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공동 활동을 작가로서의 자기 경험에 비추어 탁월하게 묘사했던 사상가가 영국의 작가 도로시 세이어즈입니다. 그녀는 20세기 기독교를 빛낸 명저 『창조자의 정신』에서 “인간의 정신과 인간이 남긴 작품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 구조는 우주의 절대적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필연적인 존재 법칙을 통해,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일치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본문 중)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목사)

 

 

‘혼추족’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지난 추석 때 우리나라 인구 5명 중 1명은 혼자서 추석을 보냈습니다. 마음 편히 홀로 쉬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특히 미혼남녀 10명 중 7명이 혼추족이었습니다. 청년과 노인을 중심으로 1인 가구가 전체 가구 수의 30%에 육박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혼자서 영화도 보고 밥집도 다니고 여행도 다닙니다. 사회학자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되어가는 원인을 개인주의 강화, 과다한 정보, 스트레스 누적, 타인과 어울리며 겪어야 하는 에너지 소모 기피증 등으로 봅니다. 사실 SNS 접속 시간의 폭증도 소통의 증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인공지능 시대로 본격 진입하게 되면 아날로그 휴먼터치 없이도 수많은 정보와 감각을 언제든지 끌어 쓸 수 있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혼자서 일도 하고 여가도 즐기려고 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2:18)라고 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 하늘과 바다와 땅, 온갖 동식물을 만드시며 보시기에 ‘참 좋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직설하신 대목이지요. 그래서 마음에 걸립니다. 나 홀로 아담은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존재 이유는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의 공동체적인 본성을 오롯이 드러내며 만물을 잘 돌보는 데 있습니다. 아담 혼자서는 하나님의 거울이 될 수 없습니다. 바다의 존재를 가리키는 실마리가 되려면 호수, 아니 최소한 연못의 모양이라도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아담을 도울 짝이 있어 서로 소통하며 할 일을 공유해야, 그들은 비로소 창조주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일도 혼자서 하신 적이 없던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떤 피조물도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잘 아십니다.

 

표지. 사진 속 인물은 도로시 세이어즈.

 

이러한 하나님의 공동 활동을 작가로서의 자기 경험에 비추어 탁월하게 묘사했던 사상가가 영국의 작가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 1893-1957)입니다. 그녀는 20세기 기독교를 빛낸 명저 『창조자의 정신』(IVP 역간)에서 “인간의 정신과 인간이 남긴 작품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 구조는 우주의 절대적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필연적인 존재 법칙을 통해,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일치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정신(mind)에 담긴 기억과 이해와 의지가 구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는 세 단위라고 분석한 것처럼, 세이어즈는 작가의 작업 속에 담긴 창조의 아이디어와 에너지와 힘 또한 서로 떼어질 수 없는 공동의 세 가지 활동이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한 개인이 생각하는 행위도 알고 보면 기억과 이해와 의지가 각자 따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 돕는 공동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행위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개인이 혼자서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도 그 안에 아이디어와 에너지와 힘이 각자도생 방식으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 같이 공동 작업을 거쳐 구체화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자기 사고 혹은 자기 행동의 삼위일체적 구조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세이어즈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기억, 이해, 의지, 혹은 작가 안에 있는 아이디어, 에너지, 힘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원형이 되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공동 작업이 보이지 않느냐고 속삭입니다.

세이어즈에 따르면 하나님도 혼자서는 일을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녀는 성부 하나님을 작가의 창조적 아이디어로 묘사합니다. 예를 들면 작가가 “나는 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릎을 치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다름 아닌 성부라는 것이지요. 그녀는 탁월한 작가라도 아이디어가 없이는 창작을 시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책을 쓰는 내내 그리고 집필을 마친 후에도 작가에게는 처음과 같은 생각이 줄곧 떠나지 않고 맴돌기 마련입니다.[1] 이처럼 아이디어가 없이는 어떤 일도 성사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또 아이디어만으로 일이 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아이디어는 하나의 완전한 실체이면서 알파이자 오메가와 같은 것이지만, 그 실재로서의 아이디어를 명확히 나타내려면 작가는 시간을 들여 손에 펜을 쥐고 원고지에 꾹꾹 눌러 써 내려가야 합니다. 한 권의 책을 시공간적 존재로 구체화하는 작가의 치열한 고투야말로 만물의 로고스인 성자 하나님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지요. 만일 어떤 작가가 “나 지금 책을 쓰는 중이야”라고 말하고 있다면 성자의 계절이 한창인 때입니다. 그렇지만 꼭 성자만의 계절은 아닌 것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17)는 주님의 말씀처럼, 아이디어와 에너지는 언제나 공동으로 일합니다. 성부도 성자도 각기 혼자 일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에너지와 아이디어는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적 힘입니다. 작가가 책을 다 쓰고 나면 그 안에서 창조적 힘이 발현됩니다. 그 힘은 먼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 자신에게 되돌아오지요. 이 힘은 되돌아옴으로 아이디어와 에너지와 일체를 이룹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독자가 되는 것이지요. 자기 작품의 애독자로 존재하는 작가를 가리켜 우리는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고대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성령이 성부와 성자를 이어주는 교제의 끈이었다면 현대의 세이어즈에게 성령은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전달하는 제3의 힘입니다. 아이디어와 에너지는 구체화를 통해서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제3의 힘을 거치면서 비로소 더 깊고 더 온전한 하나가 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육필원고.

