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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진리와 해석을 가르는 명확한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창세기 1장의 ‘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인간의 몸이 어떤 과정으로 지어졌는가, 원죄는 어떻게 후대에 영향을 미치는가 같은 물음도 그저 사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첨예한 논쟁을 하는 중에도, 우리가 정말로 한 마음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되물어야만 할 것이다. (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최근 한 교단이 유신 진화론을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시 기사를 통해 배경을 살펴보니 관련된 오래 묵은 주제가 이면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은 실제로 존재한 역사적 인물인가?” 단순해 보이는 이 물음에 답하려면 금방 네 가닥의 실로 복잡하게 엉킨 매듭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 네 개의 가닥은 또한 각각 단순하지 않은 질문들이다. 즉, ‘진화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창세기 1-3장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원죄 교리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그리고 ‘이 모두가 아담의 역사성 문제와 어떻게 관련되는가’하는 질문들이다. 이 글을 통해 지난 10여 년간 영어권 신학계가 이 매듭을 풀기 위해 시도해 온 논의를 따라가며, 평범한 신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지형도를 그려 보려 한다.

 

하나로 얽혀 있는 세 가지 질문

 

논쟁이 자꾸 헝클어지는 이유는, 사실 서로 다른 세 질문이 한 덩어리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 셋을 떼어 놓으면 거의 모든 입장이 제자리를 찾는다.

 

첫째는 아담의 역사성이다. 아담은 실존한 개인인가, 아니면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문학적·신학적 표상인가. 둘째는 원죄의 본질이다. 우리가 아담에게서 물려받는 것은 법적인 죄책인가, 죽음과 부패라는 연약함인가, 아니면 인류가 보편적으로 처한 죄의 상황인가. 셋째는 사도 바울의 아담-그리스도 모형론(로마서 5장, 고린도전서 15장)이 어떤 조건에서 성립하는가. 즉, 아담과 그리스도가 둘 다 역사적 개인일 때만 그 모형론이 성립하는가, 아니면 아담의 대표성만으로도 충분한가.

 

이 세 질문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동방 정교회는 아담의 역사성(첫째)은 긍정하면서도, 서방 교회의 강한 유전적 죄책 개념(둘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아담이 실존했는가”와 “원죄란 무엇인가”는 논리적으로 별개의 물음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논쟁이 날카로워지는 이유는 대개 아담의 역사성, 원죄의 의미, 아담-그리스도 모형론, 이 셋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아담이 없으면 원죄도 없고, 원죄가 없으면 그리스도의 복음도 없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원죄 이해는 진화론 이전부터 갈라져 있었다

 

흔히 “유신진화론이 전통적 원죄 교리를 무너뜨린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죄에 대한 이해는 진화론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갈라져 있었다.

 

서방 교회에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강한 원죄 교리를 정식화한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아담의 죄책과 부패가 출생 과정을 통해 전 인류에게 유전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동방 교회 교부들과 정교회 전통은 아담에게서 물려받는 것이 ‘법적 죄책’이 아니라 ‘죽을 운명과 연약함’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전통적 원죄 교리’라는 단일한 전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두 개의 오래된 큰 흐름이 있었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서방 교회 전통 아래 있는 개혁주의 정통파 안에서도 학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이해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찰스 하지나 루이스 벌코프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물학적 유전’ 이론보다, 아담을 인류의 언약적 대표로 보는 ‘연방주의’(federal headship)의 틀을 사용했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에 그의 죄가 법적으로 우리에게 돌려진다는 것이다. 한편 웨슬리안 전통은 원죄와 인간의 부패를 강하게 긍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은총이 (신자든 불신자든 보편적으로) 아담의 죄책을 상쇄한다는 ‘선행 은총’ 개념으로 그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렸다. 따라서 “보수 신학은 곧 아우구스티누스식 원죄론”을 따른다는 생각은 통념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역사적 아담은 꼭 필요한가

 

여기가 논쟁의 핵심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현대 보수 신학계 안에서도 이것은 합의된 사항이 아니라 첨예한 쟁점이다.

