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 교회는 사도행전 17장 22절의 ‘δεισιδαιμονεστέρους’를 ‘종교심이 많은’으로 번역하고 읽는다. 그러나 목회자나 교인이나 교회 정치나 영성을 보면 종교심이 많다기보다는 이 단어 어원의 의미처럼 ‘여러 귀신을 공경하는’ 모습이다. 물량의 맘몬신, 권력의 바알신, 세습의 조상신에 절하고, 카드 면벌부나 설교집 면벌부를 파는 미신적인 교회가 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교심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우상 숭배, 귀신 숭배, 조상 숭배 뿐이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사도행전 17장 22절은 바울이 아테네 철학자들 앞에서 행한 유명한 설교의 일부분이다. 두 한글 번역본을 비교해 보자. 50년 동안 어휘나 번역이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언덕(출처: wikipedia)

 

개역 성경에 있는 ‘종교성이 많도다’의 원어는 ‘δεισιδαιμονεστέρους’(데이시다이모네스테루스)이다. 어원적으로는 ‘very fearful of gods’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매우 미신적인’(too superstitious) 혹은 ‘아주 종교적인’(very religious)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 왔는지 그 번역사를 아는 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주요 역본을 비교해 보자.

 

 

19세기 해외 선교와 19세기 후반 비교종교학 연구 결과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확대되면서 20세기 첫 역본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개역본인 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에서 드디어 ‘δεισιδαιμονεστέρους’를 ‘too superstitious’(매우 미신적인)나 ‘somewhat superstitious’(약간 미신적인)를 ‘very religious’(아주 종교적인)로 바꾸었다. 그 영향은 일본어 대정 개역본의 영향과 함께 한글 번역에는 1938년 개역에 반영되었고, 이후 자리를 잡았다. 곧 1901년부터 타종교인에 대해서 미신적이라거나 이방인(pagan)이라 하지 않고 종교적이라거나 타종교인(heathen) 혹은 비기독교인(non-Christia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경 번역은 선교 신학과 타종교 신학에 의해 바뀐다. 당연히 다른 학문에 의해서도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원문의 뜻이 더 밝혀지고, 번역은 현대인의 이해에 적합하게 바뀐다. 성경을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고,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하다. 2020년 대한성서공회가 발행할 예정인 『새한글 성경전서』의 번역도 “종교심이 많습니다”로 번역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 본문을 다음과 같은 새번역으로 읽으면서,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기 이전 이방인의 종교성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생각의 패러다임 전환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후대의 해석을 바울에게 덮어씌우는 오류가 된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행 17:22-24)

바울이 비록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긴 것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δεισιδαιμονεστέρους’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종교심이 많다고 해석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제임스 레게(James Legge)를 연구한 노먼 지라르도(Norman J. Girardot)가 이러한 인식을 “바울 패러다임”(the Pauline Paradigm)이라고 부른 것은 KJV(1616)이나 옥스퍼드판 RV(1881)을 읽지 않은 까닭이다. 단 지라르도가 막스 뮐러(Max Müller)로 대표되는 19세기 말 비교종교학자들의 ‘비교 작업’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긴 것으로 본 것은 옳았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나 레게나 뮐러 등 19세기 말 개신교 비교종교학자들은 기독교의 우월성, 궁극성, 최종성을 포기한 적이 없다.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런 기독교의 우월성과 최종성을 믿은 자들이었고, 1900년대 와서 변화된 선교 신학인 성취론[2]을 수용하여, 유교나 불교와 같은 타종교의 종교심에 대해서 예의를 가지고 접근했다. 비록 구역성경(1911)에서는 ‘귀신 공경하기를 심히 하는’으로 번역했지만,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전후에 변한 선교신학과 비교종교학을 수용하여, 개역(1938)에서는 ‘종교성이 많도다’로 번역했다. 기존 종교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겼을 때 그 종교성은 인정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완고해진 박형룡의 근본주의는 에든버러의 성취론마저 거부하고 타종교에 대해서는 정복 외의 다른 태도를 용인하지 않았다. 교회 성장과 더불어 기독교 승리주의의 십자군 정신은 캠퍼스에서부터 기도원까지 차고 넘쳤다. 겉으로는 타종교를 기독교로 대체하자고 주장했으나 실제로 뒤에서는 타협하는 혼합주의로 갔다.

오늘 한국 교회는 사도행전 17장 22절의 ‘δεισιδαιμονεστέρους’를 ‘종교심이 많은’으로 번역하고 읽는다. 그러나 목회자나 교인이나 교회 정치나 영성을 보면 종교심이 많다기보다는 이 단어 어원의 의미처럼 ‘여러 귀신을 공경하는’ 모습이다. 물량의 맘몬신, 권력의 바알신, 세습의 조상신에 절하고, 카드 면벌부나 설교집 면벌부를 파는 미신적인 교회가 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교심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우상 숭배, 귀신 숭배, 조상 숭배 뿐이다.


[1] Norman J. Girardot, The Victorian Translation of China: James Legge’s Oriental Pilgrimag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284-85.

[2]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가 채택한 공식 타종교 신학으로서,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계시의 흔적(예, 유일신관)이 있거나 기독교가 수용할 수 있는 가르침이나 의례가 있다고 보고, 예의로 대하며 공존하면서 완전한 기독교로 그 종교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배타주의나 다원주의를 배격하는 포용주의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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