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의 반대말은 ‘세속적’이 아니라, 불합리한, 불법적, 비양심적, 비상식적인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비영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논문을 쓸 때 표절하는 것이 비영적이요, 교회를 지을 때 건축법을 어기는 것이 비영적이며,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편법으로 받는 것이 비영적이며, 교회 헌법을 어기고 세습하는 것이 비영적이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개역개정본, 로마서 12:1)

한국교회에서 가장 오용하는 단어가 ‘영적’이라는 말과 ‘예배’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이 함께 나오는 로마서 12장 1절을 제대로 이해하면, 한국 교회가 바뀔 것이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선교적 교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영적 예배’의 번역사

이 구절의 번역사를 통해 ‘영적 예배’의 뜻을 살펴보자. 원어를 몰라도 여러 번역본만 살펴보아도 도움이 된다.

→ “當然之役” (1852, 문리본) → “당연한 역사”(1887, 로스본)

→ “당연한 역사” (1900, 구역 임시본) → “당연한 예법”(1906, 구역 공인본)

→ “합리적 예배”(1938, 개역본) → “영적 예배”(1956, 한글개역본)

→ “진정한 예배”(1972, 공동번역본) → “합당한 예배”(2001, 새번역본)

 

첫째, 원어 로기켄(λογικην)[1]은 19세기에는 ‘합리적이고 당연한’(reasonable)으로 번역되었으나, 20세기에 와서 영적인(spiritual)으로 다르게 번역했고, 21세기에 와서 다시 19세기 이해로 돌아가 합당한(rational)으로 번역하고 있다. 왜 20세기에 들어와서 그 단어를 ‘영적인’(spiritual)으로 번역했는지, 주석사 학자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번역자들이 근대성과 세속성에 대한 반발로 그렇게 한 듯하다.

둘째, 라트레이안(λατρείαν)은 한문과 한글에서 ‘일’(섬기는 사역)에서 ‘예법’(禮法)으로 바뀌었다가 ‘예배’로 정착되었다. 영어는 service가 섬김과 예배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므로 좋은 번역이다. 한글에서는 문리본을 따라 ‘역사’(役事)로 하다가 1906년 첫 공인역 신약전서에서 놀랍게도 ‘예법’(禮法)을 채택했다. 번역자들이 이 단어(λατρείαν → service → 役事)를 놓고 고심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1938년 개역 성경에서는 앞 단어는 ‘합리적’으로 두고 뒤 단어만 ‘예배’로 번역하여 일종의 타협책을 찾았다. 그래도 해방 이전 개역까지는 “합리적 예배”였다.

 

1887년 3월,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가 발행한 <예수셩교젼셔>. 평안도 의주 청년들이 번역을 주도하면서, 역본 곳곳에 평안도 사투리가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BBC 코리아

 

로마서 12:1의 여러 번역본 비교

설교자나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원어 성경으로부터 스스로 사역(私譯)을 시도하거나. 기존의 여러 역본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번역본 비교를 통해 우리는 ‘로기켄 라트레이안’을 해방 이후 개역이 바꾼 것처럼 ‘영적인 예배’라고만 좁게 생각하기보다는, ‘마땅하고 합당하고 합리적인 일’로 이해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메시지』 성경처럼 자고, 먹고, 일하고, 하루하루 사는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물로 드리는 것, 곧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섬김이요 일이요 예배라는 이해가 필요하다. 바르게 사는 일상의 일이 예배이다.

 

영적(λογικην) = 합리적이고 마땅한

‘영적’의 반대말은 ‘세속적’이 아니라, 불합리한, 불법적, 비양심적, 비상식적인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비영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논문을 쓸 때 표절하는 것이 비영적이요, 교회를 지을 때 건축법을 어기는 것이 비영적이며,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편법으로 받는 것이 비영적이며, 교회 헌법을 어기고 세습하는 것이 비영적이다. 즉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표절, 불법, 편법을 동원하는 것이 세속적이고, 그것은 결국 탄로가 나서 처벌을 받고 손해를 보기 때문에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이고 비영적이다. 재벌 회사나 북한 정권처럼 세습을 통해 자기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는 세속적 행위는 한국 교회의 신용도를 추락시키고 전도의 문을 막기 때문에 비영적이다.

 

예배(λατρείαν) = 섬기는 일

요한복음 4장 24절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에서 영은 ‘프뉴마’(πνεύμα: spirit)이고, 예배하다는 ‘프로스퀴눈타스’(προσκυνοῦντας: worshipping)이다. 이것은 예배의 자세와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 로마서 12장 1절의 라트레이안(λατρείαν: service)은 사역, 일, 섬김이다. 우리 몸 전체, 삶 전체를 하나님께 살아 있는 희생물로 바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다.

주일 예배만 예배가 아니요 교회 일만 영적인 것이 아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내가 몸을 낮추어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일이 오늘 내가 하나님을 바르게, 합리적으로, 마땅히 섬기는 것이요 예배이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게 된다. 만사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이요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하는 교회가 선교적 교회이다.

 

맺는 말

교회는 세상을 위한 존재이지, 세상이 교회를 위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므로 독생자를 주셨고 교회를 만드셨지, 교회를 사랑하여 독생자와 세상을 준 것이 아니다. 교회는 ( ) 안에 넣어도 된다. 하나님 → 교회 →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 세상이 만나는 자리에 교회가 가서 섬겨야 한다.

 

(제공: 옥성득)

 

현재 한국교회는 2번에서 3번으로 이동했다. 하나님이 사라지고 교회가 세속화된 공간이다. 탐욕과 권력과 돈과 음욕에 빠진 한국 교회가 3번 공간에서, 한기총, 세습 교회, 표절 교회와 함께 스러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4번으로 이동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일하시는 세상 속에서 주를 섬기는 자들이 늘고 있다.

제도 교회를 떠나 4번에 간 자들을 “가나안 교인”이라 한다. 올해 그 비율은 25% 정도에 달한다. 전체 교인을 1,000만으로 잡으면 250만이 3번의 뜨거운 냄비에서 뛰어 나와서 4번의 가나안 영역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3번 현상에 놀란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이 2번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만, 이미 낡은 모델이라 교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일부 목회자는 5번 공간에서 성경만 가르치자고 한다. 문제는 그곳에는 세속도 적지만 하나님도 안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은 세상이다. 1번의 공간으로 가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missional church가 된다. 30-40대 교인과 목회자들이 그 가슴 벅찬 공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세상과 부딪치고 있다. 그곳이 영적인 예배, 합당한 일을 할 공간이다.


[1] 같은 어원의 영단어로서 logical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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