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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영포티일지 좋은 어른일지는 그들이 무엇을 내어주는 사람이 될지, 빼앗고 전유하는 사람이 될지에 따라 결정된다. 교회 안에서는 청년부(대학부)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를 더 많이 주고, 자신들이 교회 변혁의 유일한 주체라고 지나친 자의식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본문 중)
신하영1)
‘세대 별칭’의 시대
2025년에는 ‘영포티’가 유행이었고, 2026년에는 ‘영크크’라는 유행어가 우리 주변을 맴돈다. 신기하게 두 단어 모두 특정 연령대를 가리키고, 앞의 것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데 반해서 뒤의 것은 ‘늙크크’라는 상대 개념까지 만들어 가며 긍정적인 맥락으로 쓰인다. 물론 이런 나이+특징을 결합한 ‘세대 별칭’은 오늘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Gen Z라는 식으로 새로운 세대를 규정지으려는 움직임이 보편적으로 있지만, 사실 원래도 한국에는 유난히도 ‘세대 별칭’이 존재해 왔다. 예전에는 88만 원 세대, 아프니까 청춘이다, 386세대 등 특정 세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들을 결부시켜 그 세대를 특징지어왔다.
영포티와 늙크크를 향한 빈축과 원망
젊음은 강력한 매력과 가능성의 요소다. 그래서 ‘young, 젊다’는 것은 대체로 긍정적인 수사로 쓰인다. “나는 나이는 많지만 마음만은 청춘이야”는 연령은 높아졌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활기차게 사는 경우에 쓰이고, “젊게 사시네요”도 역시나 칭찬에 해당한다. 그런데 왜 영포티는 40대의 특정 집단이 빈축을 사는 데 쓰이는 수사가 되어버렸을까. 그들이 잘못 건드린, 전유해 버린 젊음이 무엇이길래?
영포티는 한때는 문자 그대로 ‘늙지 않고 젊은 세대의 감각을 유지하려 애쓰는 40대’를 가리키는 비교적 중립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영포티는 외양에서는 묘하게 촌스럽게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들, 언행에 있어서는 ‘어딘지 모르게 진보적이고 개방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향한 냉소가 되어버렸다.

<그림 1> 한 일간지에서 한국 영포티의 특징들을 하나로 모아서 설명한 이미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영포티의 특징은 단순히 패션 아이템에 그치지 않는다.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중년 남성, 인권과 페미니즘을 말하는 ‘바른말 하는 아저씨’ 등 이들의 정치 사회적인 성향까지 영포티를 이루는 구성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출처: 한겨레)
호명이 아닌 선 긋기
이 지점에 와서는, 영포티라는 호명에는 단순히 늙어가는 몸과 마음에 맞지 않는 옷과 언행을 향한 우스꽝스러움에 대한 빈축을 넘어서 더 큰 부정적 감정이 느껴진다. 그 단서는 사십 대를 향해 ‘영포티’로 호명하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보면 얻을 수 있다. 오십 대와 육십 대는 사십 대를 향해 영포티라고 부르지 않는다. 애초에 무엇이 영포티스러운 요소인지를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왜냐하면 영포티가 전유하는 것, 이들이 ‘빼앗은 것’은 2030 청년들이 누려오던 것, 혹은 이제는 누리기 어려워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음의 자유로운 스타일(외양), 젊음의 변화를 향한 의지(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나도 모르는 새에 빼앗긴 세대는 그 원망을 비웃음 속에 숨기게 된다.
영크크가 되려고 하나 되지 못하는, 따라 하려고 하지만 잘 안되는 상대를 향해 ‘영크크’가 던지는 ‘늙크크’라는 조롱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young) 창조적인 무리(creative crew)가 향유하는 감각과 문화를 누리려고 하는, 사실은 감이 한참 뒤떨어진 기성세대를 향해 선을 긋는 것이다. “이것까지 다 가져가려고 하지 말아요. 이건 우리 거예요”라는 메시지랄까. 그래서 자꾸 조롱에 가까운 호명을 하며 선을 긋고 있다.
