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던 ‘청지기 윤리’라든가 ‘직업 소명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과는 왠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중략)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일,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런 일을 찾았다고 해도 그것이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일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을 찾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일은 생계와 여가를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합니다.(본문 중)

최경환 (과학과신학의대화 사무국장)

미로슬라브 볼프, 『일과 성령』

IVP | 2019. 12. 9 | 358쪽 | 17,000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연휴 마지막 날, 또는 일요일 저녁, 괜히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입니다. 직장인들은 출근하면서부터 점심시간만 기다리고, 점심을 먹고 나면 집에 갈 시간만 기다립니다. 그렇다고 직장 생활이 만만한 것도 아닙니다. 갑질 하는 대표님과 꼰대 부장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고생해서 준비한 기획안을 마치 자기 것처럼 포장하는 얄미운 상사 때문에 속이 뒤집어집니다. 그러니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질 않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모든 일이 거룩하다’고 말하면서 ‘직업 소명설’을 이야기했다는데, 과연 오늘날 자신의 일을 정말 좋아서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구두 닦는 일도 성직자의 일과 동일한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구두닦이가 매일 손님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제대로 생활비를 벌지 못한다면 그걸 과연 소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IVP.

 

그동안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던 ‘청지기 윤리’라든가 ‘직업 소명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과는 왠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요즘 사람들은 가능하면 적게 일하고 여가는 충분히 즐기며 편히 쉬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도 안 하면서 흥청망청 놀고먹기를 바라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일,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런 일을 찾았다고 해도 그것이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일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을 찾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일은 생계와 여가를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바로 이런 현상이 볼프가 말한 일의 소외입니다. 볼프는 그동안 개신교 신학이 주로 루터의 소명설에 근거해 일을 이해해 왔지만, 이런 관점으로는 더 이상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야기된 ‘소외’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루터의 소명설은 직업 혹은 직장을 하나님께서 주신 천직으로 알고, 감사하며, 군소리 말고 성실하게 일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일의 신학은 신학적으로는 성화론과 연결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성실하게 일하면서 청지기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적성과 취향에 맞지 않아 직장을 옮기거나 직종 자체를 바꾸면 소명을 거스르는 것일까요? 또,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정말 좋아서 찾아간 직장에서 온갖 불의와 갑질과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연 꾹 참고 견디는 것이 유일한 그리스도인의 미덕일까요? 볼프는 이렇게 루터의 소명설에 근거해 일의 신학을 구성했던 기존의 개신교 윤리를 재고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새 창조와 성령론에 근거한 일의 신학을 제안합니다.

이 책이 일터에서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일을 해야 할지, 혹은 일 때문에 힘들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어떻게 도울지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일의 신학’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일에 따라오는 착취와 불의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그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죠.

 

ⓒIVP.

 

볼프가 제시하는 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개념이 중요합니다. 바로 ‘새 창조’와 ‘성령’과 ‘종말’입니다. 이 세 개념이 일의 신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볼프는 스승인 위르겐 몰트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학은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현재 삶은, 성령을 통해, 종말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새 창조의 삶을 미리 맛보고 경험하고 선취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착취와 고통과 불의 때문에 신음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약속된 종말의 비전을 바라보면서, 그날에 완성될 일들이 마치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종말론적’이고 ‘성령론적’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성령은 새 창조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며, 동시에 종말에 일어날 일이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은사를 주시고, 새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동시에 모든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창조의 영이면서 동시에 변혁의 영입니다. 이 세상이 새 창조를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고 형성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 근거 위에서 볼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음의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은 개인의 존엄성을 보호해야 합니다. “경제생활에서 개인은 물건이 아니라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주체로 대해져야” 합니다. 노동자가 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되면 그것은 진정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일은 “모든 사람의 기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의를 실현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기본적인 필요와 권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일은 “자연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책임”을 지닌 것이어야 합니다(45쪽). 이는 종말론적 비전과도 연결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은 마지막 때의 완성과 만물의 회복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볼프는 이 세 가지 규범에서 벗어나는 일은 과감하게 상대화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시장 경제가 이 세 가지 기준에 위배되는 상황을 발생시키고 있다면 견제되고 수정되어야 합니다. 만약 개인의 자유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모든 개인의 기본적 생계유지의 권리가 침해당한다면, 그런 상황을 성경적인 기준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미국 성공회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1956~). 튀빙겐 대학교에서 위르겐 몰트만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예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볼프가 제시하는 일의 신학에 가장 빛나는 부분은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대안적인 기독교 신학을 발전시킨 부분입니다(6장).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느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볼프가 말하는 ‘일의 인간화’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바로 ‘소외’입니다. 일이 단지 돈벌이 수단이 되는 것,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마지못해 일을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소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일의 소외를 극복하고 최소화하도록 돕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괴로운 일,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는 일을 넘어 정말 하고 싶은 일, 즐거운 일,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 이런 일이 새 창조 안에서 온전히 회복될 일의 모습입니다.

일을 하지 않고 마냥 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일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자 존재 방식입니다. 일 자체가 수단만이 아니라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목적이 될 수 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모두가 ‘워라밸’(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편집자 주)을 꿈꾸지만,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의 분화와 착취로 인해 소외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일과 여가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도 힘들고,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물쩍거리는 사이에 많은 사람이 일 때문에 상처를 받고 스트레스로 괴로워합니다. 공동선은 무너지고 창조 세계는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의 영이자 변혁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만물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성령의 은혜를 스스로 먼저 경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며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하는 분야에 사용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일하는 삶이 됩니다.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관련 글 보기


과학과 신학, 거리 두기와 대화하기 – [서평]『창조론: 과학 시대 창조 신앙』(최경환)

[책 소개]동시대를 살아가며 ‘다른 세상’을 꿈꾸기『김기석 목사의 청년편지』(천서진)

[서평]『미국기독교사』(이재근)

[서평]『아름다운 안녕』(정지영)

[서평]『인간의 타락과 진화』(최경환)


<좋은나무> 카카오페이 후원 창구가 오픈되었습니다.

카카오페이로 <좋은나무> 원고료·구독료를 손쉽게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_
_
_
_

 

좋은나무에 문의·제안하기

  • This field is for validation purposes and should be left unchanged.

관련 글들

2024.10.07

진진적 사고(김보경)

자세히 보기
2024.09.27

감폭력된 사회를 바라며(이명진)

자세히 보기
2024.09.06

그런 기적이 엄마에게 있었다면(김보경)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