 

역사적 아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라고 보는 진영의 논거는 거의 한결같이 셋째 질문, 곧 바울의 모형론과 연결된다. 역사적 아담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가 아니라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의 아담-그리스도 모형론이 무너지니까”다.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 죄가 들어왔듯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을 통해 구원이 왔다’는 그 대칭이,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 아닌 상징이 되면 흔들린다는 것이다. C. 존 콜린스의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존재했는가』(2011)가 이 진영의 대표작으로, 진화 과학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역사적 아담은 필요하다고 논증한다.

 

반대편에는, 진화를 받아들이면서 아담의 역사성을 재해석하는 흐름이 있다. 피터 엔즈는 『아담의 진화』(2012)에서, 바울이 1세기 유대인으로서 당대의 아담 이해를 활용한 것이지 현대의 생물학적 이해를 전제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바울 신학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아담의 문자적 역사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극단 사이에 놓인 입장들도 있는데, 사실 더 흥미롭다. 데니스 알렉산더처럼 진화를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이 어느 시점에 진화한 인류 가운데 특정한 존재들을 언약적 관계로 부르셨고, 그 이후 타락이 일어났다’고 보는 절충적 입장이다. 또 가장 최근 논의의 판도를 바꾼 것으로 평가받는 조슈아 스와미다스의 『계보적 아담과 하와』(The Genealogical Adam and Eve, 2019)는, ‘유전학적’ 공통 조상과 ‘계보적’ 조상 개념을 구분하면 진화를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아담·하와가 실재했다고 말할 여지가 생긴다고 논증한다. (그의 논의에서 핵심은 ‘조상’이라는 말에 두 가지 서로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이다. ‘유전학적 조상’은 실제로 DNA를 물려준 사람이고, ‘계보적 조상’은 DNA 전달 여부와 무관하게 족보의 연결고리로 이어진 조상이다. 진화 과학이 부정하는 것은 인류가 단 두 사람에게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유전학적 단일 조상설인데, 스와미다스는 아담·하와를 모든 인류의 ‘계보적’ 조상으로 이해하면 이 과학적 결론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역사적 실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논증한다. 인구 집단을 수리적으로 모델링하면 수천 년이면 한 개인이 모든 후대 인류의 계보적 조상이 될 수 있으므로, 아담과 하와가 이미 존재하던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며 자손을 남겼고, 그 계보가 퍼져 결국 모든 인류에게 닿았다는 시나리오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진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역사적 아담의 존재를 옹호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짚어야 한다. “유신 진화론자는 모두 원죄를 부정한다”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위에서 보았듯 진화를 수용하는 진영 안에도 역사적 아담과 원죄를 적극적으로 지키려는 흐름(알렉산더, 스와미다스)과, 아담을 비역사적으로 보되 죄성의 실재는 유지하려는 흐름(엔즈, 라무뤼)이 함께 있다. 이들을 한 묶음으로 뭉뚱그리느냐, 이 스펙트럼을 구별해 내느냐가 논쟁의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창세기 1-3장과 ‘성경을 믿는다’는 것

 

마지막 가닥은 창세기 해석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 교회가 돌아볼 만한 역사적 선례들이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는 성경 무오를 가장 강력하게 옹호한 보수 신학의 본산이었다. 그런데 그 대표자들조차 진화와 창세기 해석에서 한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찰스 하지(1797-1878)는 당시의 다윈주의를 무신론으로 규정해 거부했는데, 그가 거부한 핵심 요소는 변화의 과정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를 제거한 점이었다. 반면 그의 후배 B. B. 워필드(1851-1921)는 성경 무오를 가장 치밀하게 변호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된 진화라면 신앙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창세기 1장의 ‘날’을 24시간으로 못 박지 않고 오랜 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두었으나, 아담의 역사성만은 끝까지 고수했다. 그가 택한 길은 ‘인간의 몸은 진화의 산물일 수 있으나, 영혼과 아담의 역사적 실재는 하나님의 직접 행위로 남는다’라는 구분이었다.

