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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단지 성지가 아니라 종말론적 신호이자 정치적 의제가 되었다. … 여기서 예루살렘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전체 체계의 중심축이다.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손에 돌아왔다는 확신은 정착촌, 성전산, 유대와 사마리아, 평화 협상 반대까지 연결되는 신학적 고리를 만든다. (본문 중)
권지성(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구약학 교수)
1948년 이후의 기독교 시온주의: 국가 건립, 영토 확장 운동으로의 전환(1967)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기독교 시온주의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미국 복음주의적 기독교 시온주의가 바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1948년은 오히려 오래된 회복주의적 상상력이 현실 역사에서 검증된 것으로 받아들여진 순간이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따르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이스라엘의 국가는 단지 국제정치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대인을 다시 역사의 중심 무대로 불러낸 표지였다. 골드먼이 지적하듯, 1948년 이후 미국 보수 개신교권에서 이스라엘은 예언의 확증이자 성서의 신뢰성을 재확인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한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 이스라엘 건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그 정서를 과장 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1948년 직후 기독교 시온주의는 아직 본격적인 정치 운동이라기보다 해석 공동체의 움직임에 가까웠다. 이들은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경탄했고, 그것을 성서 예언의 일부로 읽었다. 하지만, 아직 대규모 로비와 관광, 헌금 네트워크, 미디어 조직을 결합한 현대적 운동으로 완전히 전환하지는 않았다. 웨버가 말하듯, 건국 이후 세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예언 체계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었지만, 그 확신은 처음에는 주로 설교와 예언 해석, 성경공부와 출판을 통해 확산되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은 “마지막 때”의 중심 무대였지만, 그 무대를 정치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의식은 1967년 이후에야 훨씬 더 강하게 부각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은 기독교 시온주의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서안지구, 가자, 골란고원, 시나이반도를 불법 점령했는데, 당시 유엔(결의안 242)은 불법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스라엘은 오히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정착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때, 미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이스라엘군의 동예루살렘(요르단 관할) 공격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1948년이 유대 국가의 탄생이었다면, 1967년은 예루살렘이 다시 온전히 유대인의 통제 아래 들어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의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성서 지리와 현대 뉴스가 한 화면에서 겹치는 순간이었다. 와그너는, 1967년 이후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가 급격히 대중화되면서, 상당수의 복음주의자들은 6일 전쟁을 하나님의 섭리와 예언 성취의 분명한 표지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단지 성지가 아니라 종말론적 신호이자 정치적 의제가 되었다. 사이저는 기독교 시온주의 신학의 핵심 요소로 유대인의 귀환,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의 중심성, 성전 재건 기대, 비관적 전천년 묵시론을 함께 제시한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전체 체계의 중심축이다.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손에 돌아왔다는 확신은 정착촌, 성전산, 유대와 사마리아, 평화 협상 반대까지 연결되는 신학적 고리를 만든다. 따라서 1967년 이후 기독교 시온주의는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한다”라는 일반 명제에서 “예루살렘과 땅의 현재 질서를 하나님의 계획으로 승인한다”라는 훨씬 강한 종교적 의제로 이동했다.
이런 이동을 대중적으로 폭발시킨 인물 가운데 하나가 할 린지였다. 그의 『대행성 지구의 종말』(The Late Great Planet Earth)은 1970년대 미국 대중 종교 문화에서 세대주의 전천년설 종말론을 폭넓게 확산시킨 책이었다. 린지는 이스라엘 건국과 1967년 예루살렘 장악을 마지막 때의 결정적 징조로 읽었고, 중동 정치를 다니엘서, 에스겔서, 요한계시록과 연결했다. 1970년대 이후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예언 집회와 보수적 성경학교 안에 갇히지 않았다. 그것은 베스트셀러,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그리고 뒤이어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와 같은 대중 소설을 통해 미국 대중문화의 일부로 읽혔다. 신문을 한 손에, 성서를 다른 손에 들고 세계정세를 읽는 방식이 바로 이 시기에 대중화되었다.
이 대중화의 핵심은 “예언의 확인”이 “예언의 실행”으로 바뀐 데 있다. 6일 전쟁 이후 세대주의자들은 더 이상 성서를 연구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관중에 머물지 않았다. 유대인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고, 1948년 경계 너머로 확장했으니, 이제 그들이 그곳에 계속 머물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집단의식이 생겨났다. 마침내 기독교 시온주의가 정치 운동으로 바뀐 것이다. 더 이상 예언을 해석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직접 경기장의 선수로 뛰면서 예언이 진행되도록 지원하고, 그 진행을 방해하는 정치적 타협을 막아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 변화는 성지 순례와 관광 네트워크에서 드러났다. 197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성서 예언 예루살렘 학회”(Jerusalem Conference on Biblical Prophecy)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회의에는 약 1,400명이 참석했는데, 칼 헨리는 이 회의를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 이스라엘에서 열린 가장 큰 기독교 집회라고 평가했다. 회의장은 이스라엘 정부가 무료로 제공했고, 첫날에는 이스라엘 초대 총리였던 벤구리온이 직접 참석자들을 환영했다. 복음주의 종말론과 이스라엘 국가 외교가 공개적으로 만난 것이다. 이후 성지 순례는 단순한 경건 여행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를 체험하고 지지하게 만드는 정치적 순례가 되었다.