 

불과 51세의 나이로 폐렴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수천 쪽에 달하던 자신의 원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듬고 또 다듬었던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에게 누군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가정해 볼까요. “원고에 대해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말하던 프루스트, 지금 원고를 쓰는 중이라고 말하던 프루스트, 지금 원고를 읽고 있다는 프루스트, 그중에 누가 진짜 프루스트인가요?” 그의 대답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그 셋 모두 진실로 프루스트입니다. 생각으로서의 책도, 글로 쓰인 형태의 책도, 읽히는 책도 똑같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인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을 것입니다. “사실 제 기억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이해와 의지도 같이 동행했지요. 제 기억 혼자 해낸 일이 아니거든요. 제 이해와 의지가 거들지 않았으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을 테니까요.”

이처럼 인간은 철저히 혼자 일할 때조차 사실은 혼자서 일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창조주 하나님의 아이디어와 에너지와 힘이 공동체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드넓은 바다가 혼자가 아닌 것처럼 작은 호수도 혼자가 아닙니다. 심지어 연못의 물 한 방울조차도 산소와 수소로 결합(H2O)된 공동체이지 혼자는 아닙니다. 아담이 자신을 홀로 일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로 느낄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깨우치시고자 그의 존재 일부로 돕는 자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과 비슷하게 창조자의 정신은 한 작가 안에만 역사하지 않고 두 작가의 우정을 통해 상호 자극하며 공동으로 작업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톨킨(좌)과 루이스(우).

 

영국의 작가 톨킨(J. R. R. Tolkien, 1892-1973)과 루이스(C.S. Louis, 1898-1963)가 그런 사이였습니다. 1931년 루이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톨킨은 『호빗』의 일부를 루이스에게 읽어 주었고, 루이스는 『순례자의 귀향』의 일부를 톨킨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톨킨은 엄청난 창의성의 소유자였고, 잎을 자세히 그리는 데는 능숙했지만, 나무를 그리는 데는 좀 서툴렀던 작가였습니다. 때때로 그는 자신감을 잃었고 그의 글쓰기는 오래 중단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옥스퍼드의 동료 교수였던 절친 루이스는 그가 써 놓은 원고를 일일이 읽으며 반응해주고 조언과 격려를 해주곤 했습니다. 1944년에는 아예 매주 월요일 오전마다 톨킨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반지의 제왕』 시리즈입니다.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 이야기』에도 톨킨의 애정 어린 조언이 담겨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2] 이렇듯 세기적인 천재들의 역작으로 알려진 작품들도 알고 보면 연약하기 짝이 없는 두 친구가 서로 도우며 이루어낸 결실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서로에게 제3의 힘이 되어 각자의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만개한 것이지요. 두 거장의 신앙과 우정이 어우러진 수많은 작품들은 마치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처럼 자라 전 세계 남녀노소에게 유익을 주며 꿈을 꾸게 하는 공동의 선이 되었습니다.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1954)

 

명절에도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늘어나며 가족의 의미가 퇴색해 가는 우리 세대를 생각하다 보니 근대미술사에서 가장 고독했던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에게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 태현, 태성을 데리고 1·4후퇴 때 원산을 떠나 제주도 서귀포까지 흘러오게 됩니다. 저는 오래전, 네 식구가 살았던 그의 집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정방폭포에서 멀지 않은 어느 초가집 끄트머리에 붙어있던 조그만 방과 부엌이 달랑 전부였지요. 이렇게 작은 곳에서 어찌 네 식구가 같이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중섭은 그 서귀포 시절을 가장 그리워했습니다. 일 년도 안 되는 그 시공간이 자기 일생 중 혼자가 아니었던 유일한 시절이었기 때문이지요. 그의 불후의 명작 「길 떠나는 가족」을 보면 이중섭 혼자서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작품은 네 식구가 같이 그린 공동의 소산입니다. 아무리 남편이 천재 화가였어도, 그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해 삶은 고구마 한 조각을 내밀던 사랑하는 아내가 없었다면, 모래사장에서 아빠와 소꿉장난을 하던 천진한 자식들이 없었다면, 이런 그림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 이중섭이 아이디어가 있었다 해도 마사코의 에너지가 없었더라면, 태현이와 태성이가 힘이 되어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나오지 않았을 작품이지요. 그 후 제주도를 떠난 이중섭은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일본에 남겨둔 가족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염원을 끝까지 간직하며 고투하다가,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친구 시인 구상(具常, 1919-2004)에게 이제는 자신도 세례를 받고 싶다고 고백하고는 40세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그가 남긴 「길 떠나는 가족」을 보고 또 봅니다.

혼밥족, 혼행족(혼자 여행하는 사람들), 혼추족 등 신조어가 쏟아져 나오며 삽시간에 모두 혼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도 혼자가 아니신데 어찌 우리가 혼자일 수 있을까요? 나는 이제 혼자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혼자서 일하며 살아내겠다고 독한 마음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가 “너는 이제 혼자야”라고 속삭이거나 “혼자 있는 게 좋지 않아?”라고 꼬드길 때면 정말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심이 어떨지요. 인간은 혼자서는 사는 것 같이 살 수 없고, 서로 하나 될 때에만 살맛도 일할 맛도 나도록 지어진 존재이니까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가을에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읽도록’ 편지를 보내심이 어떨지요. 한동안 소원했던 가족과 친구, 동료와 이웃에게.


[1] 도로시 세이어즈, 『창조자의 정신』(IVP 역간), 57.

[2] 알리스터 맥그라스, 『C.S. LEWIS, 별난 천재, 마지못해 나선 예언자』(복있는사람 역간), 233-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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