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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주체 중 하나로서 교회는 노인들의 품위 있는 삶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혹시나 교회가 사랑 대신 혐오를, 절제 대신 시위를 촉구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이켜 볼 일이다. 이는 교회와 노인 개인에게 비극이지만 민족 공동체에도 큰 비극이다.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바처럼, “늙은 남자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기를 기도할 일이다. (본문 중)
백종국1)
노인들에게 고함
1807년 겨울 피히테 교수는 나폴레옹 군이 점령한 베를린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일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독일 민족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감행하였다. 이 연설의 말미에서 그는 독일의 구성원들, 예컨대 젊은이, 노인, 관료, 지식인, 봉건영주, 심지어 세계인들을 차례로 호명하며 각자가 해야 할 일을 당부하였다. 이 중에 노인들 특히 “보통의 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2026년 여름의 대한민국과 1807년 겨울의 독일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우선 한국은 비록 분단국이지만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주권 국가이다. 외국군이 주둔 중이지만 점령군이 아니라 동맹군이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므로 민족주의를 강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딱히 제약은 없다. 반면에 1807년의 독일은 프랑스군이 점령 중이었고 피히테의 연설을 출간했던 파름은 반프랑스적인 서적을 펴냈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유사점도 있는데, 피히테의 독일과 지금의 한국은 둘 다 강력한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라는 점이다. 피히테의 독일은 예나와 아우슈테트 전투의 패배로 많은 영토를 상실하고 프랑스와 러시아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처량한 신세였다. 지금의 한국은 이미 분단된 국가로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럴수록 자주 자립을 향한 민족적 단결이 필요하나, 사대주의와 민족주의의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방황하는 노인들의 등장과 혐오의 악순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 사회에서는 공공장소나 온라인을 방황하면서 공공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편견 혹은 편의에만 몰두하는 소위 ‘방황하는 노인들’ 혹은 룸펜 실버(lumpen silver)가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자산과 의식이 빈곤한 편이며 파시즘적 선동에 쉽게 동원되거나 소액에도 쉽게 매수당하는 존재적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 민주 시민 의식이 빈약하고,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며,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있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광장이나 지하철, 공원에서 쉽게 목격하듯이 이들의 행태는 사회적 혐오를 불러일으키면서 만물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방황하는 노인들의 등장 배후에는 기대 수명의 급격한 증가가 있다.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1970년에 62.3세였는데 2025년에는 84.5세로 무려 22년이 증가하였다. 2066년이 되면 90.5세가 되리라는 게 통계청의 추측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장수는 신의 은총이지만 준비 없이 맞이하는 노후 20년 혹은 30년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다. 이는 한국이 OECD 국가 중에서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 1위라는 통계와 표리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사건들의 배후에는 갑자기 늘어난 수명과 관련된 당혹감이 숨어있다.
비록 소수이지만 이 방황하는 노인들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노인 혐오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노인을 혐오하든 노인이 혐오하든, 혐오의 총량은 증가하고 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노인 존중은 오랜 세월 깊이 뿌리박은 문화였다. 그러나 최보람 등이 작성한 노인 혐오 뉴스 분석(2026)을 보면 최근 한국 사회에서 노인 혐오는 어느 국가보다도 더 심각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2021년부터 2023년 기간에 발생한 어용 단체들의 노인 동원 전략으로 인해 노인 혐오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연실의 워드 클라우드 연구(2025)를 보면 이 혐오 문화는 단순히 노인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 전체를 대상으로 구조화하고 있다고 한다. 혐오는 혐오를 끌어들이고 마침내 혐오를 퍼뜨리는 자를 혐오하게 된다.
혐오의 확산은 민족의 생존을 해치는 암적 존재 중 하나이다. 데이비드 콜먼 옥스퍼드대 교수는 현재 추세라면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이 인구 소멸 국가 1호가 되리라고 예측했다. 이미 2020년에 한국에서 출생자보다 사망자가 더 많은 데드크로스가 발생했다. 1980년에 21세였던 중위 연령이 2040년에는 52세가 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인구의 25%가 나머지 75%를 먹여 살려야 하는 사회가 된다. 그리고 이론상으로 2300년경이면 한국의 인구는 0명이 된다. 물론 그때가 되기 전에 이미 다른 사회로 흡수되어 국가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결혼 기피, 출산 포기, 이민 배척이 이 위기의 직접적인 요인이지만 사회의 모든 부분으로 스며들고 있는 혐오의 확산이 이러한 추세를 만들어내는 정서적·이념적 배경이다.