성지 관광의 정치성은 매우 중요하다. 웨버가 묘사하듯, 텔아비브 공항은 미국 복음주의 관광객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여러 여행사는 “성서 예언 여행”을 상품화했다. 이 여행은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전통적 순례만이 아니었다. 여행자들은 이스라엘의 국가 현실을 성서 예언의 성취로 확인하도록 안내받았다. 관광버스는 움직이는 강의실이 되었고, 성지의 풍경은 예언의 시청각 자료가 되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국가는 단지 멀리 있는 동맹국이 아니라 미국 교회의 눈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무대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조직도 빠르게 늘어났다. 사이저는 1970년대 이후 기독교 시온주의 조직의 확산을 중요한 전환으로 본다. “예수를 위한 유대인”(Jews for Jesus), “평화를 위한 다리” (Bridges for Peace), “예루살렘 국제 기독교 대사관”(International Christian Embassy Jerusalem), “이스라엘의 기독교인 친구들” (Christian Friends of Israel)과 같은 단체들은 각각 유대인 선교, 이스라엘 지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국제 네트워크 구축, 정착촌 및 유대인 이민 지원과 결합했다. 이들은 순진하게 신학만을 전파하지 않았다. 이들은 헌금, 관광, 출판, 로비, 구호, 유대인 이민 지원을 통해 신학을 제도화했다. 기독교 시온주의는 친이스라엘 로비를 강화하고, 알리야1)를 돕고, 서안 지구 정착촌을 지원하며, 예루살렘의 국제적 인정을 요구하고, 성전 재건 운동을 촉진하는 정치적 결과를 만들어냈다.
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은 로비 단체로서 입지를 굳건히 했는데, 1973년 10월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의 상황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닉슨 대통령에게 로비를 하였다. 이를 통해 엄청난 전쟁 물자의 지원이 이뤄졌고, 이 사건 이후에 미국 유대인 위원회는 복음주의자들과 더욱 긴밀한 협력을 하게 된다.
1977년은 또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메나헴 베긴의 리쿠드당(대표적인 보수 민족주의 정당-편집자)이 처음으로 집권했고,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자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었다. 카터는 개인적으로 친이스라엘 정서를 지니고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를 언급하고 평화 협상을 추진했다. 이에 비해 리쿠드당과 미국 기독교 우파는 훨씬 더 강한 영토 중심의 친이스라엘 노선을 공유했다. 1976년은 “기독교 시온주의의 상승”의 해로, 미국의 정치 우파, 복음주의자, 친이스라엘 로비가 삼각 동맹을 형성했다. 이 시기부터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는 단순한 종말론 운동이 아니라 공화당 보수 정치와 결합한 공공 정치 세력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1979년 이후 기독교 우파의 출현과 함께 변화를 맞이한다 (1979-1989).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기독교 시온주의자는 제리 폴웰이다. 그는 초기에 설교자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6일 전쟁 이후 입장을 바꾸어 적극적인 친이스라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방송, 대학, 교회 네트워크, 보수 정치 조직을 통해 이스라엘 지지를 미국 보수 복음주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만들었으며, 이스라엘 지지를 낙태나 가족 가치 문제와 함께 “뉴 크리스천 라이트”의 특징적 의제로 통합했다.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예언 성취와 관련된 관심사를 넘어 미국 보수주의자의 정치적 충성도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었다.
또한, 로널드 레이건과 그의 행정부는 기독교 시온주의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사이저에 따르면, 레이건은 아마겟돈과 에스겔의 예언을 반복적으로 언급했으며, 이스라엘의 보존을 미국의 의무와 운명으로 표현했다고 말한다. 물론 레이건의 중동 정책을 단순히 종말론으로만 환원하긴 힘들 것이다. 냉전, 석유, 군사 동맹, 반공주의가 모두 작동했지만, 종말론적 언어는 그 정책을 대중적으로 정당화하는 강력한 감정적 자원이었다. “이스라엘은 단지 전략적 동맹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나라”라는 인식은 미국 복음주의 보수층에게 레이건식 강경 노선을 신앙적으로 수용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이후 기독교 시온주의는 “유대-기독교 문명” 담론과도 결합했다. 골드먼은 미국 기독교 시온주의가 단지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미국을 유대-기독교 문명의 수호자로 보는 더 넓은 정치신학과 결합했다고 분석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후 냉전기를 거치면서 이 담론은 무신론과 공산주의에 맞선 문명 방어 논리로 작동했으며, 9/11 이후에는 이슬람과 테러와의 전쟁 담론 속에서 다시 강화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언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서구 문명의 최전선”이 되었다. 바로 이 이중 코드 때문에 기독교 시온주의는 신학적 운동이면서 동시에 미국 외교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1989년 이후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있는 코너스톤 교회 목사 존 헤기와 CUFI의 시대라고 할만하다. 존 헤기는 번영 복음을 수용했으며 창세기를 “하나님의 외교 정책 성명서”로 읽고, 2006년 “이스라엘을 위한 그리스도인 연합”(Christians United for Israel: CUFI)을 조직했다. CUFI는 사실 베냐민 네타냐후의 요청으로 설립된 것이었으며, 이 조직은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친이스라엘 플랫폼으로 성장했고, 워싱턴 정상 회의와 지역 행사를 통해 미국 정치인과 이스라엘 정치인을 연결했다. 이 조직화는 1970년대 이후 진행된 복음주의 친이스라엘 운동의 제도적 완성형에 가깝다. 교회 강단, 방송, 출판, 관광, 로비, 선거 정치가 하나의 회로 안에 묶인 것이다. CUFI는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선호하는 친이스라엘 로비 단체로 복음주의자들의 백악관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1) 히브리어로 ‘올라감’을 뜻하며,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 물결을 차례로 구분하는 역사 용어. 제1차 알리야(1882–1903)가 박해를 피한 이주였다면, 제2차 알리야(1904–1914)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닌 동유럽 유대인들이 주도하여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의 제도적 토대를 형성한 물결이었다. 이후 5차 알리야(1929-1939)까지 이어졌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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