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들은 분명히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고, 예수, 구원, 죄, 피, 설교, 교회 등 종교적인 소재와 대화가 난무하지만, 그 모든 주제는 광기가 깃들고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는 부적절한 것으로 느껴진다. 기독교인 또는 종교적 담론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가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하나같이 충격적이고 파괴적인 결말도 문제인 데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반기독교 소설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평판은 그렇지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을 기독교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서양 고전 안내서 『고전』(홍성사 역간)을 번역하면서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 1925-1964)를 알게 되었다. 때마침 그녀의 소설집이 막 번역되어 나온 터라 쉽게 구해 볼 수 있었다.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줄거리를 전혀 모르는 채 그녀의 단편소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A Good Man is Hard to Find, 1953)를 읽고[1] “어어어” 하면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몇 편의 단편을 더 읽은 후부터 그녀의 소설을 읽어나갈 때는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게 되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다. 그녀는 개신교가 주류를 이룬 미국 남부에 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관찰자의 눈으로 그곳의 열광적인 개신교 세계를 때로는 짓궂게 때로는 낯설게 바라본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내가 기독교 소설에서 기대한, 또는 지레짐작한 전형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주인공이 유혹을 받고 타락했다가 은혜를 받고 돌아서는 회심의 이야기. 또는 온갖 역경을 뚫고 믿음의 싸움을 하는 감동의 서사시. 또는 교리적, 교훈적, 계도적인 내용. 뭐 이런 거가 아니었던가 싶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그런 (어쩌면 나만 갖고 있었을지도 모를 촌스러운) 선입견 내지 고정관념을 확실하게 깨뜨린다. 그녀의 작품들은 분명히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고, 예수, 구원, 죄, 피, 설교, 교회 등 종교적인 소재와 대화가 난무하지만, 그 모든 주제는 광기가 깃들고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는 부적절한 것으로 느껴진다. 기독교인 또는 종교적 담론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가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하나같이 충격적이고 파괴적인 결말도 문제인 데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반기독교 소설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평판은 그렇지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을 기독교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뒤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장편소설 『현명한 피』(Wise Blood, 1952)[2]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다가 나온 선택
주인공 헤이즐 모츠(이하 헤이즈)는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전한다. 죄를 거부하기 위해 죄를 짓고, 신성모독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 다 지난 일이라면서도 입을 열 때마다 헤어진 연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믿지 않는 예수에 대해 끊임없이 떠든다. 너무나 진지한 탓에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타인을 공격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원했던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어쨌건 그는 기독교(의 캐리커처)를 끝없이 반대하는 것에서 구원을 찾으려 했는데, ‘무엇이건 반대로’ 하는 데서 구원이 나올 리 없다. 그는 먼저 두 가지를 시도한다.
첫째, 헤이즈는 “죄를 믿지 않아요”(70)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본인이 대표적인 죄라고 생각하는 성적인 죄를 열심히 짓는다. 죄를 안 짓는다고 세상이 확 바뀌지 않는 것처럼, 성적인 죄를 짓는다고 해서 뭐 구원의 길이 주어질 리 만무하다. 모츠는 굳이 믿지도 않는 죄를 저지르는 것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이 부인하는 죄를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슷한 방식으로 그는 신성모독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둘째, ‘죄를 믿지 않는다’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예 화끈하게 믿음 자체에 대한 거부로 나가는 건 어떨까? “나는 어떤 것도 믿지 않으니 어떤 것으로부터도 달아날 이유가 없습니다”(94). 헤이즈는 믿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사실 많이 믿고 많이 속는다(대부분의 등장인물에게 속는다). 그에게 진실을 말해준 사람이 둘이다. 그의 차는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첫 번째 수리공과 픽업트럭으로 기름을 가져다 준 사람이다. 그런데 헤이즈는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 믿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만 믿기 때문이다. 믿음은 한 번에 확 다 내다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그는 내면의 커다란 목마름과 갈급함을 느꼈던 것 같다. 자기가 아는 기존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로 해 보지만 결과가 신통치가 않다. 그래서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자신의 갈증을 채워줄 뭔가를 누군가는 갖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마침 그가 기대를 걸 만한 후보가 나타났다. 맹인 설교자 아사 호크스. 헤이즈는 호크스에게 집착한다. 그를 계속 따라다니고, 꿈속에서는 자기를 구해주기를 기대하기까지 한다. 예수를 위해 자기 눈을 멀게 했다는 맹인 설교자 아사 호크스. 그 정도로 큰 희생을 감수할 정도라면 진짜가 아닐까? 그에게서 뭔가 진짜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사 호크스는 가짜였다. 그는 사기꾼, 장사꾼이었다. 여기서 헤이즈는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고 예수 이름을 들먹이는 모든 일은 가짜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물러나면 헤이즈가 아닐 것이다. 그는 아사 호크스가 하지 못했던 일을 감행하기로 한다. 자신의 눈을 멀게 하는 큰 희생을 감수한다면 뭔가 돌파구가 열리지 않을까. 참사랑과 참믿음이 큰 희생을 감수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큰 희생이 참사랑과 믿음의 척도라는 말 아닐까. 이런 큰 희생은 진리를 보장해 주지 않을까?
헤이즈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그 이후로 또 어떤 길이 남아 있었는지,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것까지 말하면 너무 심한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으로 헤이즈의 방식을 한번 정리해 보자. 많은 이들은 소유와 인정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다. 외부적인 것을 추구하고 더 가지려는 방식으로 답을 찾으려 한다. 그런 것들이 주는 기쁨과 성취감, 뭐 그런 것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헤이즈는 달랐다. 애초부터 무엇인가 더 가져서 구원을 얻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헤이즈의 방식은 부정하고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신앙과 그리스도만 없을 뿐, 스타일과 골격은 천상 구도자, 수도자, 청교도였고, 자신이 믿지 않는 바를 전파하는 설교자이고자 했다. 기성교회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행하여, 즉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타락하고 죄에 빠져서 구원을 찾아보려던 그는, 그런 식의 외부적 일탈과 거부에 뾰족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 즉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금욕과 고행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그의 처절한 시도는 과연 구원을 안겨다 줄 것인가?
