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 주위의 이웃들을 물질과 기도로도 도울 수 있지만, 찬양만큼 좋은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는 이들의 곁에서 함께 찬양을 나누며 기도로 연대하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찬양은 결국 하늘에는 영광이 되고, 부르고 나누는 우리에게는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본문 중)

김영민1)

 

우리에게 찬양은 어떤 의미였을까

 

최근 큰 화제가 되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D.P.>를 보면서, 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훈련소 입소 후 며칠이 지난 토요일 낮, 청소와 빨래 등 개인 정비 시간에 무심코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한 조교가 정색하며 다가와서는 “지금 노래가 나옵니까? 노래하지 않습니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조교 개인의 판단이었는지, 아니면 장난기 어린 모든 행동을 제한하며 군기를 확립하고자 중대 차원에서 통제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훈련소에서는 애국가와 군가 외에는 어떤 노래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약간은 허탈한 마음으로, 나치에 저항한 독일 청년 조직 “백장미단”의 이야기를 담은 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서 나치즘으로 무장한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이 한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던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다 다음날, 주일 종교 활동을 위해 부대 교회에 갔는데, 반가운 찬양 소리에 감정이 북받쳐 올라 사연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엉엉 울기만 하다가 정작 찬양은 한 소절도 부르지 못하고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의 모임들이 대부분 사라진 지금, 찬양을 부르고 나누는 자리도 사라지거나 축소되었습니다. 찬양대는 모이지 못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고, 예배 시간에도 찬양을 작은 소리로 부르고, 특송은 독창으로만 진행해 온 것이 몇 달을 넘기고 있지요.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한 조치이기에 기꺼이 동참하기는 하지만, 찬양할 기회들이 제한되다 보니 당연하게 여겼던 찬양의 자리가 사뭇 소중하게 느껴지면서, “찬양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던가”를 새삼스럽게 묻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과 어떤 마음으로 찬양을 해야 할까”도 고민해 보게 됩니다.

 

하늘을 향하는 찬양, 나를 새롭게 하는 찬양.

 

대구의 신천지 교회를 중심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급격히 확산하던 작년 2월 말, 모든 예배당이 폐쇄되고, 교회들은 갑작스럽게 온라인으로 예배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찬양대와 찬양팀 순서에 전체 대원이 함께 설 수 없고 특송은 독창으로만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서, 한 곡을 준비하여 교회로 향했습니다. 교역자들만 10여 명 모이게 된 예배당 무대에 서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사실 그때 제 마음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저와 제 가족이 전혀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었고, 여러 상황들이 원망스러워지면서 짜증이 쌓여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그 찬양의 가사가 당시 저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회중석에 앉아 있던 한 목사님이 찬양을 듣던 중 왈칵 눈물을 쏟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나누는 찬양에 누군가가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의 마음을 추스르고 찬양 가사 하나하나에 더 집중하며 찬양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찬양의 가사가 제 영혼 가까이 다가와 믿음의 고백이 되는 것을 느꼈고, 예배 이후에도 그 찬양은 한동안 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찬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다’, ‘찬양은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라는 대답을 해 왔습니다. 정답에 가까운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정의들이 충분치 않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무대에서나 회중석에서 성도들이 마음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 무대의 찬양은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찬양을 드릴 때, 나 자신과 성도들이 그 찬양에 반응하는 모습(소위 ‘은혜를 받는’ 모습)도 마주하게 되는데, 이런 장면에서도 ‘찬양은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니, 하나님께서만 받으셔야 한다’라고 말해야만 하는지 질문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상황과 형편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가사와 곡조에 담아 찬양을 부릅니다. 그 찬양들은 사람마다 상황이 다양하므로 해석과 고백도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며, 각각 그 온도도 다 다릅니다. 어떨 때는 시편의 찬양시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찬양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시편의 탄원시처럼 자신의 여러 절망스러운 상황과 처지를 한탄하며 찬양을 부르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찬양을 부르기만 해도 뜨거운 눈물이 쏟아질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가사에 공감하거나 동의하지 못한 채 냉랭하게 찬양을 부를 때도 있습니다. (찬양대와 찬양팀으로 봉사하는 분들은 모두 비슷한 마음을 느껴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상황과 감정 속에서 마지못해 탄원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보시며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그저 찬양을 들으시고 영광을 받기만 하실까요? 저는, 하나님이 그렇게 드리는 찬양을 들으시면서 그들을 고이 품어 주시고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더 나아가 멀게만 느껴지던 찬양의 가사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로 다가와, 우리의 삶을 담아내는 찬양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한 어느 신학자의 말을 빌려 생각해 보자면, 찬양은 하나님을 이야기(노래)하고, 하나님을 향해 올려드리는(찬양) 것이면서, 동시에 찬양을 드리며 고백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우리의 인식 틀 안에서 나름 최선의 고백으로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함과 동시에, 성도 자신의 연약한 믿음과 삶을 돌아보게 하며, 영혼을 성화와 성숙으로 이끄는 기도가 되고, 또,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위로와 힘을 줍니다. 특히,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요즘, 찬양을 부름으로써 우리 마음에 따뜻한 위로가 임하고 살아갈 힘이 샘솟는 경험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드려야 하는 찬양의 의미가 변질된 현상이 아니라, 그 찬양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위로의 선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찬양은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시고 성숙하게 해 주시는 상호 교류적(interactive)인 노래입니다.

