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한국 근현대사에 남긴 오점도 많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역사적 잘못은 해방이후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한국교회가 힘을 가진 집단이 된 것이 해방 이후였기 때문이다. 한말과 일본강점기 동안 한국교회는 사회의 주류가 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기독교는 미군정청 및 이승만 정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특권을 누리는 집단이 되었다. 그 특권은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동력이었다.(본문 중)
류대영(한동대 교수, 역사학)
한국 개신교는 19세기 말 랴오둥 반도의 항구도시 잉커우에서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가 전해준 한문성서를 읽은 의주의 젊은이들이 그곳에 가서 세례 받고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된 것이다. 개신교 집회가 처음 열린 곳도 그곳이었다. 140여 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는 9백만 명이 넘는 신자를 가진 거대한 집단이 되었다. 세계에서 한국 개신교만큼 영향력 있고 활기찬 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다.
140년 동안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말에는 앞서가는 서구문명의 담지자로서 전근대적 폐습과 싸웠고, 근대적 교육과 의료, 문화 사업을 펼쳤다.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애국심과 근대적 시민의식을 일깨우기도 했다. 일본강점기 동안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삼일운동과 국내외 민족운동을 주도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많은 기독교인이 반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시민운동을 이끌었다. 민족화해를 위한 남북한 교류에도 기독교인들이 적극 참여하여 크게 기여했다.
한편으로, 한국교회가 한국 근현대사에 남긴 오점도 많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역사적 잘못은 해방이후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한국교회가 힘을 가진 집단이 된 것이 해방 이후였기 때문이다. 한말과 일본강점기 동안 한국교회는 사회의 주류가 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기독교는 미군정청 및 이승만 정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특권을 누리는 집단이 되었다. 그 특권은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동력이었다. 특히 이승만 정부와 한국 개신교는 밀월관계라고 불릴 만큼 공동운명체처럼 묶여 있었다. 한국교회는 이승만을 무조건 지지했고, 이승만은 한국교회에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공동의 운명이란 이승만의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한국교회가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지고 있는 역사적 책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교회는 신탁통치를 무조건 반대한 책임이 있다. 한국전쟁은 해방 이후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결과였다. 한민족은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들이 결정한 한반도 신탁통치 안은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이었다. 이때 미국은 최대 10년 동안 미국·영국·중국·소련의 고등판무관이 한반도를 직접 통치하는 안을 제시했고, 소련은 한국인이 임시정부를 만들어 5년 동안 4개국 감독 아래 자치를 연습하고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안을 제시했다. 미국의 안은 자기가(영국, 중국은 미국편이므로) 한반도를 직접 통치하겠다는 것이고, 소련 안은 강대국의 역할을 최소화 하고 한국인이 스스로 통치하게 하는 방안이었다. 소련이 그런 안을 낸 것은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 지형이 자신에게 이로웠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에서도 사회주의-공산주의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소련 안이었다.
신탁통치 안에 대한 한민족의 의견은 이념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우익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좌익은 찬성했다. 미국은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했지만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동아일보의 그 유명한 오보(誤報)가 상황을 더욱 왜곡했다. 임시정부 구성을 위해 소집된 미소공동위원회는 합의점을 찾기 어려웠다. 우익세력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킬 것이냐가 특히 큰 쟁점이었다. 우익의 지지를 받던 미국은 우익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구했고, 소련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신탁통치를 위한 조직에 포함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임시정부 구성과 신탁통치는 무산되었다.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 국내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인 절대다수는 우익의 편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남한 기독교계 지도자 가운데는 여운형, 김창준, 김규식 등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따르는 기독교인은 많지 않았다. 절대다수 개신교인은 이승만을 지지하며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이것은 당시 한국교회의 판단력이 이념의 틀, 지지하는 지도자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지 못했음을 말한다.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이념이나 정치적 이해타산을 넘어 냉정하게 국제정세를 살핀 후 민족을 위한 최상의 길을 제시해야 했다.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이란 그런 것이지 않은가? 이념에 종속된 한국교회 신앙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였다.