지혜로운 노인의 역할

ⓒunsplash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기로설화(棄老說話)는 공동체를 구하는 노인의 지혜에 대한 우화이다. 어떤 나라에서 쓸모없어진 노인들을 산속에 갖다버리라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어느 효자가 왕의 명령을 따를 수도 없고 아버지를 버릴 수도 없어서 집 가까운 곳에 토굴을 파고 아버지를 모셨다. 그러다가 주변의 강대국이 그 나라에 사신을 보내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고 풀지 못하면 나라를 삼키겠다고 위협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지만, 아버지의 지혜를 전해 받은 효자가 이 국난을 극복했다. 그 후로 노인을 버리라는 왕명은 취소되었다.
성경도 노인을 지혜의 소유자로 묘사하고 노인을 공경하라 가르치고 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욥 12:12). 많은 경우에 노인은 젊은이들에 비해 풍부한 경험과 기술, 재능, 지혜를 가지고 있으므로 젊은이들이 노인을 존경하고 경청하고 배우려 노력하는 게 옳다. 우리 사회가 소멸의 위기를 앞두고 있다면 마땅히 노인들에게도 어떤 국난 극복의 지혜가 있는지 물어보는 게 바람직하다.
민족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로운 노인의 모델로서 조선 중기 경상우도의 석학이었던 남명 조식의 처세를 추천하고 싶다. 남명은 평생을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경(敬)과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의(義)를 닦는 일에 몰두하였다. 당시의 혼란한 외척 정치를 경원시하여 왕의 여러 차례 벼슬 제수를 사양했지만, 불의한 일을 볼 때면 추상과 같은 상소를 올리곤 하였다. 경과 의의 실천으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정인홍, 곽재우 등 많은 제자들이 의병으로 봉기하여 후방 게릴라전이나 진주 대첩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노년에 지은 시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청컨대 저 천 석짜리 종을 보게나請看千石鐘
크게 두들기지 않으면 소리 내지 않는다네非大扣無聲
우리 공동체도 우리의 노인들이 노후 20여 년을 품위 있게 지내시면서 공동체의 성장에 지혜를 보태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첫째는 노인의 생존권 보장이다. 공동체에 대한 공헌 여부에 따라 각각의 보상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해 주는 것이 시민 사회의 마땅한 도리이다. 둘째는 지속적인 민주 시민 교육이다. 아직도 의식 저변에 웅크리고 있는 군사 독재의 향수를 씻어내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삶의 중요성을 이해함으로써 젊은이들과의 인식 차이가 좁혀지도록 도와드려야 한다. 셋째는 이웃을 위한 자원봉사 참여이다. 자원봉사는 내적으로는 생존의 의미를 되찾고 외적으로는 혐오의 고리를 끊는 좋은 방안이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를 괴롭히는 일탈 행위의 엄격한 처벌이다. 대표적인 예로 가짜 뉴스에 기반한 혐오 범죄를 들 수 있다.
공동체의 주체 중 하나로서 교회는 노인들의 품위 있는 삶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혹시나 교회가 사랑 대신 혐오를, 절제 대신 시위를 촉구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이켜 볼 일이다. 이는 교회와 노인 개인에게 비극이지만 민족 공동체에도 큰 비극이다.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바처럼, “늙은 남자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기를 기도할 일이다.
이 글의 결론은 이러하다. 노인은 조용히 품위 있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고, 공동체 특히 교회는 이러한 환경 조성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물론 공동체의 강력한 요청이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봉사하면 된다. 모세나 강태공도 모두 팔십 세에 공동체의 요청을 수락하고 역사적 업적을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라면, 사는 동안 우리 공동체가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운영되도록 힘을 보태는 것만으로도 넉넉하지 않을까? 물론 그 일의 결말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1) 경상국립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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