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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의 역사는 단일한 종말론 운동의 역사라기보다, 성서적 공화국에 대한 상상, 회복주의, 인도주의, 냉전 이전의 문명 담론이 서로 다른 시기마다 접합되며 친시온 정치 문화를 형성해 간 역사라 해야 한다. 이 점을 놓치면, 1948년의 사건을 갑작스러운 동정의 산물로 오해하기 쉽다. (본문 중)

 

권지성(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구약학 교수)

 

미국 시온주의 발생과 밸푸어 선언: 독립 혁명(1776)부터 1948년까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의 출발점이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된 성서적 상상력과 대서양 회복주의 네트워크가 국제 정치로 전환된 결과였다. 미국에서는 독립 혁명기부터 성서가 단순한 신앙의 텍스트를 넘어 집단적 자기 이해의 틀로 기능했으며, 미국은 스스로를 광야를 통과하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동시에 옛 이스라엘의 회복을 매개하는 섭리적 도구로 상상했다. 이처럼 “선택받은 미국”과 “유대인의 회복”이 하나의 서사 안에 결합하면서, 미국적 예외주의와 회복주의 담론은 상호 강화의 구조를 형성했다(S. Goldman, God’s Country, 43–44). 19세기에 들어와 이 상상력은 부흥 운동, 성서 문자주의, 예언 해석을 통해 구체적 프로그램으로 발전하였고, 유대인 귀환은 단순한 종교적 기대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현될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영국이 제국 외교와 결합한 국가적 회복주의를 발전시킨 것과 달리, 미국은 설교, 출판, 청원, 대중 운동을 통해 성서적 상상력을 사회적 여론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복음주의는 역사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습관을 강화했으며, 19세기 후반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확산과 함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은 종말론적 시간의 중심에 재배치되었다(Weber, On the Road to Armageddon, 9–16).

 

가장 대표적으로 존 넬슨 다비(1800-1882)는 세대주의 전천년설1)의 창시자로 여겨지는데, 기독교 시온주의는 그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종종 간주된다. 다비는 유대인들을 위한 천년왕국과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천국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방식으로 성서를 읽었고, 우월한 선민인 유대인은 이 지상에서 결국 팔레스타인을 회복할 것이라 보았다(루이스, 『시온주의』, 251). 1870년대 이후 그의 세대주의 사상은 유대인 복음화를 진행하던 복음주의 보수 개신교(특히 개혁주의 진영) 안에 자리 잡게 되는데,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들은 루벤 토레이, 제임스 브룩스, 드와이트 무디, 스코필드 등이 있다(루이스, 『시온주의』, 257-58, 260-63). 다비의 사상은 문화적 단절을 주장하고 정치 활동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여러 환경 속에서 미국인들에게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긴 흐름이 실제 기독교 시온주의 정치 행동으로 응결된 첫 순간은 윌리엄 블랙스톤에 의해서였다. 블랙스톤은 아마 미국 최초의 전형적인 기독교 시온주의자로 불릴 만한 인물로, 미국 복음주의 종말론, 대중 출판, 정치 청원, 유대 회복론을 하나로 엮어 냈다. 그는 1878년 『예수가 온다』(Jesus Is Coming)라는 책을 통해 세대주의 예언 해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고, 1888–1889년 팔레스타인 방문 이후 유대 국가 수립을 당시 미국의 정치적 과제로 끌어왔다. 그 결과물이 1891년의 블랙스톤 청원서(Blackstone Memorial)였다. 그는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청원은 미국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에게 제출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공적 영역에서 유대인 귀환을 외교 정책 언어로 말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입증한 사건이었다.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는 유대 정치 시온주의를 단순히 뒤따른 것이 아니라, 그 정치적 가능성을 미리 시험한 예비 문화였다(S. Goldman, God’s Country, 66; Weber, On the Road to Armageddon, 103–104; Sizer, Christian Zionism, 91).