둘째, 한국교회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설립 방안을 찬성한 책임이 있다. 해방 이후 남한지역의 지배자는 미국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에는 미군정청이 자리 잡았고,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미국은 남한을 계속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미국과 이해관계가 가장 잘 맞는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했고, 해방을 맞아 귀국할 때까지 4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았으며, 집에서도 영어를 사용했다. 더구나 그는 기독교인이었다. 국내 정치적 기반이 약하던 이승만의 입장에서 남북한을 아우른 통일정부가 만들어질 경우 정권을 잡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에게 유일한 길은 미국 군인들이 다스리던 남한 지역을 따로 떼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한창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던 때였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로비활동을 했다. 신탁통치를 위한 임시정부 구성이 여전히 논의되는 상황에서 나온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은 좌익은 물론이고 우익 민족주의계로부터도 격렬한 비판과 저항을 받았다. 남한 단독정부는 분단을 뜻했고, 분단은 사실상 전쟁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통일정부 수립이 어려워진 1948년 4월, 남북한 지도자들이 평양에 모여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했을 때 논의된 주요 사안 가운데 하나가 전쟁방지 방안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을 열렬히 지지했다. 통일정부 수립은 당시 거의 모든 한민족 구성원이 갈망하던 바였다. 종교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한 주요 종교 가운데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한 것은 개신교 밖에 없었다.
셋째, 한국교회는 전쟁을 부추기고 미국의 파괴적 전쟁수행을 지지한 책임이 있다.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무력으로 북한을 점령하자는 말이었다. 북한을 공격할 만한 군사력이 없던 이승만에게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에게 전쟁수행 능력이 있었다면 그가 실제로 전쟁을 벌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그의 말은 호전적이었다. 한국교회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도 힘을 보탰다. 특히 북한에서 피난 온 교역자들은 북한 정권을 악마화 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경직은 공산주의를 계시록에 나오는 “붉은 용”으로 정의하여 그 타도에 종말론적 의미까지 부여했다.
북한에서 남으로 내려온 교역자들이 북한을 장악해가던 사회주의 세력을 그토록 적대적으로 바라본 것은 그 세력과 충돌하여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북한 출신 교역자들이 강조한 것은 공산주의가 유물론이고 따라서 반기독교적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은 종교의 자유를 약속하고 공언했지만,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종교인이 북한에 존재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교역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북한 정권과 충돌한 것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의 문제이기도 했다. 북한지역 교회의 중심은 중소지주, 상공인, 전문 직업인이었다. 이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토지 및 중요 산업 국유화로 대표되던 사회주의적 경제체제와 충돌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인 연구자 사와 마사히코(澤正彥)는 북한지역 교역자와 교인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온 것은 사회주의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사회주의적 환경에서는 생존할 수 없었던 한국 개신교의 성격 때문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의 질문은, 세계의 어느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도 교회는 존재했고, 북한에도 남한 행을 선택하지 않은 20여 명의 교역자가 있었다는 점과 연결되어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한국전쟁의 일차적 책임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통일정부를 이루고자 했던 김일성과 박헌영 등 북한 지도자들이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의 가장 큰 책임은 미국정부에게 있었다. 미국의 전쟁수행 방식은 잔인했다. 맥아더는 1950년 11월부터 민간인 지역을 포함한 북한 전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명령했고, 미국 공군은 휴전까지 총 63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태평양전쟁 기간 전체에 걸쳐 사용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미국 공군전략사령부 사령관 르메이(Curtis E. LeMay)가 “북한의 모든 마을을 불태워버렸다”고 할 정도였다. 군사적 대상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은 무차별 공습이었기에, 그 최대 피해자는 북한지역 민간인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약 25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운데 약 220만 명이 북한지역 민간인이었다. 그 속에 수많은 기독교인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전체적으로 북한은 한국전쟁으로 인구의 약 20%를 잃은 것으로 알려진다.
세계교회협의회와 미국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세계의 여러 교회와 기독교 단체는 즉각적 휴전을 요구했다. 개전 초기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의 편에서 유엔군 파병을 지지했던 그들이 그렇게 입장을 바꾼 것은 재앙적 규모의 인명피해에 경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승만과 함께 휴전을 끝까지 반대했다. 전쟁을 계속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쟁을 계속할 경우 얼마나 많은 병사와 민간인이 더 희생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없어 보였다.
해방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교회가 시종일관 보여준 것은 성경적-기독교적 가치관이 아니라 이념적 편향성이다. 한국교회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 먼저 분단을 지지했고 가장 적극적으로 전쟁수행을 응원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그렇게 이념의 지배를 받은 것은 그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하던 이승만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한 한반도에서 교회가 이념을 넘어서지 못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뼈아프게 확인해주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교회의 친미반공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친미반공주의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한국교회로 하여금 성경적-기독교적 가치관이 아니라 이념에 기반하여 판단하고 행동하게 만들고 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언행을 살펴보면, 그들이 기독교적 사랑과 포용, 그리고 자기희생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 증오심과 편벽됨, 그리고 호전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념을 넘어서지 못하는 종교가 종교로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념의 포로가 된 기독교인이 어떻게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분단과 전쟁에 대한 역사적 빚을 갚을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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