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핵심 사역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를 세우는 것, 즉 성도 각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것이며, 이를 위해 자주 모여 서로 나누고 배우고 격려해야 합니다(히 11:25-26). 우선은 예수님의 말씀(특히 산상수훈!)을 함께 읽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예수님의 열두 사도 파송으로 시작된 복음 전파의 기간이 벌써 2천 년이 되어갑니다. 아마도 첫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 완성의 시기를 물었을 때,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다”(행 1:7; 막 13:32)라고 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에 복음 전파의 기간이 연장되면서(벧후 3:9),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와 세상이 관계 맺는 방식에 다양한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제자도의 핵심 곧 ‘예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 제자도가 세상에서 펼쳐지는 모습이 다양할 수 있음을 오늘날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정치나 문화와 별로 상관없이 교회 안에서 서로 믿음 소망 사랑을 격려하며 살아갔습니다. 이것을 문화에 대한 ‘분리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후 2세기까지의 초기 교회가 주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주후 4세기부터 중세가 끝나는 14세기까지 유럽에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 체제가 로마제국 전체를 문화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기독교의 원리를 사회 전체에 부과하고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문화에 대한 ‘지배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이어받아 마틴 루터가 대표적으로 주장한 ‘두 왕국 모델’이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으로 등장했습니다. 두 왕국 이론이란 신앙의 왕국인 교회와 세상 왕국인 국가를 모두 하나님이 통치하시지만, 하나님이 두 나라를 다스리시는 통치 원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편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능력을 통한 복음적 통치가 있고, 다른 쪽에는 이성과 양심의 법을 통해 악을 억제하시고 인류를 보존하는 시민적 통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왕국 모두에 속하므로, 개인적으로는 먼저 영적인 통치에 복종하여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불신자들과 동등한 시민의 신분이 되어 그들과 동일하게 십계명에 나타난 정의와 이웃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

또 어떤 사람들은 신자에게 주어진 신앙의 원리를 창조세계 전체에서 구현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입장을 가졌습니다. 소위 ‘변혁 모델’입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 전반이 왜곡되었으나,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해 출현한 교회는 그 왜곡을 치유하고 회복하여 창조세계의 각 영역이 본래 의도되었던 이상적인 모습을 실현하도록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여러 가지 지위와 역할을 맡아 일하면서, 자신이 속한 영역이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실현하도록 치유하고 변혁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모델들이 발전하게 된 이유는 시대마다, 사회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할 상황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에는 어느 하나의 모델이 주류가 되곤 했습니다. 오늘날 2천 년의 교회사를 돌아보면 어느 하나의 모델만이 최선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각 모델이 부분적으로 유용하거나 필요한 상황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2] 팀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각각의 모델이 그 핵심에 있어서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인정해야 하는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와 세상에 대한 독특한 통찰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각각의 모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겸손하게 다른 모델들의 탁월함과 지혜로움을 발견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더 높이도록 해야 한다.[3]

