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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어린이날을 맞아, 우리나라 아이들이 가장 목말라하고 있지만 정작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 감정의 타당화가 아닐까 싶다. 정신과 전문의인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우리의 부모님도 그러했듯이, 완벽한 부모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오늘 아이가 문을 나서며 “학교 가기 싫어”라고 말할 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며 “뭐가 그렇게 걱정돼?”라고 한 번만 물어봐 줄 수 있다면 충분하다. (본문 중)

 

김지은1)

 

지난겨울 나의 호주 단기 연수 기간에 만 7세이던 우리 큰아들은 호주의 공립학교에 들어갔다. 개학 날, 그날 처음 그 학교로 등교한 학생들을 옹기종기 모아 놓고, 교장 선생님이 책을 읽어 주셨다. 학교 가는 것이 두려운 한 아이에 대한 책이었는데, 학교에서 겪을 수 있는 여러 불안한 상황과 이에 대한 아이의 걱정이 나와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비밀 하나를 말해 줄 테니 다 가까이 모여 보라’ 하시고는, 사실 오늘 선생님 두 분도 처음 우리 학교에 출근하는 거라고 속삭이셨다. 그 후 그 선생님들에게 ‘오늘 어떤 마음이 드시냐’라고 물어보셨는데, 한 선생님은 “사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조금 떨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래도 나는 마음에서 용기를 끌어 올리고 있다”라고 말하며 양 주먹을 쥐어 보여 주었다. 다른 한 선생님은, “사실 모두 낯선 사람들만 있어서 조금 부끄럽다. 하지만 또 어떤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는 마음도 생긴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들을 응원하며 박수를 쳐 주었다. 교장 선생님은 ‘오늘, 학교 첫날 어떤 마음을 느끼든, 그 마음은 충분히 느낄 만한 마음이니 괜찮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질 것이고, 하루하루가 그냥 지나가는 것 같아도 학교에 날마다 다니다 보면 산을 옮기는 일과 같은 큰 일이 너희에게 생길 거라고 하시며 기대도 심어 주셨다. 구석 벤치에서는 교감 선생님이 울고 있는 한 여학생과 같이 앉아서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다.

 

이 장면을 보면서 문득 나의 초등학교 시절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엄마 손을 잡고 징징대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 대해 불편하다고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났는데, 그건 “너는 너무 예민해”라는 말이었다.

 

이 두 장면은 감정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태도를 보여 준다. 호주의 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보여 준 것은 ‘감정의 타당화’(Emotional Validation)이고, 우리 엄마가 나에게 보여 준 반응은 ‘감정의 무효화’(Emotional Invalidation)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돌아보면 나는 조금 예민한 아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80%의 사람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는 상황이라고 해도 내가 불편을 느꼈다면, 그 순간의 감정은 그냥 그대로 내 뇌와 마음에서 실제 일어난 감각이다. 또 하나, 내가 그때 느꼈던 불편감이 다른 사람의 의도나 행동을 오해해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꼭 상황에 적절하고 올바른 감정 반응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감정의 타당화는 이 감정이 꼭 옳고 바른 것이라고 동의해 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과정이다. 엄마는 아빠를 닮은 나와는 좀 다른 점이 많았는데, 그래서 엄마는 같은 상황에서 전혀 나와 비슷하게 느끼지 않았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엄마는 나에게 동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타당화는 해줄 수 있다.

 

이런 기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되물을 수 있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기억을 ‘마이크로트라우마’(Micro-trauma)라고 부른다. 학대나 방임 같은 트라우마는 아니지만(도리어 우리 엄마는 굉장히 헌신적인 엄마였다), 그냥 우리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 큰아이는 이 교장 선생님 덕분인지 첫날을 무사히 넘겼고, 학교에 가기 싫다는 말 한번 없이 새로운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다만, 벤치에 앉아 울며 교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이는 그 후로도 며칠을 울면서 등교했다. 만약 내가 이 아이의 선생님이거나 부모였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생각해 보니, 일주일 정도는 꾹 참다가 결국, “자, 봐라. 다른 아이들은 다 학교에 잘 가잖아. 뚝 그쳐!”라고 말했을 것 같았다. 나도 엄마가 내 감정을 대했던 방식 그대로 자동적으로 아이의 감정을 대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이크로트라우마의 세대 간 대물림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장 선생님은 교사로서도 오랜 경험이 있었고 그에 더해 심리학 석사 학위도 있으셨다. 게다가 호주는 학생의 정신 건강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나라이다. 많은 예산을 들여 전담 국가 기구를 두고 있고, “Be You”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모든 학교가 정신 건강 관리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도록 돕고 있다. 『아동‧청소년을 위한 수용전념치료』라는 호주 임상심리학자의 책을 보면,2)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저소득층 초등학생 아이를 학교 심리학자가 매주 학교에서 만나 장기 치료를 하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Wee 센터 같은 지원 체계가 있기는 하나, 학교 현장에 전문가가 녹아들어 개입하는 호주 모델에 비하면 아쉬움이 크다. 아이들의 정신 건강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서, 만 16세 미만 학생들에게 소셜 미디어를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처음 통과시킨 것도 호주다.

 

이런 정책과 자원을 가진 나라에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심리학 석사 교장 선생님도 아닌데 어떻게 개학식 날 느껴지는 아이들의 마음을 세련되게 어루만질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오은영 박사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좌절감을 느끼는 부모들도 많다. 심지어는 “아니 내가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도 아닌데, 어떻게 아이들 마음을 다 알아줘요?”라고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박사님처럼 ‘다 알아주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부족한 사람이고, 아무리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키워도 아이는 커서 마이크로트라우마를 떠올리며 서운해 할 것이다. (정신과 의사까지 되어서 많은 사람이 보는 글에 엄마를 비난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아이의 모든 감정에 그냥 자동적으로 내가 받았던 반응을 그대로 돌려주지만 않아도 된다. 우리 아이들은 마이크로트라우마뿐 아니라 ‘젬 메모리’(Gem Memory)도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3) 그 상처를 상쇄하고도 남을, 아빠와 엄마는 우리를 사랑해서 노력했다는 보석 같이 빛나는 그 기억들 말이다.

