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은 언제, 어떻게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기 시작했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박근혜와 최순실(지금은 최서원으로 개명)의 국정 농단 사태부터다. (중략) 공정에 대한 열망을 안고 받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대통령 취임사는 사뭇 설레게 했지만, 그런 선언만으로는 기회나 과정이나 결과가, 평등하거나 공정하거나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리어 저 멋진 말은, 이후부터 백가쟁명식으로 벌어지는 공정에 관한 말싸움에 동원되는 ‘떡밥’이 되고 말았다.(본문 중)

박제민(녹색당서울특별시당 사무처장)

 

모두가 공정을 말하지만

공정이 시대의 화두라고 한다. 액면 그대로만 보자면 좋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이 날이 갈수록 나아지는가 싶기도 하다. 정말 그런가? 확실한 것은, 모두가 공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드러내 놓고 “나는 사실 불공정한 사람입니다”라든지, “불공정이 너무너무 좋아요!”라고 하지는 않는다.

‘공정’(公正)을 논하기에 앞서 그 뜻부터 알아보자.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뜻이다. 뜻풀이에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이 붙어 나오면 또 찾아봐야 한다. ‘공평하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르다’는 것이고, ‘올바르다’는 것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고르며,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른 것이 공정인 것이다. 오, 굉장히 좋은 말 같은데, 실지로 가능한 일인가?

공정은 언제, 어떻게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기 시작했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박근혜와 최순실(지금은 최서원으로 개명)의 국정 농단 사태부터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민간인 한 사람과 공모했거나 혹은 그에게 휘둘려서 국가 권력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했음이 드러났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이재용조차도 말을 사다 바칠 수밖에 없었고, 그 대가로 회사의 경영권 세습에 도움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 많은 사람이 공정을 외치기 시작했다. ‘동물소리동호회’ 같은 듣도 보도 못한 단체의 깃발을 든 이 시대의 청년들이거나, ‘훌라송’을 부르며 오랜만에 뭉친 그 시절의 청년들이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최순실을 구속하라! 이재용을 처벌하라! 재벌도 공범이다!” 한목소리로 외쳤던, 어느 추운 겨울밤이 기억 속에서 아련하다.

공정에 대한 열망을 안고 받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대통령 취임사는 사뭇 설레게 했지만, 그런 선언만으로는 기회나 과정이나 결과가, 평등하거나 공정하거나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리어 저 멋진 말은, 이후부터 백가쟁명식으로 벌어지는 공정에 관한 말싸움에 동원되는 ‘떡밥’이 되고 말았다.

 

 

서로가 말하는 공정이 다르다

잘나가던 문재인 정부가 처음으로 공정성 논란에 휘말린 것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여자아이스하키 종목에 남북단일팀을 만들겠다고 발표하면서였다. 남북한의 극적인 화해 분위기에 따라 단일팀을 구성하는 것을 보고 ‘현정화-리분희 조’를 떠올리며 감격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갑자기 단일팀을 구성하면 그동안 국가 대표가 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던 사람에게 피해가 간다며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개 감격하는 쪽이 ‘그 시절의 청년’들이고, 화를 내는 쪽이 ‘이 시대의 청년’들이었기에, 이 문제가 마치 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공정에 관한 생각 차이 때문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 청년’들은 ‘이 청년’들을 통일의 민족사적 의미도 모르는 철부지라 생각했고, ‘이 청년’들은 ‘그 청년’들에 대해 …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현실을 살아 내는 것도 팍팍한데 남한테 줄 생각이 어딨어!’ 여하튼 단일팀 구성 논란과 그에 따른 ‘공정 동맹’의 해체는 매우 뜻밖의 사건처럼 보였고, 요즘 청년들은 유달리 공정에 관해 민감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과연 그런가?