 

물론, 블랙스톤 청원서에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는 순수한 인도주의자도 유대 민족주의자도 아니었고, 그의 관심은 시온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끝까지 성서적 예언과 선교적 주제에만 뿌리박혀 있었다. 사실 블랙스톤은 헤르츨의 세속적 시온주의에 열광하면서도 동시에 실망했고, “참된 시온주의”는 정교한 유대적 경건과 메시아 기대에 더 가까워야 한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그는 세속적 유대 시온주의 지도자들과 협력했다. 이 역설이 중요하다. 초기 기독교 시온주의와 유대 시온주의는 같은 목적을 같은 이유로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전자는 예언의 성취를 보았고, 후자는 정치적 피난처와 민족적 자기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둘 다 팔레스타인이라는 동일한 공간에 집중했고, 그래서 상호 차이를 유보한 채 협력할 수 있었다(Sh. Goldman, Zeal for Zion, 25–26). 물론, 블랙스톤과는 달리 아노 개블라인 같은 세대주의자는 1897년 헤르츨의 세속적 시온주의를 비판하면서 인위적 귀환을 불신앙이자 신적 심판을 초래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개블라인은 다비처럼 휴거 이후에 환난이 있을 것으로 보았으며 기독교 시온주의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유럽에서도 빈에서 활동한 유대인 언론인이자 정치적 시온주의의 조직자 테오도어 헤르츨과 윌리엄 헤클러의 실용적 협력 속에서 기독교 시온주의와 유대 시온주의의 초기 결합이 형성되었다. 사실 헤르츨은 1903년 우간다 이주 방안을 시온주의자들에게 제안했으나 반대에 부딪혔고 1904년에 사망한다. 제2차 알리야(1904)2) 이후 1914년까지 약 3만 5천 명의 동유럽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으나, 절대다수의 유대계 영국인들은 시온주의자들의 독립된 유대 국가 건립에 결코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급격히 변화한다.

 

1917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은 바로 이 시온주의의 정치적 연결성이 제국 문서의 언어로 결실을 본 순간이었다. 이 선언은 영국 회복주의와 제국 전략, 유대 시온주의 로비, 그리고 미국의 우호적 기독교 여론이 만난 결과였다. 그것은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스코틀랜드 칼뱅주의자)가 영국 시온주의자인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서한 형식으로 공표되었고, 바로 그 형식 자체가 시온주의를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제국의 공식 후원 대상으로 만드는 효과를 냈다. 이 서신에서 영국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국가를 세우는 데 지원할 책임이 있다고 밝힌다. 밸푸어와 로이드 조지(영국 총리, 칼뱅주의자)는 모두 회복주의 개신교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특히 바이츠만은 밸푸어에게 우간다 대안이 아니라 팔레스타인만이 유대 시온주의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교묘하게 설득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단순한 외교 전략 문서가 아니라, 성서적 정당화와 제국적 실리가 결합한 문서였다.

 

동시에 그것은 모호했다. “민족적 고향”은 국가를 뜻하는가, 그 경계는 어디인가, 예루살렘의 지위는 무엇인가, 팔레스타인 다수 주민의 정치적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선언문은 이런 질문들에 답하지 않았다. 결국, 이 문건은 이후 한 세기의 분쟁을 예비했다. 더구나 선언문은 “비유대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만 언급할 뿐, 그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부재는 우연한 결함이 아니다. 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다수를 “주민”으로만 기록하고 그들의 집단적 정치권은 지워버렸다(Sizer, Christian Zionism, 78–81). 이미 1806년 대(大)산헤드린 회합에선 유대인이라는 단일 민족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나, 시온주의 로비 집단들은 불변하는 가상의 유대인 공동체라는 인종/종족 민족주의를 발명한다. 영국 개신교 복음주의는 이러한 단일 유대 종족이라는 믿음을 퍼뜨렸고, 이는 밸푸어 선언에 영향을 준 영국 정치인들(내각 구성원 다수가 복음주의 신앙 배경을 지닌)에게 분명히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여기서 미국이라는 요인을 추가해야 한다. 1916년 블랙스톤의 두 번째 청원은 더 이상 개인적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루이스 브랜다이스, 네이선 스트라우스, 스티븐 와이즈 등 미국 시온주의 지도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조직되었고, 주요 개신교 지도자들의 지지를 결집했다. 블랙스톤 청원의 공개 시점조차 유대 시온주의 지도부의 판단에 맡길 만큼 양 진영은 긴밀히 조율된 상태였다. 우드로 윌슨은 이를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데는 신중했지만, 청원을 진지하게 검토하며 공감적 태도를 보였고, 공개적으로는 거리를 유지한 채 비공식적으로 친시온적 입장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미국은 밸푸어 선언의 단순한 사후 승인자가 아니라, 그 선언이 가능하게 하는 서방의 환경 형성에 기여한 행위자였다. 특히 미국 개신교 여론과 엘리트 네트워크는 영국 정책을 뒷받침하는 정당화 자원으로 작동하였다(Ariel, An Unusual Relationship, 93–95).