 

변증법적 심리 치료를 창시한 마샤 리네한은 감정 타당화에 대해서 6가지 과정을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경청하기이다. 진짜 아이의 감정에 대해, 아이가 하는 이야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조언할 내용을 생각하거나 판단하거나 하지 않고 듣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주어진 정보를 더 이해하기 위해서 질문도 던지고 그대로 마치 거울로 비춰 주듯이 감정을 보여 준다. 어떤 연예인 부부가 자꾸 싸우게 되어 정신과 의사에게 해법을 요청했더니, 상대의 마지막 말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진짜로 덜 싸우게 되었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콩나물 여기 많은데 또 샀어?” 그러면, “그러게, 또 샀네.” “화장실 바닥이 너무 지저분해” 그러면, “화장실이 지저분하네.”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기 시작했더니 싸우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저 판단 없이 사실을 되돌려 주기만 했는데, 싸움이 없어졌다. 만약 아이가 “오늘 친구와 싸워서 슬펐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리고 엄마, 아빠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다면, “어떻게 싸웠어?” 물어보고 “이러저러하게 싸워서 OO이가 슬펐구나”라고 한 번 거울처럼, 아무런 판단 없이 되돌려 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아이는 자기의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공명해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훨씬 덜 외로움을 느낀다.

 

세 번째 단계로는 아이가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까지 알아주면 더 좋다. 있었던 일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가 이를 꽉 물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면, “OO이는 슬프기도 했지만 화가 나기도 했나보다, 맞니?”라고 물어보는 과정이다. 이 부분에서는 틀릴 수도 있으므로 짐작이 맞는지 확인을 한 번 받는 것이 좋다. 내가 관찰한 바를 강요하지는 않아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는 자기가 미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까지 아빠 엄마가 알아주는 것을 느끼고 안심하게 된다.

 

그 이후 과정으로는, 특히 싸움의 어떤 부분에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이해해 보려 하고, 맥락상 이 아이 개인에게는 이런 감정이 생길 수도 있었겠다고 인정까지 해줄 수 있으면 좋다. 설사 아이가 좀 예민하다고 생각된다 해도, 이 아이의 기질적 특성이나 과거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아이가 느낀 감정 그 자체, 그 신경 활동 자체는 선악이 없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너는 너무 예민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그게 나쁜 것인 줄만 알았는데, 정신과 의사가 되고 보니 이만한 자원이 없었다. 그 예민함 덕분에 환자와 이야기할 때 스쳐 지나가는 눈동자의 흔들림까지도 ‘혹시 불안한 걸까?’ 한 번 더 생각할 기회가 생긴다.

 

감정 타당화의 마지막 단계로서, 아이의 감정을 들으며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면, 부모로서 공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해도 좋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나약한 아이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고 있다고 느끼고, 진정한 연결성을 느낀다. 범위를 잘 정하기는 해야 하는데, 등교하기 싫은 마음을 듣는다면 부모도 출근할 때마다 조금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공유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상사와의 갈등이나 이로 인한 해고 가능성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

 

감정의 타당화를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는 어떻게 될까? 감정은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깨닫기에,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와도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정서 조절 능력을 갖추게 된다. 반면 감정의 무효화를 반복적으로 겪은 아이는 자신의 느낌을 의심한다. ‘내가 느끼는 건 틀렸어’, ‘나는 이상해’라는 자기 불신은,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자신의 욕구를 누르며 살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부모로서 아이를 이렇게 대할 때 생기는 두려움이 있다. “아이의 모든 감정을 다 받아주면 버릇이 나빠지고 행동이 통제 불능이 되지 않을까?”하는 현실적인 걱정이다. 하지만 감정 타당화 과정 자체는 오로지 감정에 대한 것이다. 그 감정을 폭력적이거나 회피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행동, 예를 들면 무단결석을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한계를 설정해야 하며, 이 행동으로 나타난 부분까지 받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가오는 어린이날을 맞아, 우리나라 아이들이 가장 목말라하고 있지만 정작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최신형 장난감도, 테마파크 나들이도 아닌, 바로 ‘내 마음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즉 감정의 타당화가 아닐까 싶다. 정신과 전문의인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우리의 부모님도 그러했듯이, 완벽한 부모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오늘 아이가 문을 나서며 “학교 가기 싫어”라고 말할 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며 “뭐가 그렇게 걱정돼?”라고 한 번만 물어봐 줄 수 있다면 충분하다. 마이크로트라우마의 조각들이 우리 삶에 박혀 있다고 해도, 그 사이사이를 메우는 젬 메모리의 빛이 있다면, 아이는 결국 자기만의 산을 옮길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 보석 같은 기억 중의 하나는, “네 마음이 그렇구나, 그럴 수 있어”라는 등굣길에서 아빠가 아이 손을 잡고 건넨 아주 작은 타당화 한 마디가 될 수도 있다.

 


1) 이화여대 뇌인지과학부 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유튜브 채널 <김지은의 뇌와 마음> 운영.

2) Tamar D. Black, 『아동청소년을 위한 수용전념치료』 (하나의학사).

3) 초기 긍정적 정서 기억(Gathered Early Memories G.E.M.)이라는 긍정심리학의 기법에서 따온 표현으로 자신의 긍정적 자원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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