 

이웃을 향하는 찬양, 나를 위로하는 찬양

 

그렇게 찬양은 하늘을 향하면서도 나를 향하기도 하는데, 또 내 옆의 성도들과 이웃을 향할 때도 있습니다. 16년 전, 직장암 수술을 앞두고 계신 어머니와 함께 병실에 있을 때입니다. 저는 음악을 전공하고 여러 곳에서 찬양 사역을 하고 있었지만,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운 상황 앞에서 기도의 언어도 사라지고 찬양의 입술도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저 흐르는 시간 앞에서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 친구와 형, 누나가 불쑥 찾아와 기타를 꺼내어 찬양을 불러 주고 기도를 해 주었는데, 저와 우리 가족은 그 찬양으로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 찬양은 친구들이 하늘을 향해 부른 간구의 찬양이기도 했지만, 어려움에 빠진 친구와 아파하는 어머니를 향한 공감과 위로의 찬양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찬양의 의미와 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위해 찬양을 불러 주어야 할 자리라면, 나도 어디든 달려가서 찬양을 나누어야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그 이후로 환우들이 있는 자리나 고난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에서 노래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으면, 주저 없이 찾아가 노래를 나누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어려움에 빠진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망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노래를 빼앗기고 찬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가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 찬양을 나누면,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활짝 웃기도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힘을 내겠다고 반응하기도 합니다. “찬양을 듣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 같았어요”라고도 말합니다. 저는 그 모습 속에서 찬양으로 그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그렇게 찬양 속에서 위로가 흘러감을 느끼게 될 때, 찬양을 부르는 나 자신에게도 큰 위로와 은혜가 돌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나, 너, 우리 모두에게 신비한 상호 교류(interaction)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의 이웃들을 물질과 기도로도 도울 수 있지만, 찬양만큼 좋은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는 이들의 곁에서 함께 찬양을 나누며 기도로 연대하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찬양은 결국 하늘에는 영광이 되고, 부르고 나누는 우리에게는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함께 찬양할 수 있기를

 

이렇게 찬양은 하늘을 향하지만 결국 나를 성숙하게 하고, 이웃을 향해 나누지만 우리 모두를 위로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국 속에서 우리가 이러한 찬양의 기쁨과 유익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찬양을 마음껏 불러본 것이 언제인지, 나지막이 읊조리던 찬양마저도 잃어버린 채 일상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찬양을 부르며 은혜를 나누었던 상호 교류들이 그리운 요즘입니다. 찬양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에서, 하늘을 향한, 이웃을 향한, 나를 향한 찬양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찬양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직접 찬양을 부르며 은혜를 누릴 수도 있겠고, 청중석에서 찬양을 은혜롭게 감상하는 순간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또, 주위 사람들과 은혜로운 찬양의 유튜브 링크를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찬양은 함께 부를 때 더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메마른 시대 속에서라도 여러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찬양하고 이웃을 향해 찬양을 나눔으로써, 우리 영혼이 더 깊어지고 풍요로워지며 이웃에게도 위로와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1) 새벽이슬 간사, 높은뜻덕소교회 찬양대 지휘자, 연세대 교목실 채플찬양 담당 겸임교수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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