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안락사가 존엄한 죽음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바이다. 존엄사 및 존엄한 죽음은, 명백한 살인 행위이자 자살 방조인 안락사와는 그 의도와 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다. 존엄한 죽음은 우리가 장구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인생 과제인데, 이 글에서는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본문 중)

곽혜원(21세기교회와신학포럼)[1]

 

인간은 누구나 존엄한 삶을 영위하다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 필자가 정의하는 존엄한 죽음이란 ‘하나님의 형상’(창 1:26-27)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존엄성을 갖추고 행복하게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평온하게 맞이하는 죽음이다. 이것은 ‘생명의 원천’(시 36:9)이신 하나님의 은사(恩賜)로 고귀한 생명을 부여받은 인간이라면 모두가 마땅히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존엄한 죽음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죽음, 곧 존엄사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존엄사(=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와 안락사(=의사 조력 자살)가 서로 혼동됨으로 인해 존엄한 죽음이 왜곡되는 현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안락사가 존엄한 죽음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바이다. 존엄사 및 존엄한 죽음은, 명백한 살인 행위이자 자살 방조인 안락사와는 그 의도와 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다. 존엄한 죽음은 우리가 장구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인생 과제인데, 이 글에서는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먼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순응하고 노화(老化)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인간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에 대한 부정이 날마다 반복되며, 그 결과로 세상에는 노화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광적인 안티에이징(anti-aging) 열풍 속에서 이 시대 문명은 의학기술의 획기적 발전을 디딤돌 삼아 불멸(不滅)과 영생(永生)을 꿈꾸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인간의 삶을 완성하는 죽음의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특히 과학계가 앞장서서 유한한 인간 육체에 방부 처리를 감행하려는 듯하다.[2]

그러나 아무리 젊음을 유지하려 하고 불멸을 추구하더라도, 노화를 멈추어 영생에 이른 사람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없다. 노화와 죽음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에, 아무리 신비의 명약을 복용해도 노화를 막을 수 없고, 아무리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외면한 채 생로병사의 섭리에 불응한다면, 현세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어 나날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노화를 비참한 것으로 여기는 한, 우리는 인생을 유의미하게 마무리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할 것이다. 이제 유한한 육체를 방부 처리하려는 인류의 탐욕과, 불멸에 도달하려는 광기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가 되었다.[3]

많은 사람이 노화의 현실을 두려워하지만, 지혜로운 노년기를 보내는 현자(賢者)들의 증언은 의미심장한 결과를 보여준다. 물론 노인이 되면 상실의 아픔을 불가피하게 경험하겠지만, 의식주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상태라면, 노년과 함께 분명 좋은 것도 따라온다. 곧, 인생을 관조하면서 삶을 통찰하게 되는 ‘자아 통합’이 바로 그것이다. 많은 노인이 노년의 삶을 ‘존재의 가벼움’,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라고 표현하는데, 특별히 노년의 특권은 평생 짊어졌던 막중한 의무들에 얽매이지 않고 홀가분하게 지내며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삶이다. 그래서 인생의 현자들은 늙는 걸 걱정하면서 쓸데없이 나이와 싸우지 말고, 나이와 함께 늙어 가면서 변화하는 신체와 상황에 맞춰 지혜롭게 적응해 나가라고 권고한다.[4] 필자 자신도 돌아보면 노화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배우게 되었다.

 

 

2. 점진적 죽음의 과정 속에서 의료기술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20세기 들어와 의술이 엄청나게 발전함으로써 죽음의 과정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즉 많은 사람들이 과거처럼 급성질환으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기보다, 만성질환으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을 준비할 좋은 기회를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점진적 죽음이 한편으로는 마지막 생애를 알차게 보낼 기회를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애매한 죽음 궤도로 인해 좋은 임종을 준비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 수도 있다.

