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감정이 넘치다 보니 ‘감동’과 ‘은혜’를 주는 것이면 가짜라도 좋고, 가짜 목사도 좋고, 사이비 이단도 좋고, 가짜 기도도 좋다. 좋은 게 좋다며 표절도, 위조도, 횡령도, 불법도 눈감아 주다 보니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성령의 감동이란 감화감동의 줄임말이다. 성령의 임하고 내주하심을 통해 내적으로 인격의 감화를 받고 외적으로 감동하는 양자를 포괄하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후자는 사라지고 전자도 코끝이 시리고 눈물이 핑 도는 수준의 감동으로 전락했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20년이 넘도록 가짜 언더우드 기도문들이 한국 교회와 SNS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신문과 방송에서도 그것이 가짜인지 모르고 반복하여 인용 보도하고 있고, 블로거들과 유투버들도 끊임없이 퍼 나르고 있다. 노래까지 만들어 예배 시간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 글은 더 이상 두 기도문을 언더우드의 것으로 소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다.

 

가짜 “언더우드의 기도”(1): 정연희의 창작물

나는 3년 전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로 시작하는 소위 “언더우드의 기도”에 대해서 그것은 정연희 씨의 소설 『양화진』(1984, 개정판 1992) 235쪽에 나오는 작문으로서 작가가 상상으로 쓴 허구임을 밝히고 분석했다. 문제의 본문을 보자.

 

 

작가는 이 글이 언더우드가 직접 쓴 것으로 오해되어 널리 퍼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언더우드의 기도로 알고 유통시킬 때 침묵한 점은 이해할 수 없다. 동시에 언더우드 후손들마저 그 영어 번역이나 노래까지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기도문이 유행하는 것을 은근히 즐겼는지도 모르는데, 이 또한 무책임한 태도였다.

둘째, 이 기도의 내용도 문제이다. 이런 수준의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고 저급한 기도문을 언더우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언더우드에 대한 명예 훼손이다. 위 기도문에서 청색 부분을 먼저 보자. 1885년 당시 태평양 횡단 기선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호놀룰루를 거쳐 요코하마까지를 한 달 정도에 안전하게 운행되고 있었다. 기적이 아니었다. 또한 1885년 4월 5일 서울에 온 언더우드가 6월 21일 도착한 스크랜턴 여사를 만난 후 쓴 기도문이라면, 언더우드 목사는 알렌 의사가 원장으로 있는 제중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때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알렌 의사, 언더우드, 헤론 의사, 스크랜턴 의사 부부와 스크랜턴 대부인-은 정부의 호의 속에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선교사들을 ‘양귀’(洋鬼)로 부르며 반기독교 운동이 강했으나, 한국에서는 알렌이나 헤론이 정부 병원의 의사로 당상관에 임명되고 시의로서 고종을 알현하면서 정부 고관들과 어울리고 있었으므로 양대인(洋大人)으로 불렸다. 따라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았다.

적색 부분에서 보듯이 이 기도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보고 싶은 것은 조선인의 속셈, 조정의 내심, 조선심이다. 언더우드는 이런 말을 쓴 적이 없다. 작가 정연희를 비롯한 1980-90년대 한국인의 관심사가 남의 속셈과 내심을 읽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심이나 전(대통령)심을 알아야 출세하던 시절의 산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찌 순종하겠는가? 그것은 맹신과 맹종이요, 독재 정권에 침묵하는 순종이었다. 언더우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선교 전략가로서 독수리처럼 높이 올라가 20년, 30년 후를 전망하면서 한국 복음화의 장기 계획을 세워나갔다.

황색 부분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나온 말들이다. 한국을 흑암, 가난, 인습, 무지, 미신, 성차별이 가득 찬 불모지요 나무 한 그루 없는 미개한 황무지로 보는 관점은 19세기 말 서양인의 동양관이었다. 작가가 아직 포스트콜로니얼 관점이 없었기 때문에, 서구 선교사관을 그대로 수용하여 한국에 대한 젊은 선교사들의 첫 인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이런 작문이 나왔다. 자신과 자신의 문화를 깔보고 서양을 높이는 사대주의 선교사관이다.