2019년 8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가 입시 과정에서 불공정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자, 조국 후보자의 직장인 S대, 그의 자녀가 다녔다는 K대, 그리고 K대와 자꾸 엮이는 Y대 등 이른바 ‘스카이’(SKY) 청년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들에게는 경쟁자가 특혜를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불공정이다. 하지만 매해 수능 시험을 치는 날, 제발 한 사람도 죽지 않기를 기도해도 쉬이 응답되지 않는 현실에는 무관심하다. 심지어 K대에서는 지역의 분교 학생이 본교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안건을 놓고 투표까지 했다고 하니, 그 ‘공정한’ 절차적 민주주의에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20년 6월,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2,143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하자, 이번에는 취업을 준비하던 청년들이 난리가 났다. 이들에게 공정이란 오랫동안 공부해서 시험을 통과한, 그러니까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정규직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똑같은 일을, 심지어 오래 했다고 해도, ‘자격 없는’ 이들과 직업이 주는 안정과 혜택을 나눠 갖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면 자리가 얼마 없으니까. 이 일은 ‘인국공 사태’라는, 왠지 전위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줄임말로 불리며 논란이 됐다.

2020년 8월부터 9월까지 일어난 의사 파업은 전공의들을 중심으로,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리고, 공공의대를 설립하며, 지역의사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에 반발하며 일어났다. 아시다시피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온 국민의 마음이 절박하던 그때! 이들에게 정부안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불공정이었다. 특정 분야나 지역에 의사 수가 부족한 것은 분명 다른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젊은의사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이 꾸려졌고, 출범식에서 “공정성 없는 정부에 맞서 의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청년들로서 모든 청년들과 함께 연대한다”라며 불꽃 같은 기세를 내뿜었다. 저 ‘모든’은 내가 아는 그 ‘모든’이 맞을까? 이 파업은 좀 이상했는데, 일단 사용자 측과 아무런 갈등이 없어 보였고, 한쪽 언론으로부터는 무한한 지지를 받았다. 하이얀 가운을 입는 사람들의 파업은 푸르른 작업복을 입는 사람들의 그것과 정말 달랐다.

 

나는 어느 편인가?

모두가 공정을 말한다. 하지만 서로가 말하는 공정은 다르다. 공정의 불공정이다. 솔직한 질문 앞에 서자. 내가 말하는, 나의 공정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또한 내가 누구의 공정에 편들 것인가 묻는 것이기도 하다.

마태가 쓴 복음서에 나오는 포도원 사장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그 포도원 사장은 이른 아침뿐만 아니라,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5시에 연달아 일용직 노동자를 찾아 근로 계약을 맺는다. 오후 5시에 온 노동자가 1시간 일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퇴근 시간은 오후 6시였던 것 같다. 어쨌든 고용된 시간의 역순으로 임금이 지급됐는데, 모두 똑같이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최근에 우리 농촌에서는 하루 품삯이 10~12만 원 정도 한다니 참고하시라.

아니, 일한 시간이 다른데 임금이 똑같다니! 이 얼마나 신성하고 무결한 ‘자본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짓인가. 노동자들의 항의는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사장은 말한다. “제 맘인데여. 제게 공정한 일이, 왜 님에게는 불공정한 일이 되나여?” 현실에서는 이런 사장을 찾기 힘들다.

 

다시 묻는다. 나는 어느 편인가? 당신은 어느 편인가?

이 이야기의 훈훈함만 느끼고 싶고 그 교훈을 현실에 절대 적용하기 싫은 사람은, 이것을 그저 풍자로 여기고자 한다. 반대로, 그러니까 정말 그들과는 반대로, 이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이뤄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성서의 이 말씀을 붙잡는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마 20:1). 줄이면 “하늘 나라는 (…)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더 줄이면 “하늘 나라는 ‘이’와 같다.” 이게 하나님 나라고, 이게 하나님 나라의 공정이다, 뭐 그런 말 같다.

공정이 이 시대의 화두라고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정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시대의 청년들이 공정에 민감하다고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청년이란 어떤 이야기의 훈훈함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실지로 이뤄지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세포의 늙고 젊음과는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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