 

워필드의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하다. 성경 무오를 믿는 것과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본문이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창조주 하나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진리)를 주목해야지 본문이 어떤 과학적 메커니즘을 제시하는지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성경의 권위를 지키는 일과 특정한 과학적 입장을 고수하는 일은 별개라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이 모든 논의를 관통하는 질문 하나를 기억하면 복잡한 논의의 지형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신학자의 글을 읽든 이렇게 물어보면 된다. “이 사람은 역사적 아담이 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가? 원죄 때문인가, 로마서 5장의 아담-그리스도 모형론 때문인가, 아니면 창세기 본문 해석 때문인가?” 네 가닥의 실이 엉켜 있지만, 각 입장은 대개 한두 가닥에 결정적으로 많은 무게를 싣는다. 그 가닥을 찾아내 보면 복잡한 논쟁이 몇 개의 또렷한 선택지로 정리된다.

 

이러한 복잡한 논의를 둘러보고 나면 무엇이 교회가 확신 있게 공유해야 할 핵심 진리이며, 무엇이 의견의 차이를 수용해야 할 곁가지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통해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한 사람 예수님의 의로운 행동을 통해 구원이 왔다’라는 복음의 핵심 진리와, 그 진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한 듯하다. 물론 진리와 해석을 가르는 명확한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창세기 1장의 ‘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인간의 몸이 어떤 과정으로 지어졌는가, 원죄는 어떻게 후대에 영향을 미치는가 같은 물음도 그저 사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첨예한 논쟁을 하는 중에도, 우리가 정말로 한 마음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되물어야만 할 것이다.

 

관련 도서 소개

 

아담의 역사성 주제 전체를 한 권으로 개관하기 위해서는 데니스 라무뤼 외, 『아담의 역사성 논쟁』(Four Views on the Historical Adam, 새물결플러스, 2015)을 참조하라. 라무뤼, 월튼, 콜린스, 배릭 네 사람이 서로의 견해를 논박하고 재반론하는 내용으로 누가 어디서 왜 갈라지는지 한눈에 보여 준다.

 

관련된 원죄 교리 부분을 깊이 다룬 책은, 한스 마두에메, 마이클 리브스 외, 『아담, 타락, 원죄: 원죄에 대한 신학적·성경적·과학적 관점』(Adam, the Fall, and Original Sin, 새물결플러스, 2018)이다. 보수·복음주의 학자 다수가 원죄 교리를 신학, 성경, 과학의 세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변호한다.

 

진화를 수용하는 입장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피터 엔즈, 『아담의 진화: 성경은 인류 기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The Evolution of Adam, CLC, 2014)가 있다. 바울이 1세기 유대인의 아담 이해를 사용한 것이지 현대 생물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세밀한 성서학적 접근법으로 논증한다.

 

창세기 본문 자체를 고대 근동의 맥락에서 다시 읽는 것에 관해서는, 존 H. 월튼,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 of Adam and Eve, 새물결플러스, 2018)를 보라. 월튼은 창세기 1장이 물질적 기원이 아니라 기능적 질서를 다루며,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원형’으로 제시된다고 본다.

 

역사적 아담을 옹호하는 절충안으로는 C. 존 콜린스,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존재했는가』(Did Adam and Eve Really Exist?, 새물결플러스, 2019)가 있다. 진화 과학의 연구들을 의식하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역사적 아담은 필요하다는 논리를 편다.

 

그 외에도 조슈아 스와미다스의 The Genealogical Adam and Eve (IVP, 2019, 미번역)는 ‘계보적 아담’ 개념을 처음 도입하여 최근 활발히 인용되는 작품이고, 이 모델을 받아들여 밀고 나간 작품으로서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역사적 아담을 추적하다』(In Quest of the Historical Adam, 새물결플러스, 2023)가 있다. 저명한 기독교 철학자인 크레이그는 창세기 1-11장을 순수한 역사도 허구도 아닌 ‘신화-역사’(mytho-history)라는 장르로 읽되, 그 배후에 실재한 아담과 하와가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논쟁의 가장 최근 흐름을 확인하려면 케네스 키슬리 편, Perspectives on the Historical Adam and Eve: Four Views (B&H Academic, 2024, 미번역)가 유용하다. 앞의 『아담의 역사성 논쟁』과 같은 ‘네 견해’ 형식으로, 10여 년이 지나 저자들과 쟁점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준다.

 

* 이 글은 자료 조사와 초고 구성 과정에서 생성형 AI(Claude)의 도움을 받았으며, 모든 내용은 필자가 검토하고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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