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소금이 맛을 잃게 되는 모습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사상은 어느새 다 희석되어 빠져나가고 오래된 습관들과 그럴듯한 종교적 지혜나 유머만 가득하게 되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짠맛은 점점 사라지고 기성 종교인으로서의 쓴맛만 남게 됩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모든 땅 위의 일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혐오하고 불쾌하게 여기시는 부패한 것들이 되어 버립니다.(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11 복 있도다, 너희들이! 그들이 나 때문에 거짓말을 하며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너희에 대해 모든 악한 것을 말할 때. 12 기뻐하고 뛸 듯이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보상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이처럼 너희 앞에 (왔던) 예언자들을 핍박하였다.

13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1] 무엇으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다, 밖에 던져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 외에는.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2] 산 위에 놓인 도시는 감추어질 수 없다.[3] 15 또 사람들이 등에 불을 켜서 그것을 되[4] 아래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둔다. 그리고 그것은 집 안의 모든 것들을 비춘다. 16 이처럼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위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5] 하여라.(마태복음 5:11-16)

 

8복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소명을 받아 존재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8복 말씀들이 3인칭 복수형(‘그들’)의 축복문들이었다면, 이 말씀들은 2인칭 복수형(‘너희들’)으로 선언됩니다. 11-12절의 말씀은 8복 말씀과 소금과 빛 말씀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2인칭 복수형 축복문의 형식으로서, 첫 부분을 헬라어로 읽어 보면 앞에 오는 8복 말씀과도 운율이 맞고(‘마카리오이~’, ‘복 있도다’), 뒤에 오는 소금과 빛의 말씀과도 운율이 맞습니다(‘~에스테’, ‘너희는 ~이다’).

11-12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세상에서 소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핍박과 고난이 따를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 가르침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6] 예수님이 왕이시지만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십자가라는 방식으로 왕이 되셨던 것처럼, 제자들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소금과 빛이 되는 소명을 이루는 방식도 세상의 방식인 힘이나 강압적인 지배가 아니라, 온유하게 진리를 말하고, 반대하는 원수도 포용하며 사랑으로 대하고, 의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에 고난이 따릅니다. 모든 고난이 참된 제자도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지만,[7] 참된 제자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돌보시는 섭리 안에서[8] 핍박과 고난이 허락될 수 있음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고난과 함께 제자들에게는 어떤 어려움 안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성령님의 위로도 함께합니다.[9]

13절, 땅의 소금 말씀은 제자 공동체의 소명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면서, 제자 공동체의 본질이 되는 특성을 잃지 말라고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소금이 가진 두 가지 기능은 짠맛을 내는 것과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소금이 짠맛을 내는 역할을 언급하셨는데, 그것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양한 음식들에 비유한 것입니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땅의 모든 일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차려지는 요리들과 같은 것이고, 그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일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감사의 예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예배가 되도록, 그 일들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이 되어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덴마크의 화가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1834~1890)의 작품 <Sermo montanus> (출처: Wikipedia 갈무리)

 

그런데, 주님이 염려하신 것은 소금이 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순도 높은 소금은 맛을 잃게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소금에는 불순물이 많아서 습기가 차면 소금기는 녹아서 흘러나가고 쓴맛만 남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 소금을 다시 짜게 만들기 위해 쓴 소금 더미 위에 좋은 소금을 부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쓴 소금을 내다 버리고 새로 좋은 소금을 창고에 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소금이 맛을 잃게 되는 모습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사상은 어느새 다 희석되어 빠져나가고 오래된 습관들과 그럴듯한 종교적 지혜나 유머만 가득하게 되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짠맛은 점점 사라지고 기성 종교인으로서의 쓴맛만 남게 됩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모든 땅 위의 일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혐오하고 불쾌하게 여기시는 부패한 것들이 되어 버립니다.[10]