매우 우려스럽게도,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의술을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하여 우리나라의 임종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5] 말기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는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매달리느라 삶을 마무리할 여력이 없고, 죽음이 임박해서는 중환자실을 전전하다가 황망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다반사다.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다면, 당사자나 가족에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순간이 결국 오게 되는데, 사실, 환자나 가족이나 의료진이나 모두 멈춰야 할 때 용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환자와 가족은 치료를 멈추고 편안한 임종을 준비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지혜롭게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연명의료를 실시하는 데에도 나름의 정당한 사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의술에만 의존하다가는 복된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신변을 정리하거나 임종을 준비하면서 영성이 깊어질 기회도 놓칠 수 있다.[6] 그러므로 치료에 대한 인간적 욕구와 죽음을 준비하는 일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7]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인생의 말년뿐만 아니라, 평생을 영원의 관점에서 살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이제 그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삶을 소망하고, 하나님이 그 삶으로 향하는 여정에서도 돌보아 주실 것을 확실히 믿으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3. 존엄한 죽음을 위한 의료 인프라(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활용해야 한다. 많은 환자가 임종기에 접어든 후에도 큰 고통 속에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다가 존엄하지 못한 죽음을 맞는 상황 속에서 존엄한 죽음을 위한 의료적 인프라 구축은 절실한 과제다. 이 과제가 해결되지 못할 때, 인류의 오랜 딜레마인 안락사 문제가 불가피하게 대두되기 때문이다.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통상적 의료행위가 더 이상 효과가 없을 때, 마지막 단계에서 겪는 환자의 육체적·사회적·정신적·영적 측면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다. 말기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는 총체적 고통을 완화해 줌으로써 존엄한 죽음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의료 서비스가 바로 고통을 완화하는 의료(완화의료)이다. 또, 호스피스는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데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환자가 여생 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간직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신체적·정서적·사회적·영적 도움을 주는 총체적·전인적 돌봄이다. 호스피스와 완화의료는 말기 환자에 대한 총체적·전인적 돌봄에 주력하므로 안락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되며, 존엄한 죽음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의료 서비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호스피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여 우리나라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아직도 저조할 뿐만 아니라, 호스피스 관련 시설도 열악하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호스피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극복하고 관련 시설도 잘 구비함으로써, 임종기 환자들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존엄성을 갖추고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생애를 평온하게 보낼 수 있게 해야 한다.

 

 

4. 존엄하지 못한 죽음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사회적·가정적 유대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존엄하지 못한 죽음과 관련해 나날이 심각한 양상을 드러내는 문제가 바로 고독사(孤獨死)이다. 초고령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사회 속에서 고독사의 일차적 피해자는, 급격한 사회변동과 가정 해체의 그늘 속에서 가장 험난한 인생 여정을 살아가는 노년층, 특히 홀로 거주하는 독거노인일 것이다.

그러나 독거노인 못지않게 우려스러운 계층이 바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중·장년 남성이다. 실제로 중·장년 남성의 고독사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특히 이혼 등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거나, 생업을 잃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남성이 고독사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혼은 단순히 부부간 인연의 단절로 끝나지 않고 자살과 고독사를 유발하는 위험 요인들과 연결되는데,[8] 이는 가족 해체가 가정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에 대한 결속감마저 떨어뜨림으로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는 가정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가족 해체가 나날이 심각한 양상으로 진전되고 있어 사회적·가정적 유대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다각도의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필자는 사회적·가정적 유대 관계가 삶의 질은 물론 죽음의 질도 좌우하는 중요 조건, 특히 존엄한 삶·존엄한 죽음을 결정하는 최대 변수라고 진단한다. 즉, 타자에게 의존을 해야만 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타인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는 생존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이점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고 가족의 따뜻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고독사 사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존엄한 죽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국가와 교회와 개인이 건강한 가족 관계의 구축에 우선순위를 두고 노력해야 한다.

존엄한 삶·존엄한 죽음을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일들에는, (1)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정도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관리하기, (2)위기가 닥쳤을 때 주변에 의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돈독히 쌓기, (3)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기반을 견고케 하는 일거리(의식주를 위한 생업과 함께 삶의 활력소가 되는 소소한 일거리도 포함)를 찾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기 등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세심한 역할이 절실히 요청된다. 인생을 행복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건강, 인간관계, 일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무리 명약관화하더라도,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은 스스로 구제할만한 여력이 없다. 이때 단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기울여주는 이가 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특별히 자살과 고독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절대다수가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사회적 약자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희망을 주고 자립·자조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고통과 굴욕 속에서도 부여잡아야 할 삶의 계명이자 인생의 강력한 히든카드다. 그런데 이 희망이란 누군가의 도움과 격려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과거 언젠가 우리를 도와주었던 그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록: 임종을 앞둔 환자가 준비해야 할 중요사항

– 곽혜원,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322.

(1)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조용히 떠올리면서 삶을 정리한다. 삶을 회고하다가 잘못한 일이 생각나면 스스로를 용서하고 세상을 떠난다.

(2) 죽음 뒤에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가족 관계이므로, 혹여라도 가족에 대한 불편한 심경이 남아있다면 죽기 전에 모두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영원히 헤어지기 전에 마음을 담아 가족에게 사랑과 축복을 전하는 작별 인사는 평생 이어온 관계를 마무리하는 데 꼭 필요한 지혜일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평생토록 간직할 소중한 선물이 되기도 한다.