영포티가 좋은 어른이 될 때
그렇다면 젊음의 반짝거림, 20-30대가 향유하는 빠르고 경쾌한 문화의 변화 속에서 ‘여전히 젊고 싶은’ 사십 대 혹은 그 이후의 기성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혀 말도 통하지 않고, 아예 다른 사회문화적 시공간에서 폐쇄적으로 살아가던 ‘불통의 꼰대’로 회귀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하면 영포티가 아닌, 같이 밥을 먹고 싶고 차 한잔하며 조언도 구하고 싶은 좋은 직장동료, 교회 성도, 담당 교수, 동네 이웃이 될 수 있을까.
필자는 최악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자고 권하고 싶다. 여기 자신보다 최소 16-17세 어린 여자 직원에게 ‘고백 공격’을 하면서도 그것이 성희롱이 되리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자신은 ‘젊게 사니까’ 상대방에게 충분히 연애 상대로 어필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십 대 남성이 있다. 이런 사십 대를 향해 사람들은 ‘영포티’라고 조롱한다.

<그림 2> “영포티 직장 상사에게 고백받은 01년생 신입 여직원”으로 유명해진 인터넷 이미지. 이 글을 쓴 이는 2001년생으로 24살 남짓의 사회 초년생이었고 40대 직장 상사라면 최소 16-17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상대다. 심지어 직장 상사라면 성적 언동 등을 할 때 위계를 이용해서 상대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성희롱 고발의 대상이 된다.
<그림 2>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실 이 상황은 심각한 직장 내 성차별이고 성희롱이다. 이 상황에 사람들은 이 직장 상사를 향해 ‘영포티’라고 한다. 영포티가 자신들만의 문화를 향유하고 젊은 감각에만 오롯이 취해 있다면 그것은 공격 혹은 착취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부하 직원, 불황이 더 장기화한 상태의 더 열악한 노동 시장에 던져진 다음 세대가 겨우 숨 쉴 구멍으로 만들어 낸 그만의 문화 코드를 전유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함부로 개입하고 (고백)공격하기 때문이다.
영포티, 늙크크 만큼이나 기성세대와 관련해서 많이 떠오르는 키워드는 역설적이게도 ‘좋은 어른’이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2)는 다큐멘터리 불모지라고 하는 한국의 미디어 환경에서도 보기 드문 성공을 거뒀다. 흥행을 넘어서 일종의 ‘좋은 어른’ 신드롬을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젊은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은 똑같은데, 겸손함과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난 윤여정 배우는 좋은 어른으로 ‘어록’이 떠돈다. 이런 현상은 그만큼 좋은 어른, 나를 지지해 주는 기성세대가 드물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어쩌면 여전히 젊은 세대는 ‘먼저 살아간 사람의 등이 말해주는 것’을 들으며 소통하고 싶어 한다.
환대하는 공동체 어른의 모습
작년 2025년 기윤실은 “환대하는 공동체 함께 누리는 안녕”을 표어로 활동했다. 내란 이후 상처와 불신으로 가득한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향한 통렬한 마음으로 정했던 표어였다. 환대하는 공동체의 사십 대는 어떻게 호명될까. 이들이 영포티일지 좋은 어른일지는 그들이 무엇을 내어주는 사람이 될지, 빼앗고 전유하는 사람이 될지에 따라 결정된다. 교회 안에서는 청년부(대학부)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를 더 많이 주고, 자신들이 교회 변혁의 유일한 주체라고 지나친 자의식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직장과 일상의 많은 장면에서는 사십 대들(그리고 많은 경우에 중년 남성들)이 “그래도 나 정도면 우리 아버지 세대보다야 훨씬 깨어 있지”의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요즘 사회 생활에서 가장 큰 덕목이라고 꼽히는 ‘메타 인지’3)가 장착되어야 한다. ‘중2병’부터 시작해 ‘영포티’까지 가장 자연스러운 나이듦에 대해서까지 멸칭이 따라오는 바야흐로 대혐의 시대에, 환대하는 공동체는 영포티가 아닌 좋은 어른이 다음 세대가 들어오고 자라나도록 판을 깔아 주고 응원해 주는 모습으로 실현되리라 믿는다.
1) 세명대 교양대학 교육학 교수.
2) 경남 진주에서 60년 동안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김장하 선생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김주완의 저서 <줬으면 그만이지>를 바탕으로 MBC 경남의 김현지 PD가 연출하였다.
3) 자신의 생각, 학습, 인지 과정에 대해 스스로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하고 평가하며 통제하는 능력, 즉 인지에 대한 인지. 이승호, 『생각은 기술이다: 메타인지 학습법』(인간사랑,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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