 

물론 1920년대 이후 이 흐름이 곧장 복음주의 승리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 내부에서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사이의 논쟁이 격화되면서 보수 복음주의가 일정 부분 주변화되었고, 1930–1940년대에는 자유주의 개신교가 더 적극적으로 시온주의를 옹호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서 주목할 인물이 라인홀드 니버이다. 니버는 1942년 기독교 팔레스타인 평의회 창설에 관여했고, 홀로코스트와 미국의 제한적 난민 정책을 배경으로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국가적 터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Sizer, Christian Zionism, 106; S. Goldman, God’s Country, 134). 그의 논리는 세대주의적 예언 해석을 따르는 것이 아닌, 난민의 현실과 국제 정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결국 친시온이었다. 1946년 그는 영미조사위원회에서 “아랍인에게는 광대한 배후지가 있지만 유대인에게는 갈 곳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팔레스타인 일부에 대한 아랍의 주권은 전 세계 유대인의 고향을 만들기 위해 희생될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이것은 1940년대 미국 기독교 친시온 담론이 종말론적 복음주의뿐 아니라 자유주의 개신교의 도덕 언어를 통해서도 강력하게 확산했음을 보여 준다.

 

즉,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는 하나의 신학으로 환원해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독립 혁명기와 초기 공화국에서는 ‘성서적 미국’이라는 자기 이해가, 19세기 말에는 블랙스톤식 회복주의와 청원 정치가, 1910년대에는 유대 시온주의 지도자와의 협력과 밸푸어의 로비가, 1940년대에는 니버식 자유주의 도덕 정치가 서로 다른 논리로 친시온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의 역사는 단일한 종말론 운동의 역사라기보다, 성서적 공화국에 대한 상상, 회복주의, 인도주의, 냉전 이전의 문명 담론이 서로 다른 시기마다 접합되며 친시온 정치 문화를 형성해 간 역사라 해야 한다. 이 점을 놓치면, 1948년의 사건을 갑작스러운 동정의 산물로 오해하기 쉽다.

 

1947년, 영국은 위임 통치 종료를 선언하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다. 유엔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는 분할안을 마련했고, 같은 해 유엔 총회는 이를 결의안 181호로 승인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 분할안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바로 이 누적된 흐름의 산물이었다. 그 시점에 미국 안에는 여전히 아랍 편에 가까운 선교사 집단과 반시온적 목소리도 존재했다. 그러나 전체 흐름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블랙스톤 이래 기독교가 만든 상상력의 토대, 브랜다이스와 와이즈 같은 지도자들과의 협력, 윌슨 시기 비공식 친시온 분위기, 홀로코스트 이후의 도덕적 충격, 니버와 자유주의 개신교의 공적 정당화가 서로 겹치면서, 유대 국가 수립은 미국 기독교 문화 안에서 낯선 발상이 아니라 오래 준비된 결론처럼 보이게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시작이 아니라 완성이었다. 미국 복음주의적, 개신교적, 성서적 상상력이 외교 경로, 일반 여론, 엘리트 네트워크, 국제 승인 절차를 거쳐 현실 정치에 영향을 준 첫 전면적 성취였다. 이 때문에 1948년 이후의 기독교 시온주의는 더 이상 주변 사상이 아니라 미국 공적 정치의 한 축으로 서게 된다.

 


1)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전에 일어난다고 보는 전천년설의 한 형태로, 역사를 신적 경륜의 여러 ‘세대’(dispensation)로 구분하고 유대인과 교회를 별개의 구원 계획 속에 위치시키며 체계화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재림 이전에 반드시 성취될 예언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시온주의의 핵심 신학 근거가 되었다(편집자).

2) 히브리어로 ‘올라감’을 뜻하며,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 물결을 차례로 구분하는 역사 용어. 제1차 알리야(1882–1903)가 박해를 피한 이주였다면, 제2차 알리야(1904–1914)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닌 동유럽 유대인들이 주도하여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의 제도적 토대를 형성한 물결이었다. 이후 5차 알리야(1929-1939)까지 이어졌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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