헤이즈의 행동과 말, 선택이 처음에는 괴이하기만 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극단적으로 실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구원에 대한 본능적 갈망을 품은 사람이 안내자나 나침반, 지도 없이 그 갈망을 채워보려고 이리저리 시도해볼 때 능히 택할 만한 여러 선택지를 보여준다 싶었다.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동과 말은 따지고 보면 각자가 처한 상황과 물려받은 여러 조건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다가 나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나도 그렇고 많은 이들의 모습이 헤이즈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코너 소설이 갖는 특성
오코너의 소설이 갖는 특성은 그녀가 이제 독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당연히 갖고 있으리라 전제하고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상황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로 인해 두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는 진짜 종교인과는 거리가 먼 등장인물들이고, 둘째는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줄거리다.
첫째, 등장인물에 대하여. 오코너의 작품에서 기독교 소설이라고 할 때 기대함 직한 신실한 기독교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헤이즈를 위시하여 이 책의 등장인물 중에서 훌륭한 신앙인은커녕 ‘제대로 된 인간’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뭔가 문제가 있는 등장인물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구원을 모색하며 몸부림친다. 다른 사람에게서 길을 구하고 구원을 갈구한다. 그러다 상처받고 무너지고 떠나가고,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을 밀어낸다. 왜 이런 인물들만 등장시키는 것일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나,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 같은 이들은 어디 있단 말인가?
C.S. 루이스의 영적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에는 그가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려 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그 과정에서 맥도널드, 체스터턴 등의 기독교 작가들과 톨킨 같은 친구들과의 대화가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곳에서 그의 불신을 크게 흔들어 놓은 한방을 날린 사람은 그가 아는 “무신론자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무신론자”였던 친구였다. 친구는 루이스의 방 벽난로 맞은편에 앉아 “복음서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역사적인 신빙성을 갖추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범상치가 않아.” 그때 루이스는 크게 동요하며 이렇게 묻게 된다. “냉소주의자 중에 냉소주의자요, 강심장 중에 강심장인 그 친구조차 ‘안전하지’ 않다면…도대체 나는 어디에 기대야 한단 말인가?”
신앙이 없는 독자라면, 책에서 신앙을 가진 등장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적인 말, 신앙을 긍정하는 말은 일단 색안경을 쓰고 바라볼 것이다. 신앙인이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느냐 생각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무신론자에게 가장 위협적인 말은 가장 강력한 무신론자의 입에서 불쑥 터져 나오는 “범상치 않아” 같은 말이리라. 가장 무서운 공격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불의의 일격인 법. 그래서 오코너의 작품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등장하지 않는 것 아닐까. (물론 스스로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은 무수히 등장한다. 오코너의 많은 소설은 그런 이들이 가진 위선과 가면, 한계를 폭로하는 내용이다.)
둘째,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전개와 결말이다. 『현명한 피』도 그렇지만, 오코너의 소설들은 정도 차는 있지만 대부분 폭력적이고 충격적으로 마무리된다. 거의 모든 소설이 그런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왜 그렇게 할까?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세상에는 폭력적인 것도 많지만 평화로운 모습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데 왜 꼭 별종들만 그러모아서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것일까? 현실감각이 부족해서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만 ‘편파적으로’ 취사선택하여 버무려 놓은 것이 문학이라 그렇다. 오코너는 일부러 작정을 하고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폭력적으로 밀어붙인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기독교적 관심사를 가진 소설가는 현대의 삶에서 불쾌하게 다가오는 왜곡들을 발견할 테고, 그런 왜곡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데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것들이 왜곡으로 보이게 만드는 일이 그에게는 큰 문제일 것이다. 그가 이 적대적인 독자들에게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기 위해 늘 더 폭력적인 수단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독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가정해야 할 때는 충격요법을 써서 자신의 시각을 분명히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귀가 어두운 사람에게는 큰소리로 말하고, 눈이 거의 먼 사람에게는 크고 놀라운 그림을 그려보여야 한다.[3]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은 흔히 이렇게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극단의 한 지점에서 현 상태인 자기만족에 균열이 일어나고 희미한 구원의 서광이 번득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오코너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아주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 초행길을 가는 것 같은 긴장감, 뜻밖의 순간에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날아오는 한방. 그리고 긴 여운. 아주 작은 균열. 먹구름을 뚫고 나온 한 줄기의 빛. 작가가 모든 이야기를 다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 정도면 괜찮다고, 그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아느냐고 오코너는 말하는 것 같다.
난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다. 무서워서다. 그런데 공포영화의 진정한 영향은 영화를 보는 도중이나 보고 난 직후가 아니라 그날 밤에 시작된다. 그런 면에서 『현명한 피』는 공포영화와 비슷하다. 한창 읽을 때는 등장인물들을 보고 ‘이상한 놈들이네’, ‘나쁜 놈들이네’, ‘이게 뭐야?’ 정도의 반응이 전부였다. 책을 덮고도 당장에는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 소설의 장면들, 주인공들의 선택이 자꾸만 머리를 맴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 안에서 『현명한 피』의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의 영향은 이제 막 시작된 모양이다.
[1] 다음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정윤조 옮김(문학수첩, 2014) (편집자 주).
[2] 허명수 옮김(IVP,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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