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총선거는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엄청난 정치적 열정과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중략) 선거일이 임박할수록 투표에 대한 정치적 열정과 분노와 에너지는 다시 결집되고 표출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에게, 정치적 보수와 정치적 진보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이 국회의원 총선거를 맞아 오늘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제기되는 진지한 질문들입니다.(본문 중)

이병주(변호사, 기독법률가회 사무국장)

 

‘조국 사태’와 ‘전광훈 사태’, 그리고 ‘코로나 사태’와 ‘4·15 총선’

한 사람의 인생은 평탄하지가 않습니다. 가끔은 조금 평안하다 싶은 시기가 있지요? 그러나 이것도 잠깐, 두세 달 이상을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어째 살 만하다 싶으면, 갑자기 직장과 가정에 문제가 생기지요. 몸이 편안하다 싶으면, 갑자기 내가 아프거나 가족 중에 크게 아픈 사람이 생깁니다. 내 마음이 왠지 편하다 싶으면, 갑자기 누군가와 살짝 다투거나 거칠게 싸우는 일이 생깁니다. 하여간, 우리들 대부분의 인생은 ‘스펙터클’합니다. 이렇게 사는 게 힘이 드니까, 우리는 뻣뻣한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시 42:11).

한 사회의 움직임도 평탄하지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그게 더 심합니다. 세월호 사건(2014)과 대통령 탄핵 사태(2017)로 한 시기가 지나가나 싶더니, 그 뒤로 북핵 사태(2018)와 남·북·미 정상회담(2018-2019)의 질풍노도가 왔다가 지나가고, 또 갑자기 조국 사태라는 일진광풍이 휘몰아쳐서 몇 달 동안 전 사회가 엄청난 싸움의 태풍에 휘말렸습니다(2019 후반). ‘이놈이 나쁜 놈이냐? 저놈이 나쁜 놈이냐?’ 정치적이고 도덕적이고 사법적인 심판을 둘러싸고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이 보수와 진보가 갈라지고, 친구들이 갈라지고, 아버지와 아들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형과 동생이 갈라져 분쟁하고(마 10:35), 교회에서 서로 웃고 지내던 장로님과 권사님, 집사님과 목사님도 갈라졌습니다.

‘심판하는 자’와 ‘심판받는 자’가 뒤엉켜서 전 국민이 모두 심판하는 자와 심판받는 자가 되어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외치고 욕하던 몇 달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기억하시지요? 이 와중에 기독교인 중의 상당수가 거리로 뛰쳐나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권 심판의 주도 세력을 형성하는 정치와 신앙의 대융합 현상도 벌어졌습니다. ‘전광훈 사태’는 기독교와 정치의 관계에 심각한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2019년,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 국면에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진행된 조국 찬성·반대 시위. (좌: 뉴시스 갈무리, 우: 노컷뉴스 갈무리)

 

또 조금 잠잠해지나 싶더니, 갑자기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했지요(2020). 코로나19 사태는 한두 달 만에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코로나 사태의 평가에 다소 차이는 있으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 사태의 전면적 위협에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완화하고 양자 간의 협력을 강요하는 면이 있습니다.

4. 15 국회의원 총선거가 얼마 후로 다가왔습니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총선거는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엄청난 정치적 열정과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코로나 사태에 상당히 눌려 있지만, 선거일이 임박할수록 투표에 대한 정치적 열정과 분노와 에너지는 다시 결집되고 표출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에게, 정치적 보수와 정치적 진보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이 국회의원 총선거를 맞아 오늘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제기되는 진지한 질문들입니다.

 

선악과의 눈

정치를 바라보는 ‘기독교인의 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선악과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제6계명(“살인하지 말라”)의 눈’입니다. ‘선악과의 눈’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인의 정치는 분쟁적이고 공격적입니다. 일반적으로도 정치적 보수주의자에게는 보수주의가 선이고 진보주의가 악이며, 정치적 진보주의자에게는 진보주의가 선이고 보수주의가 악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신앙이 더해져서 하나님이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중 한쪽만 지지하고 다른 쪽은 반대하시는 것으로 보게 되면, 기독교인의 신앙적 정치관은 더욱 험악해집니다. 절반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보주의를 박멸하자고 기도하고, 다른 절반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수주의를 배척하는 기도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땅의 사람들이 둘로 나누어 가지려고 하면(왕상 3:25), 하나님은 고통스럽고 괴로워지십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는 하나님의 명령은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세상을 심판하려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째, 사람에게는 하나님처럼 세상을 심판할 능력이 없고, 둘째, 사람이 하나님처럼 세상을 심판하려 들면 세상과 사람이 모두 치명적 위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자랑스러워서(창 3:6), 한 번 먹고 두 번 먹고 자꾸만 먹고 싶어 합니다. 선악과의 열매는 죽음과 고통입니다(창 2:17, 3:16-19).