소금 말씀이 경고의 말씀이라면, 14-16절의 빛 말씀은 소명 부여의 명령인 동시에 약속의 말씀입니다.[11]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가 세상에 빛을 비추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등대와 같은 이미지로서 성경에는 ‘산 위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나옵니다(14절). 예수님의 이 말씀(14절)은 예언자 이사야서의 유명한 예언을 상기시킵니다.[12] 그 예언은 이스라엘이 마지막 날에 산 위에 우뚝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 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세상의 평화를 이룩할 길을 배우기 위해 그 도시로 올라가는 환상이 제시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 위에 놓인 성전 도시(폴리스)가 되어 세상의 도시들에게 빛을 비추라는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이것은 각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숙해질 뿐 아니라, 그들이 서로에게 종이 되어 서로를 사랑하는 새로운 사회를 이룸으로써, 오늘날 인류 최상의 제도로 신봉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훨씬 뛰어넘는 신선한 아가페와 희년의 도시를 이루라는 것입니다.[13]

또 15-16절에서는 집안에 등불을 켜면 그릇으로 덮어두지 않고 집안 전체를 비출 수 있는 곳에 둔다는 짧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빛은 제자 공동체가 발휘하는 광채인데, 그것은 제자들이 세상을 위해 선행을 실천하는 빛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호의와 복을 전파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존재였습니다.[14] 하나님의 은혜는 허공에서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왔고, 이제 교회를 이룬 각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과 함께 몸으로 행하는 실천을 통해 세상으로 빛처럼 쏟아져 나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다른 모든 명령과 마찬가지로 명령이면서 동시에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인 각 사람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한 걸음씩 걸어갈 때, 이 약속이 우리를 통해 놀랍게 성취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핍박 예고, 막 13:9-15)과 사도행전의 상징적인 장면(2-4장, 일부 백성에게는 칭찬을 받지만 통치자들에게는 위협을 받음)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현실적인 목표는 세상을 기독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이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거룩한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삶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실천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할 때, 각 사람이 성숙한 제자가 되어 가고 성숙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즉, 개인의 소명(자신의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제자로 사는 것)과 교회의 소명[새로운 아가페와 희년의 삶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공동체(폴리스)를 이루는 것]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대한 위의 설명을 한번 읽고 이해하셨다면, 설명은 옆에 내려놓고 말씀으로 돌아가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같은 말씀을 1주 혹은 2주 동안 매일 반복해서 읽고 경청하시기를 권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이 내 생각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의 감정과 기억에까지 적셔 들게 하면서 이 말씀에 의해 나의 속사람이 새롭게 형성되게 해 달라고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여 확실히 믿으시고,[15] 성령님이 지금 내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내면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성령님과 대화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마지막에는, 오늘 나의 소명의 자리(직장, 학교, 교회, 가정 등)에서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할지 여쭈어 보고, 한 가지 구체적인 지시하심을 받고 기도를 마치십시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그 지시하심대로 실행하며 성령님이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 살펴보십시오.


[1] 헬, 바보가 되다, 맛이 밍밍하다.

[2] 사 60:1-3.

[3] 사 2:2-4.

[4] 측량하는 그릇

[5] 헬, 영광을 돌리게

[6] 마 10:16-39; 16:24-27.

[7] 벧전 2:20.

[8] 눅 12:7.

[9] 요 14:27; 빌 4:6-7.

[10] 사 1:11-14.

[11] 히브리어 문법학자 게세니우스는 하나님의 명령이 실현 불가능한 것에 대한 명령인 경우 그것이 약속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110.c). 또한 관련하여 이중 명령 구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게세니우스, §110.f). 서로 관련된 두 가지 명령이 연속해서 나올 때, 첫 번째 명령은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고, 두 번째 명령은 성취에 대한 약속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절로 창세기 12:1-2, 17:1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히브리식 구문의 뉘앙스를 고려하면, 십계명의 명령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신적 명령들은 명령인 동시에 성취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2] 사 2:2-4.

[13] 눅 4:16-21.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는 노예들의 해방이 일어나는 희년(레 25장)을 의미합니다.

[14] 창 12:1-3.

[15] 렘 31:33; 겔 36:26-27; 요 7:38-39; 행 2:38; 롬 8:9; 고전 6:1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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