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애통해 하며, 의에 굶주려 목이 마르고, 평안이 없고, 박해를 받아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 그리하여 온유하고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상속받아서,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본문 중)
현요한(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인간적인 이상 사회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존재 특성과 성품을 반영하는 나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 존재의 특성 중 몇 가지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으로 사는 나라입니다(롬 8:1-2). 세상이 어두움과 마귀의 권세 아래 잡혀 종노릇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유 안에 거하는 나라입니다(요 12:31; 엡 2:1-6; 벧전 2:9). 또한 그것은 모든 부당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나라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눈물과 고통과 애통이 사라진 나라입니다(계 21:4). 그 나라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속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는 나라입니다(롬 8:21).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창조주요, 또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새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1-5).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생명의 나라입니다. 죄악 때문에 죽은 자를 살려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나라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되는 나라입니다. 계시록이 보여 주는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할 것이라고 합니다(계 22:1-2).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한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인간적인 정의, 평화, 기쁨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기쁨의 나라입니다. 그것은 모든 불의한 억압과 적대 관계가 사라진 나라이기에 거기에는 한없는 평화, 한없는 정의, 한없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정의, 영원한 평화, 영원한 기쁨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애통해 하며, 의에 굶주려 목이 마르고, 평안이 없고, 박해를 받아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 그리하여 온유하고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상속받아서,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마 5:1-1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하였습니다(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 백성을 사랑하시며 다스리시는 나라이며, 그 하나님을 본받아 그 백성들도 서로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 높은 곳에 떨어져 계셔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요 16:27; 17: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마 6:9; 요 20:17). 각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도 매우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구약성서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본문들이 더러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들은 대개 하나님을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의미, 혹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의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들입니다(사 63:16; 64:18; 렘 3:4; 3:19; 시 89:26). 그때는 일반 신자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우리는 그 사랑의 아버지의 나라에 참여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사랑으로 왕이신 하나님과 친아버지처럼 교제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제자들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그러므로 그 나라의 백성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근심하며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눅 12:29).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섬기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원수요 적이었던 사람들도 서로 용서하고 하나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산상보훈(마 5-7장)은 이러한 나라에 속한 사람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며, 사랑의 교제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교제를 반영하는 나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이라고 보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시는데, 성령은 바로 두 분이 주고받으시는 선물이요 사랑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1)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 삼위일체를 세 인격적 주체간의 사귐, 코이노니아의 일치성이며, 서로가 서로 안에 온전히 거하는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의 일치성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2) 몰트만도 역시 성령을 하나님의 사랑 자체라고 보면서,3) 삼위일체 내적인 관계를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민주적인 공동체로 해석하였습니다. 몰트만은 이러한 삼위일체적 하나님 이해가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지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본받아 정치적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4) 심지어 그는 니콜라스 페도로프(Nicholas Fedorov)를 따라서, “삼위일체는 사회적 프로그램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5)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회적 프로그램이다”라는 말 자체는 자칫 하나님을 피조물 사회의 어떤 정치 프로그램처럼 만드는 것 같아서 부적절하지만, 그것이 나타내는 메시지, 즉 우리 인간 사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이해할 때, 이러한 방향을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서로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의 나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 서로 간의 사랑은 아직 부분적인 것이고, 완전한 것을 미리 조금 맛보는 정도이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사랑의 나라의 완전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잔치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로 비유됩니다(눅 13:28-20). 왕이 그 아들을 위해서 베푼 혼인잔치(마 22:2-14),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눅 14:15-24)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 19:9), 혹은 하나님의 큰 잔치(계 19:17)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5:1-2에 나오는 세리들의 잔치는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으신 하나님의 잔치를 유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이어 나오는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는 모두 잃은 것을 찾은 기쁨을 잔치를 열어 함께 나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6)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영성은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는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정의, 평화, 기쁨, 사랑, 생명의 나라이므로, 그것을 이루는 방법도 폭력과 전쟁과 권모술수가 아니라, 정의롭고, 평화로우며, 기쁨과 사랑을 일으키며, 생명을 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을 ‘선물’로 풀이하면서, 성령을 성부와 성자 간에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설명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 공통되는 ‘영’으로서, “성부와 성자의 어떠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연합(communion)이다.” Augustine, On the Trinity, V. 12. 또한 성부와 성자 사이에 공통된 분이요, 연합으로서 성령은 성부 성자와 동일본질(consubstantial)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령은 ‘선물’일 뿐만 아니라, “보다 적절하게 ‘사랑’으로 불린다”고 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안에 세 분 즉, “자신으로부터 나오신 이를 사랑하는 이, 내신 이를 사랑하는 이, 그리고 사랑 그 자체”가 계신다고 말한다. 위의 책, VI. 7.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안에 셋이 있는데, 사랑하는 이, 사랑 받는 이, 그리고 사랑이다.” 위의 책, VIII. 10.
2) Jürgen Moltmann,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김균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211.
3) 위의 책, 78.
4) 위의 책, 164.
5) Jürgen Moltmann, 『신학의 방법과 형식: 나의 신학 여정』, 김균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352.
6) 그런데 그 잔치에 참여할 자들도 있고 그렇지 않을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왕이 잔치에 초청해도 오지 않는 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마22:2-14, 눅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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