기보단 ‘유일사랑론’이다.

지금의 유대-기독교인처럼 철저한 유일신 사상을 탑재하고 구약을 읽어오던 독자에게는 다소 불편한 이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 의의가 주는 감화는 크다. 존재론적 유일신론, 즉 우주에 단 한 분 야훼만 계신다는 신념은 지적 동의와 수긍으로만 그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관계적 유일신론은 다르다. 여러 선택지가 있는데도 오직 하나만 선택하겠다는 것은 지적 인지가 아니라 사랑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어진 유일신 사상은 인지가 아니라 도전이었다. 다른 신이 아예 없는 세상에서 야훼를 섬기는 것은 쉽다. 하지만 다른 매혹적인 신들이 유혹하는 세상에서 야훼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명기의 언어가 이를 뒷받침한다. 신명기의 ‘사랑하다’(아하브)는 고대 서아시아 종주-봉신 조약에서 사용하던 충성 언어와 겹친다. 그런데 신명기는 이 정치적 충성 언어를 남녀 간의 사랑 어휘와 의도적으로 뒤섞는다.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법적 계약이면서 동시에 연인의 관계로 그려낸 것이다. 호세아는(미안하지만, 자신의 복잡한 가정사 때문인지) 우상숭배를 ‘간음’이라며 매우 감정적으로 비유했다. 바알에 마음을 주지 말라는 야훼의 목소리는 계약 조항의 낭독이 아니라 질투하는 사랑의 호소가 된 것이다.
이 관계의 언어를 가장 농밀하게 담고 있는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다. 흔히 인자나 자비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의 뿌리는 관계 안에서의 ‘신실함’에 있다. 야훼가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헤세드는 의무를 이행하는 차가운 계약 이행이 아니다. 상대가 계약을 어겼는데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조건을 초과하는 신실함이다. 계약서에 명시되지도 않은 사랑이었다.
호세아 11:8에서 야훼가 “나 자신을 거슬러 나의 마음이 달라졌구나. 위로해 주고 싶은 나의 감정이 북받쳐 일어나는구나”라고 토로하시는 장면은 사랑하는 자의 내면 갈등이 드러난다. 배신한 이스라엘을(또다시 미안하지만, 안쓰러운 호세아의 표현으로는 ‘바람피운 이스라엘을’) 심판해야 하지만 차마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야훼의 고뇌가 보인다. 이러한 신적 긍휼의 본질은 자비를 뜻하는 히브리어 ‘라하밈’이 어머니의 태(자궁)를 의미하는 ‘레헴’과 어원을 공유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결국 야훼의 정의는 차가운 법 집행에 머물지 않고, 생명을 잉태하고 보듬는 모성적 자비와 긴밀히 맞물려 완성된다.
존재론적 유일신론에서 신의 정의와 자비는 논리적으로 충돌한다. 완벽한 신, 즉 윤리적 유일신이 어떻게 복수의 감정을 가지며, 전지전능한 분이 왜 마음을 돌이키는가? 그러나 관계적 유일신론에서는 이 긴장이 자연스럽다. 사랑하는 자는 분노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한다. 벌을 내리면서도 마음이 찢기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신의(헤세드)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적 신앙이 보편적 유일신론으로 도약한 계기는 포로기 때 온다. 포로기에 의한 터전 상실은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었다. 성전도 잃고 땅도 잃은 이스라엘에게 야훼는 더 이상 가나안 한 귀퉁이의 지역 신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야훼가 가나안 지역의 신이었다면, 가나안을 잃은 순간 야훼도 사라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야훼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 속에서 야훼의 주권을 온 우주로 확장했다. 제2 이사야(사 43-45장)는 이 위기의 한복판에서 야훼를 온 우주의 유일한 신으로 선포한다. 이것은 신학자의 서재에서 나온 형이상학적 논증이 아니다. 포로로 끌려간 백성을 향한 구원의 약속 안에서 터져 나온 고백이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선언은 ‘이 절망의 끝에서도 너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관계의 재확인이었다. 존재론적 유일신론조차 관계적 맥락 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유일신론은 이론이 아니라 정념이다. ‘신은 하나’라는 명제는 증명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주장이고, 그래서 믿음이 지적 확신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러나 관계적 유일신론은 논쟁이 아니라 결단의 영역이다. 여러 대안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겠다는 신앙은, 증거를 따져서 도달하는 결론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감행하는 모험이다. 쉐마가 ‘들으라’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지하라’가 아니라 ‘대답하라’는 것이다. 관계는 반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마주하는 유혹이 바알은 아니지만 본질은 같다. 비를 주관하던 바알은, 농경을 통해 생존해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곧 오늘날의 돈과 번영이었다. 물질적 성공을 위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버리고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곧 바알을 섬기는 것이다. 이에 관계적 유일신론은 “네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
결국 구약의 유일신 사상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신이 몇이냐’가 아니라, ‘너는 누구를 사랑하느냐’다. 야훼는 자신이 유일하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입증하시기보다는, 나만 사랑해 달라고 호소하셨다. 이 호소를 논증으로 읽으면 신학으로 그치지만, 사랑으로 들으면 영혼을 뜨겁게 달구는 신앙이 된다.
1) Mark S. Smith. The Origins of Biblical Monotheism: Israel’s Polytheistic Background and the Ugaritic Text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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