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본회퍼 연구의 대가인 그린(C. Green)은 개인주의에 함몰되고 있는 오늘의 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를 함께 강조하는 본회퍼의 신학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신앙의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고 공동체 안에서 구체화되어야 하는 신앙의 성숙함은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본문 중)

고재길(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문화 교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독일 개신교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21세에 박사학위를 받고 24세에 교수자격논문까지 통과한 장래가 촉망되던 신학자였다. 그는 히틀러(A. Hitler)에 맞서 저항함으로써 교수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1945.4.9.)을 받았다. 비록 39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신학적 울림과 삶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에 지금은 폴란드 영토에 속해 있는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태어났다. 8남매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던 그에게는 쌍둥이 여동생 자비네(Sabine)가 있었다. 본회퍼는 가족들과 함께 1912년에 베를린 그루네발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의 부친인 칼 본회퍼(Karl Bonhoeffer)가 베를린 대학교의 정신의학과 주임교수로 임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본회퍼가 유년기를 보냈던 그곳에는 문인들, 예술가들, 대학교수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독일의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침머링(Peter Zimmerling) 교수에 의하면 본회퍼의 학문적, 신학적 자질은 그루네발트 지역의 지적인, 학문적인 분위기와 풍토에서 비롯되었다.

 

본회퍼의 부모. (좌)어머니 파울라, (우)아버지 칼 본회퍼.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던 본회퍼는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았으며 일반적인 학교교육의 엄격한 분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본회퍼는 객관성과 과학적 사고를 존중하는 아버지나 그의 형들과는 다르게 신학 공부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았다. 튀빙겐에서 대학공부를 마칠 무렵, 본회퍼는 이탈리아 로마로 여행을 갔다. 본회퍼가 독일 루터파 교회의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로마의 경험에서 이미 준비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로마 가톨릭교회를 방문하면서 세계의 모든 교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넓이와 깊이를 그가 거기서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이유 때문일까? 본회퍼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세상의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교회들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했던 마르크스(Karl Marx)를 생각나게 하는 본회퍼의 이 말은 분열로 갈등하는 오늘의 교회를 지금도 부끄럽게 만든다.

 

본회퍼의 학창시절.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본회퍼.

 

저명한 신학자 바르트(Karl Barth)로부터 “신학적인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본회퍼의 박사 학위 논문은 교회공동체에 대한 조직신학적 연구이다. 그는 특별히 사회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교회를 연구했다. 그의 논문 제목은 “성도의 교제: 교회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이다. 본회퍼는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교회는 일반적인 공동체들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는 교회공동체이다. 동시에 교회는 그 공동체들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계시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한다. 본회퍼는 성경과 신학의 개념을 사회학적 범주, 즉 사회성(사회적 관계성)에 기초하여 해석한다. 여기에서 창조는 공동체의 출현, 타락은 공동체의 파괴, 구속은 공동체의 회복, 재림은 공동체의 완성으로 간주된다. 미국의 본회퍼 연구의 대가인 그린(C. Green)은 개인주의에 함몰되고 있는 오늘의 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를 함께 강조하는 본회퍼의 신학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신앙의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고 공동체 안에서 구체화되어야 하는 신앙의 성숙함은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교회공동체에 대한 본회퍼의 관심은 그의 목회적 삶과 신학연구의 과정에서도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본회퍼는 1928년, 목회자 후보생의 자격으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독일인 교회를 섬겼다. 그는 그곳의 사역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교회공동체와 더불어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교수자격논문을 준비했다. “행위와 존재: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선험철학과 존재론”이라는 긴 제목의 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된 후 본회퍼는 1930년 마침내 대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국가가 인정하는 공적 자격을 획득하였다.

 

목회자 후보생 시절의 본회퍼. 가운데 누워있는 사람이 본회퍼.

 

다음 글에서는 본회퍼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경험한 이야기를 소개할 것이다. 본회퍼가 뉴욕의 할렘 가와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경험한 것들이 그의 신학과 삶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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