따라서 이 기도문은, (1)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이다. (2) 그런 기도를 언더우드가 드릴 수 있었다고 여기는 태도, 그 기도를 읽고 감동과 은혜를 받는 선교관과 문화관이 더 문제이다. 소설에 나오는 허구적 기도를 진짜 기도로 이해하는 독자들도 독해력도 문제이지만, 그 내용이 1885년에 드려질 수 있었다고 상상한 작가와 이를 수용하고 퍼트린 1990년대의 한국 교회의 선교 신학이 더 문제였다.[1]

결국 한국교회의 이런 승리주의적 선교관이 분당샘물교회 교인의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로 이어졌고, 오늘의 혐오와 증오를 낳았고, 한기총을 온존시켰다. ‘가짜라도 감동을 받으면 된다’, ‘모로 가도 대형교회를 세우면 된다’는 대충주의, 감성주의, 성장주의가 오늘 한국교회를 주변부로 몰아내고 꼰대 집단으로 만들었다.

 

가짜 “언더우드의 기도”(2): 누군가의 기도

그런데 5년 전부터 다른 “언더우드의 기도”가 SNS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위의 기도에 감동을 받은 누군가가 새로운 감동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2010년 김옥춘 시인이 쓴 시가 “누군가의 기도”로 소개되더니, 2014년경부터 그 기도 끝에 “언더우드의 기도 낙서장에서”라고 덧붙여서 블로그에 퍼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5월 연세대와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언더우드 어록 캘리그라피 전시회”에서 한 작가가 이 기도문을 언더우드의 것으로 착각하고 작품화하면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소위 “언더우드의 기도”(2)의 전문을 옮긴다. 김옥춘의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시를 어떤 병원에서 저자 이름 없이 붙여 놓았는데, 이를 “누군가의 기도”로 옮겼고, 그것을 언더우드의 기도문으로 다시 바꾼 것이다. 사실 “언더우드의 기도 낙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단어만 보아도 조작임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다 믿지 말고 먼저 의심하기 바란다.

걸을 수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

나·······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과거 “언더우드의 기도”(1)처럼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게 바로 이런 인터넷 공유 과정과 예술화(노래로 만들고 서예 작품으로 전시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를 알리는 작업이 아니라 그를 욕보이는 명예훼손 행위이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실상이다. 감성, 감정이 넘치다 보니 ‘감동’과 ‘은혜’를 주는 것이면 가짜라도 좋고, 가짜 목사도 좋고, 사이비 이단도 좋고, 가짜 기도도 좋다. 좋은 게 좋다며 표절도, 위조도, 횡령도, 불법도 눈감아 주다 보니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성령의 감동(感動)이란 감화감동(感化感動)의 줄임말이다. 성령의 임하고 내주하심을 통해 내적으로 인격의 감화(=변화=성령의 열매를 맺음)를 받고 외적으로 감동(=행동과 실천=성령의 은사로 일)하는 양자를 포괄하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후자는 사라지고 전자도 코끝이 시리고 눈물이 핑 도는 수준의 감동으로 전락했다. 그것을 또 “은혜 받았다”라고 표현한다. 마음에 잠시 울림이 있으면 감동이요 은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주는 설교자가 능력자요 은혜스러운 목회자가 되었다. 말 잘하고 연기 잘하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연기자(performer, entertainer)가 대형교회를 만들자,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으로 통하게 되었고 유명 인사인 셀럽이 되었다.

SNS 시대가 되자 교인들도 덩달아 흉내를 내고 감동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동안 온갖 가짜 감동과 가짜 은혜가 한국 교회에 넘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언더우드의 기도”(1)과 지금 “언더우드의 기도”(2)가 되었다.

가짜가 없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가짜 “언더우드의 기도”가 사라질 때 교회는 교회답게 될 것이다. 아직도 “언더우드의 기도”를 자신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분은 찾아서 지우고, 그런 글이나 영상을 발견하면 댓글로 바르게 알려주기 바란다. 그대로 두는 것은 한국 기독교의 수치이다.


[1] 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새물결플러스, 2016), 145쪽 이하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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