개인적 선악과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개인적 교만과 위선의 죄를 낳습니다(눅 6:42). 정치적 선악과는 다른 집단을 심판하고 제거하고 싶은 집단적 폭력성의 죄를 낳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선악과의 눈’으로 정치를 바라보게 되면, 나와 이익과 생각이 같은 ‘우리’들만을 정치적으로 선한 자, 심판하는 자의 자리에 세우고, 나와 이익과 생각이 다른 ‘그들’을 정치적으로 악한 자로 심판대에 세워 배척하고 제거하려 하며, 증오를 퍼붓게 됩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에게 ‘선악과의 눈’은 정치적 대립의 장에서 나와 정견이 다른 이웃과 공존하고 존중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내 옆의 정치적 이웃을 원수로 생각하고 배척하는 ‘반(反) 이웃 사랑’의 길로 나가게 합니다.

 

제6계명의 눈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제6계명(출 20:13)과 ‘타인을 라가(바보)라고 욕하지 말라’(마 5:22)는 예수님의 제6계명 해석을 합하면,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간절한 호소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인생과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계속 서로 해치며 살아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살아 있는 한, 우리 중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불쌍하고 힘겨운 ‘인간의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서로 경쟁하고 부딪치면서, 세상의 모든 폭력과 불의와 악과 인간의 슬픔과 불행을 만들어냅니다. 개인적인 자기 사랑의 충돌은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과 인생을 해치고, 집단적인 자기 사랑의 충돌은 ‘집단적으로’ 다른 집단의 생명과 인생을 공격합니다. 구체적으로, 개인적 자기 사랑은 지역과 직장과 가정의 일상에서 이웃 간에 다툼과 폭력을 만들고, 국가적/민족적 자기 사랑은 이웃하는 공동체 간에 격렬한 증오심과 전쟁을 일으켜 세상의 대규모 비극들을 만들어내며, 계층적인 자기 사랑은 한 사회 내부의 집단적 이웃 간에, 보수와 진보와 인종과 계층 간에, 당파적이고 정치적인 대립과 격돌과 지속적인 정치적 내전 상태를 만들어냅니다.

민주주의의 ‘선거제도’는, 사회 내부의 집단적/계층적 자기 사랑의 충돌과 적대감이 총탄(bullet)으로 상대방을 죽이는 폭력적인 전쟁으로 나가지 않고, 투표지(ballot)로 상대방을 일정 기간만 제압하는 ‘평화적인 전쟁’에서 멈추게 하는 정치적 제도입니다. 졌을 때는 분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4-5년 뒤에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으니 참고 기다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전쟁이지만 욕만 실컷 하고 사람을 직접 죽이지는 않는 ‘평화적인 전쟁’(Peaceful War)을 발명해 낸 민주주의의 선거제도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제6계명의 적극적 실천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대로 ‘(정치적) 원수를 사랑하는 것’까지는 못하더라도 ‘(정치적) 원수를 덜 미워하고 견디며 함께 살아가는 것’까지는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이중 계명(마 5:44)의 집단적 실천수단입니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정치적 민주주의는 산상수훈의 팔복(八福) 중 하나인 이 세상을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 마 5:9)로서, 기독교 신앙의 열렬한 박수와 지지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unsplash.

 

하나님과 보수와 진보

세상에는 절반의 보수주의자들과 절반의 진보주의자들이 함께 삽니다.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것은 자기의 이익에 따라, 자기의 주관과 성향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이익과 관점이지 절대적인 선과 악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를 절대 선과 절대 악으로 나누고 상대 진영을 제거하려고 드는 것은 사람이 ‘정치적 선악과’를 먹은 탓입니다.

기독교인들도 평균적으로 절반은 보수주의자이고 절반은 진보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세상의 진보주의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보수주의에도 들어있고 진보주의에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대로 된 보수’와 ‘제대로 된 진보’와 ‘양자 간의 제대로 된 싸움과 협력’을 원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보수나 정치적 진보 중의 하나만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선악과’와 ‘신앙적 선악과’를 함께 먹은 합병증상입니다.

기독교인들 각자에게는 자기의 이익과 관점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보수주의를 지지할 자유도 있고, 진보주의를 지지할 자유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선악과 금지의 계명은 사람이 정치와 이념의 영역에서 ‘극우의 자리에 앉아서 진보와 좌파 모두를 악하다고 심판하고 정죄하지 말 것’과 ‘극좌의 자리에 앉아서 보수와 우파 전부를 악인으로 심판하고 정죄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나의 정치적 자유를 주장하고 존중받는 것만큼, 다른 사람의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이웃 사랑이자(막 12:31), 기독교인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황금률’입니다(마 7:12).

우리가 참여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선거제도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 줄 완벽한 제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없으면 세상은 더욱 험악하고 고통스러운 지옥 같은 곳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민주주의 선거 제도는 정치적 원수를 견디고 정치적 이웃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정치적 이웃 사랑의 발명품이자, 사람을 죽이고 해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제6계명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 낸 커다란 신앙적 전진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선거제도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선거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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