(3) 존엄한 죽음의 가장 큰 장애물은 마무리가 안 된 인간관계 속에서 느끼는 증오와 죄책감 같은 감정인데, 이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용서와 화해다. 특히 용서는 죽음으로 가는 여정을 거의 완벽하게 준비하는 방법이자 상처로 얼룩진 관계를 완성하고 평화를 찾는 핵심이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될 것 같은 원한과 억울한 감정이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까지 훌훌 털어내고 하염없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다 보면, 맺힌 것이 풀리고 환희의 기쁨이 나오면서 영혼이 정화된다.

(4) 죽음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지만, 마지막이자 엄청난 성장의 기회,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이 확실하므로, 확신과 용기를 갖고 죽음을 직면한다.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적으로 엄청난 성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죽음을 준비하면서 시간이 짧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죽음 앞에서 내적으로 충만한 변화가 일어날 때는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5) 죽음 이후에 누리는 삶은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 초미의 관심사이므로, 이를 삶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기고 모든 관심을 집중하여 준비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은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줌으로써 남은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이처럼 삶의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은 평상시에는 거의 불가능하고 임종이 임박해서야 가능한 일이므로, 마지막 순간까지 이 기회를 잘 선용하면서 죽음 이후의 삶을 소망하면서 신앙생활에 총력을 기울인다.

(6) 사랑과 봉사는 삶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아직 남은 힘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봉사로 삶을 마무리한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무슨 사랑과 봉사를 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사랑과 봉사 행위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중요한 도움을 주므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면서 좋은 일을 하고 세상을 하직한다.

(7) 중환자실에서 맞는 죽음이야말로 가장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므로, 모든 의학적 노력을 기울인 연후에 죽음이 불가피할 경우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집착하지 않는다. 환자 자신은 무의미한 의료를 원하지 않지만 자식들이 강행하는 경우도 적잖기 때문에 ‘사전의료의향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문서화 해 둔다. 또한 가족과 의료진을 비롯한 주변 사람에게 불필요한 일이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8) 이제는 자신의 영적인 문제에만 온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할 때이므로 세상사에 대한 모든 걱정과 집착을 내려놓는다. 남겨진 이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주변을 잘 청산해야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다. 유언장·사전의료의향서·사전장례의향서 등의 서류를 작성하고 주변을 정리한 연후에는 모든 세상적인 일에서 관심을 끊어 낸다.


[1]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세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튀빙엔(Tübingen) 대학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현재 21세기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연구공동체 <21세기교회와신학포럼>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Das Todesverständnis der koreanischen Kultur(한국문화의 죽음이해),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자살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저작) 등 다수가 있다.

[2] 오늘날 죽음을 극복하려는 과학계의 광기 어린 행보가 심상치 않다. 최근 들어 글로벌 거대기업들,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거부들이 발 벗고 나서서 불멸을 실현해 줄 생명의 묘약을 찾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와 과학자, 의학자들 역시 종교의 도움 없이 육체적 영생의 문을 열어줄 열쇠를 발견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3] 윤영호,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서울: 컬처그라퍼, 2012), 45-46.

[4] K. Pillemer,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박여진 옮김(서울: 토네이도, 2012), 178-184.

[5] 임종의 때가 임박하면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사적인 대화를 충분히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많은 임종자들이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다인용 병실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죽어가고 있다. ‘임종실’ 또는 ‘영면실’로 옮겨가 평화롭게 임종을 준비해야 하지만, 대다수의 임종자가 그러한 배려를 전혀 받지 못하는 열악한 여건에 있다. 현실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임종을 맞이하는 동안에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푸대접을 받고, 정작 죽고 나서야 비로소 호화로운 장례식장으로 옮겨져 반짝 ‘호강’을 한다. 임종자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 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는 임종 환경이지, 결코 사후에 치러지는 화려한 장례식이 아니다. 곽혜원,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341-342.

[6] 임종을 앞둔 환자가 준비해야 할 중요 사항에 대해서는, 앞의 책 322를 참조하라. (이 글의 하단에 부록으로 실음.)

[7] R. Moll, 『죽음을 배우다』, 이지혜 옮김(서울: IVP, 2013), 48-49.

[8] 자살 연구에서 세기를 초월하여 독보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이미 100여 년 전에 자살과 가족 해체의 상관관계를 간파했는데, 특히 가족(특히 식구가 많은 가족)을 ‘일상생활의 필수 불가결한 원천’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곽혜원, 『자살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서울: 21세기교회와신학포럼, 2011),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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