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한국교회는, 좋은 교회 공동체이고자 지향해 온 다른 가치들에 비해 성 평등에는 무관심했고, 그로 인해 여성 구성원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방관해 왔다. 극단적 남성 중심 문화였던 고대 중동의 언어로 쓰인 성경 말씀을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재해석하는 노력을 등한시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리더인 목회자와 장로님들은 이 문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부족했고, 교회 내의 많은 여성 어른들은 성 불평등을 내면화하고 새로운 현실을 회피했다. (중략) 당회가 그 어떤 타당한 설명도 없이 여자 성도들을 남자 성도와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대우하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취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이 교회에 다닐 수 있을까?(본문 중)

변수연(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교육학)

 

평생 교회 안에서 살아왔다. 그것은 평생 교회 안에서 여성이라는 나의 성별을 인지하고 살아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별을 인지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좋을 것을 의미할까 나쁜 것을 의미할까? 내 경험상 성별을 인지한다는 것은 언제나 좋지 않았다. 마치 내가 나의 보이지 않는 위장의 존재를 소화가 안될 때에야 인지하는 것처럼, 내가 나의 여성됨을 인지하는 것은 여성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 혹은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에 부딪힐 때였다. 교회 내에서 남성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이나 할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좋지 않다. 교회라는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서, 그것도 일주일에 한두 번 모이는 사회기관에서 매 순간순간 성별을 인지해야 하는 경험은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 비생산적이다. 비생산적인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나는 감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진리를 통한 자유를 선언한다. 하나님을 아는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고 받아들이는 진리를 통해 우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다.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은혜보다는 굴레로 작용해 온 성별에 대해서도 진정한 자유함을 주시기를 희망한다.

지난 나의 삶을 돌아보니 나의 삶을 구성해 온 수많은 사회기관, 즉 가정, 학교, 회사, 각종 비공식적 공동체, 그리고 국가 중에서 교회는 가장 가정과 닮았고, 그래서 성별을 가장 빈번하게 인식하게 했던 기관이었다. 전통적인 가정과 교회에서는 사람의 능력이나 적성보다는 성별을 통해 조직 내에서의 역할이 정해지고 그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교회의 단위는 가정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의 운영 방식대로 교회도 운영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 내게 일어난 사건은 그러한 교회의 맥락의 깊은 뿌리에 닿아 있다.

 

 

우리 교회는 도농복합지역에 세워진 아주 오래 되고 가족적인 교회다. 전통적으로 농사를 짓는 교인들에 의해 세워졌지만 인근 대학과도 가까워 대학생들도 많고, 도시에 사는 젊은 가정들도 꽤 있다. 매년 아기가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할 수 있는 드문 시골교회이기도 하다. 농촌목회를 지향하는 교회로 인근 지역사회를 위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려는 교인들이 많다. 한마디로 좋은 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에 다닌 지 5년이 되는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오래 된 제도가 있다. 바로 남성 서리집사 이상만 주일예배 대표기도를 하는 제도였다. 그 어떤 공식적 이유도 없이 그런 제도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아마도 젊은 학생들이 간간히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고, 나 역시 친한 장로님을 통해 시정을 제안했으나 좀처럼 변화가 없다가 2년 전 결국 목사님께서 여성 권사님들과 남성 안수집사들이 돌아가며 대표기도를 하자고 제안하셨다. 그러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여성 권사님들이 거부하신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는 주일날 밥하기도 힘든데 기도까지 하라는 겁니까?”

권사님들의 단호한 거부에 목사님은 후퇴하셨다. 기도를 부담스럽게 느끼시는 연세 높은 권사님들도 많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없다는 판단이셨을 것이다.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고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았다. 난 두고 볼 수 없어 그럼 남자들 중에서도 ‘안수집사’같은 공식적인 명분이 있는 사람들에 한 해 대표기도를 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야 표면적으로라도 우리 교회가 막연한 성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가 코로나19가 갑자기 들이닥쳤고 대면예배를 시작한 후 주일날 두 번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주일날 식당봉사는 없어진 상태에서 예배를 두 번 드리게 되니 안수집사 이상의 남자성도들은 너무나 자주 주일예배 대표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제직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예배의 수가 두 배로 증가했고 앞으로 한 동안 그럴 것 같으니 이 참에 남녀 서리집사 이상으로 대표기도를 하자는 것이었다. 기도가 낯설다면 교육도 받고 공예배 기도를 미리 써와서 낭독하자고 제안했다. 이번에도 권사님들은 반대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다 속깊은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이 변한다 해서 교회도 그렇게 빨리 변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도는 영적 활동인데 (여자 성도들이) 미리 써와서 읽는 것이 과연 기도라 할 수 있을까요?”

