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음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화음 현상도 진동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리의 진동수 비가 4:5:6인 음들을 동시에 혹은 연속적으로 들을 때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가 되는 것을 알았다. 도, 미, 솔은 진동수가 264:330:396으로 4:5:6이다. 파, 라, 도나 솔, 시, 레 역시 4:5:6의 진동수 비를 가지며 듣기 좋은 화음을 이룬다.(본문 중)

성영은(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사진제공: 이유리)

 

필자는 지금 학생들과 봉사활동을 위해 탄자니아에 와 있다. 이곳 아이들이 특유의 경쾌한 율동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내 몸과 마음이 저절로 따라 움직이는 걸 보면서 음악이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중에 아름다운 것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음악은 특별하다. 찬송이나 음악이 빠진 기독교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음악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며,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사진제공: 이유리)

 

과학의 눈으로 보면 소리는 물체의 떨림(진동) 현상이다. 음악은 악기나 사람의 성대가 공기를 진동시켜 그 파동을 우리 귀에 전달하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소리는 사실 실체가 따로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음악의 소리는 우리가 붙잡을 수 없는 현상이다. 이 공기의 진동은 우리 귀에 전달된 뒤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과학은 금방 사라져버리는 소리 파동의 모양을 그 모양 그대로 아날로그 방식이나 디지털 코드로 저장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런 녹음 기술과 음향 저장 매체 때문에 음악 소리가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재생된 소리도 매번 공기를 진동시켜 우리 귀에 보낸 후에는 사라진다. 그러니 음악은 공기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물이나 땅을 통해서도 진동이 전달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공기의 진동과 전혀 다른 소리가 되고 사람의 귀로 듣기도 어렵다.

음악의 도레미 음계의 구성도 이 진동 현상과 관련이 있다. 소리의 파동이 1초에 몇 번 진동하는가를 진동수[혹은 주파수, 단위는 헤르츠(Hz)]라 하는데 진동수에 따라 높이가 서로 다른 소리가 난다. 서양 음계에서 기준이 되는 ‘라(A)’ 음은 440Hz이다. 즉 무엇이든 1초에 440번 진동하면 ‘라’ 음이 된다. 이 ‘라’를 기준으로 도는 264Hz, 레는 297Hz, 미는 330Hz, 파는 352Hz, 솔은 396Hz 등 음계를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우리 귀는 1초에 440번의 2배로 진동하는 880번, 또 그 2배인 1,760Hz, 또 그 2배인 3,520Hz도 음의 높이(옥타브)만 다르지 모두 같은 ‘라’음으로 듣는다.

 

ⓒpixabay

 

한국에 사는 모기는 날갯짓을 1초에 600번 하기 때문에 모기의 ‘웽~’ 소리는 높은 ‘레’(297Hz의 2배) 음에 가깝다. 파리의 날갯짓은 230Hz(440÷2)로 낮은 ‘라’ 음에 가깝다. 그런데 소리를 전달하는 공기는 기온이나 습도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같은 음이라도 낮과 밤이 다르고 겨울 모스크바에서 듣는 것과 여름 적도에서 듣는 것이 다르다. 물론 사람의 귀는 그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라’ 음을 440Hz로 표준화해 두었지만 교향악단에 따라 실제로는 436~448Hz로 조금씩 다르게 연주한다고 한다.

여러 음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화음 현상도 진동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리의 진동수 비가 4:5:6인 음들을 동시에 혹은 연속적으로 들을 때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가 되는 것을 알았다. 도, 미, 솔은 진동수가 264:330:396으로 4:5:6이다. 파, 라, 도나 솔, 시, 레 역시 4:5:6의 진동수 비를 가지며 듣기 좋은 화음을 이룬다. 그런데 음악이 발달하며 조옮김 같은 음악적 기법이 생기면서 문제가 생겼다. 도에서 한 옥타브 위의 도까지 각 음들 사이의 진동수 간격이 다 달라 조옮김을 했을 때 화음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각 음의 간격을 똑같이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것이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평균율 음계이다. 이 평균율 음계는 인위적으로 음정을 조정한 한계를 지니기에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음계를 찾는 일과 더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화음을 찾는 일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동안 소위 불협화음으로 알고 있던 음정에서 화음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화음이 정말로 아름다운 화음인지 아니면 현대인들을 불협화음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아직은 쉽게 판단하기 힘든 문제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는 음악과 소음의 경계를 없애려는 시도도 존재한다. 아무튼 이렇게 음악은 변해왔고 또 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소리 안에도 질서와 조화를 두셨고, 이것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게 하셨다.

 

ⓒwikimedia

 

소리 중에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것은 20~20,000Hz 범위의 소리다. 그 중 3,500Hz를 가장 잘 듣는다. 그래서 비상벨, 소방차나 응급차량 사이렌은 주로 3,520Hz의 ‘라’음을 사용하고 있다. 15,000Hz 이상은 청소년 때는 잘 들리지만 나이가 들수록 잘 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20,000Hz 이상의 소리를 초음파라 한다. 사람은 이런 초음파를 들을 수 없지만 개는 50,000Hz, 고양이는 60,000Hz의 소리도 듣는다. 심지어 박쥐는 120,000Hz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들을 수 없는 20Hz 이하를 초저음파라 하는데 뱀이나 개구리 등은 그 소리를 잘 듣는다. 코끼리도 10Hz 근처의 소리로 서로 대화한다. 나비는 1초에 10번 날갯짓을 하므로 사람은 나비의 날갯짓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이렇기 때문에 산이나 숲을 거닐면서 고요하다고 느낄 때조차도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무수한 초음파와 초저음파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우리에게 들리지 않을 뿐이다. 숲속에서 곤충들은 초음파로 목청껏 노래하고 갖가지 생명체들은 초저음파를 내면서 날아다니고 기어 다닌다. 하지만 사람이 만일 그런 소리를 다 듣는다면 시끄러워서 도저히 숲속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또 밤중에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할 것이다. 심장 뛰는 소리나 벌레 기어 다니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크기에도 한계가 있다. 소리의 크기는 소리의 진동수가 아닌 진동 폭과 관련이 있다. 소리의 크기는 데시벨(dB)로 표시한다. 사람은 0~130dB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10dB이고 공습경보나 비행기 소음이 120dB이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가 0dB이고 그보다 10배 큰 소리가 10dB, 100배 큰 소리가 20dB과 같이 10의 배수로 표시한 것이다. 사람은 그보다 작은 소리나 그보다 더 큰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죽을까 두렵다’고 하면서 모세더러 대신 듣고 전해달라고 했던 사건이 있다(출20:18-19). 하나님의 엄위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소리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고 듣는 소리가 소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케 하는 동시에 감사케 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소리를 전부 듣는다면 우리에게 달콤한 휴식이나 잠, 고요함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무수한 소리를 만드시고도 우리로 하여금 그 일부만 듣게 하신 것은 우리에 대한 배려이며 사랑이다. 한편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소리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 소리로 만든 음악 역시 여러모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즉 우리의 찬송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곡을 만들어 찬송한다 해도 그 넓고 깊고 풍성한 소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는 한없이 부족할 것이다. 찬송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도 결국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의 한계 안에서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귀에 들리지도 않고 또 들린다 한들 소음으로 느껴질 곤충들의 노랫소리도 하나님의 귀에는 아름다운 찬양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좋은 찬송을 짓고 부르기에 힘쓰되 이런 한계도 늘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한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찬송을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이며 은혜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이유리)

 

기고자가 탄자니아에서 직접 촬영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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