세상 안에서 교회가 제자도를 추구하는 방식에 다양한 모델이 존재해왔다는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소명의 모습도 다양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성령님이 어떤 사람은 수도자처럼 분리 모델의 삶을 살도록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활동가로서 사회의 변혁을 위한 운동에 애쓰도록 부르시며, 어떤 사람은 공무를 공평무사하게 실행하도록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사업의 경영자나 직원으로서 의롭게 일하게 하시며, 어떤 사람은 교회를 통한 복음 전파와 제자 양육, 구제와 봉사를 행하도록 부르십니다.[4] 개인뿐 아니라 또한 교회도 주된 부르심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선교적인 교회가 있고, 좀 더 사회 참여적인 교회가 있고, 좀 더 봉사와 구제에 힘쓰는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부르시는 성령님의 주권에 순종하면서 다른 지체들과 교회들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부르심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성령의 부르심의 외형은 다양하지만 성령이 이루시고자 하는 제자도의 공통적인 요소는 뚜렷합니다(요 14:26).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성령님께 귀 기울이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경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초점을 명확히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배우고 마음에 품고 실천하는 일이 초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예수님의 사상을 배우고, 예수님의 세계관을 가지며, 예수의 말씀대로 살려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속으로부터 변화시키시고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펼치실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 사역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를 세우는 것, 즉 성도 각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것이며, 이를 위해 자주 모여 서로 나누고 배우고 격려해야 합니다(히 11:25-26). 우선은 예수님의 말씀(특히 산상수훈!)을 함께 읽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적용하고 실천하다 보면, 성령님이 각 사람을 부르시고 이끌어 가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의 소모임은 이런 과정을 함께 진행할 수 있는 핵심 구조입니다. 이런 모임의 취지는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방법론 도입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교회를 이끄시고 변화시키시도록 일하실 공간을 제공해 드리는 일입니다. 가야할 때와 방향을 미리 알아야겠다고 조르며 안절부절못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의 시간이 있다고 믿고 성령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현명한 지도자라면 성령님이 성도 각 사람을 고유하게 빚어 가심을 믿고 성령님의 손길을 주목하며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목양 사역을 할 것입니다. 각 사람이 그의 고유한 은사와 부르심을 분별하도록 돕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도움을 베풀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경적 원리를 가르치고, 어떤 이에게는 관련된 책이나 정보를 제공하고, 어떤 이에게는 비슷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따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소개해 줄 것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 공동체를 섬기도록 부름 받으므로 그런 섬김의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동소이하게 여기거나 ‘소명에 대한 00가지 원리’같은 것들을 만들어 만인에게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각 사람을 고유하게 다루시는 성령님을 믿고, 함께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순종해 보고, 관찰해 보고, 성찰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가도록 안내해야 합니다.

이러한 소명 개념을 가진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소명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거나, 특정한 소명(예를 들면, 전도자의 소명이나 중보기도자의 소명)만을 높이거나 이상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로 교회 밖에서 일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부름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부름 받는 이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지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부름 받기도 합니다. 성령님이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으로 교회가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되게 하십니다. 이런 믿음과 분별의 과정이 없다면 ‘교회를 세운다’, ‘약자를 섬긴다’, ‘사회를 변혁한다’ 등 일반적인 선한 대의를 내세우는 것도 성령님의 주권을 배제하는 불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공적인 영역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해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과는 달리 교회가 소명을 너무 좁게 교세의 확장과 관련된 것으로만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역할과 지위를 맡은 그리스도인이 많아졌지만, 그런 영역에서 제자도를 발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자신의 공직과 일상의 영역에서 실천하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성령님께 여쭙고, 능력과 지혜를 간구하고, 실천해보고, 결과를 관찰하고, 성령님의 일하심을 성찰해 보고, 그 경험을 다른 성도와 함께 나누고 분별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영역에서는 목회자나 다른 권위자가 정답을 말해줄 수 없습니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 사람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직접 받으며 미지의 영역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때, 이전 세대 선배들의 사례나, 다른 나라의 신실한 사람들의 사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귀 기울이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소명을 스스로 발견하고 추구해 나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질 때, 한국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성숙에 이르게 되며 세상에서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Son of God’ 스틸컷.


[1] 최근에 두 왕국 모델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입장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데이비드 반 드루넨의 책들을 통해 소개되었다.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윤석인 옮김(부흥과개혁사, 2012: 원서 2010)와 『자연법과 두 나라』 김남국 옮김(부흥과개혁사, 2018: 원서 2010) 참조.

[2]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 유형을 소개하고 최근의 평가들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자료로서는, 팀 켈러, 『팀 켈러의 센터처치』, 오종향 옮김(두란노, 2016: 원서 2012)의 408-508 부분이 추천할 만하다.

[3] 팀 켈러, 『팀 켈러의 센터처치』, 494.

[4] 또한 한 사람에게 다양한 영역의 소명이 동시에 주어진다. 한 사람에게는 부모로서의 소명, 이웃을 돌보는 소명, 직장인으로서의 소명, 친교 모임의 일원으로서의 소명, 교회 일원으로서의 소명이 함께 주어질 수 있다. 소명들은 한번 부여된 이후 고정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계속 변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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