기도라는 영적 활동에 대해 성별을 인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숨 막히는 벽이 느껴졌다. 그 제직회에서 발언한 유일한 남성은 가장 나이 어린 미혼의 서리집사였다. 그는 이 문제가 어린 학생들이나 대학생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이고, 교회를 떠나게 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역설하면서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목사님은 결국 이 문제를 당회에서 결정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셨고 우리는 지금도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권사님들은 그렇게 주일예배 기도를 거부하시는 것일까? 목사의 사모이자 선교사로 살다가 결국 목사 안수까지 받은 친정어머니를 떠올려 본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친정어머니는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성별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봉사’하면서 교회를 꾸려 가야 한다고 믿으신다. 기독교 서점을 운영하실 때 내가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으려 가져가면 ‘네가 왜 그런 것을 읽느냐’고 나무라셨다. 우리 어머니 같은 분에게 교회가 여성에게 할당하는 봉사의 자리는 어디인가? 매주 점심식사를 마련하고 때때로 교회 행사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고 11월이면 엄청난 양의 교회 김장을 해야 한다. 주일예배 때는 돌아가며 헌금위원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강대상 위에 목사님을 위한 예쁜 물잔을 가져다 놓을 책임이 부여된다. 아직까지도 우리 교회의 주일학교의 책임자는 남자 장로님들이며(남자 장로님밖에 없어서) 대부분 교사들은 여자 성도들이다. 여자와 남자로 나눠진 각 전도회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 교회 행사에 필요한 일들을 분담한다. 이 역시 음식준비는 여성들에게 무거운 물건 나르기는 남성들에게 주어진다. 구역예배, 혹은 모둠모임 등으로 불리는 주일 오후 모임은 가족 중심으로 나눠지지만 그 외의 모든 봉사 역할의 기준은 단연 성별이다. 현대의 가정 내에서도 희미해지고 있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아직도 견고한 곳이 한국 교회이다. 남자와 여자의 공간을 양분하여 그 사이에 나무벽을 놓고 예배했던 개화기 교회의 모습이 비가시적인 제도로 통용되고 있다. 거기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이 한국 교회 내에서 아직 제대로 제기된 바 없고, 개인적인 불만들에 대해 목회자들이나 교회 어른들은 ‘교회의 덕’이니 ‘성경의 가르침’이니 하는 말로 대충 얼버무린다. 교회 내의 성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좀 높아질 양이면 ‘차별(discrimination)이 아닌 구별(differentiation)’처럼,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인종주의와 다름없는 논리로 대응한다. 굳이 ‘구별’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의 완전한 성평등을 교회가 세상에 앞서 달성해 보려는 생각은 도대체 왜 하지 않는 것인가? 그저 교회 내에 활기찬 북적거림을 만들기 위해 모두에게 ‘적절하고 가장 하기 익숙한’ 역할을 배분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큰 목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젊은 세대는 그러한 교회 내의 불공정한 역할놀이의 의미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우리 교회는 세습과 극우적 정치 선동, 소수자 혐오가 난무하는 한국 교회에서 분명 건강하고 좋은 교회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 같은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좋은 교회 공동체이고자 지향해 온 다른 가치들에 비해 성평등에는 무관심했고 그로 인해 여성 구성원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방관해 왔다. 극단적 남성 중심 문화였던 중동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말씀을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재해석하는 노력을 등한시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리더인 목회자와 장로님들은 이 문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부족했고, 교회 내의 많은 여성 어른들은 성불평등을 내면화하고 새로운 현실을 회피했다. 혹자는 교회에서까지 성평등을 주장해야 하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번 일을 당회에 맡기고 나서야 내가 처한 위기를 깨달았다. 너무너무 좋은 교회지만, 당회가 그 어떤 타당한 설명도 없이 여자 성도들을 남자 성도와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대우하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취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이 교회에 다닐 수 있을까? 다닌다면 나는 내 자신에게 어떤 명분을 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 역시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믿는다. 교회의 성차별적 관행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만 제대로 된 설명이나 사과를 들어본 적 없는 나의 후배들, 나의 딸들이 너무 많다. 이들 여성 청년세대가 현재 한국 교회에게 남은 최후의 보루인 것을 한국 교회는 알기나 할까. 그래서 이 참에 한국 교회내에 남아 있는 성불평등적 문화를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했다. 내 딸들이 20년 후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 행복하게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 교회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내는 편지라 생각해 주길 바란다.

 

<성평등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우리의 약속> 포스터. 본 포스터는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제작하였습니다. 기독교반성폭력센터는 교회, 기독교인이 모인 공동체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상담하고 있습니다. 상담전화: 02-364-1994 (이미지 출처: 기독교반성폭력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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