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어느 편인지가 정해지면 그제서야 그 사람과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정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이면과 다른 모습들을 알아가는 것은 그 이후였다. 영화 <벨파스트>의 주인공인 9살 버디의 눈으로 본 벨파스트의 모습을 통해, 나의 잣대로 상대를 구별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선택적으로 따르려 했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본문 중)

최주리(기윤실 청년활동가)

 

“그 사람을 보면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얼마 전, 어느 친구와의 대화에서였다. 친구는 앞으로 자주 마주하게 될 직장 상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며, 정말 좋은 사람인데 가톨릭 신앙이라는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를 전도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빈틈없이 독실한 사람이라 앞으로 그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영적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며 나에게 응원의 기도를 부탁했다. 나 또한 누군가를 알아가기에 앞서 종교라는 거름망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던 때가 있었다. 종교에 따라 ‘너희’와 ‘우리’가 나뉘어졌고, 혹여나 같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과 너무 친해지거나 연애를 하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일단 어느 편인지가 정해지면 그제서야 그 사람과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정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이면과 다른 모습들을 알아가는 것은 그 이후였다. 영화 <벨파스트>의 주인공인 9살 버디의 눈으로 본 벨파스트의 모습을 통해, 나의 잣대로 상대를 구별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선택적으로 따르려 했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영화 <벨파스트>(2021) | 감독 케네스 브래너 | 98분

 

영화 <벨파스트>가 보여주는 1969년의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는 우리의 어린 시절 고향과 다를 바 없었다. 벨파스트에서 나고 자란 버디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골목을 누비며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신나게 놀다 보면 저녁을 먹으라는 엄마의 부름에 하나둘 자기 집으로 향하던 평화로운 그 시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돌아가려던 버디는 화염병과 곤봉, 돌멩이를 들고 소리 지르며 건물에 불을 지르고 창문을 부수는 무리를 마주하게 된다. 이들은 버디의 동네에 사는 가톨릭 신자들을 내쫓으려는 개신교 세력이었다. 아수라장에서 버디는 간신히 엄마와 만나 집으로 달려가 숨었지만, 갑자기 왜 사람들이 이웃집을 부수고 불을 지르는지 알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 뿐이었다.

 

당시 벨파스트에서는 북아일랜드 분쟁이 한창이었고 그로 인해 개신교와 가톨릭의 갈등이 극심하여 사는 지역이 나뉘어져 있고 구역을 나누는 벽이 세워져 있었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를 장악하기 위해 영국에서 북아일랜드로 많은 이주민을 보냈고, 이후 1937년에 아일랜드 남부지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내에서 영국령으로 남기 원하는 영국계 개신교파와 독립을 원하는 아일랜드계 가톨릭파의 갈등이 극심해졌다. 1998년 벨파스트 평화협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극심한 차별과 테러, 무장 투쟁과 유혈 진압이 난무했다.

 

버디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다 똑같은데 가톨릭과 개신교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가톨릭에서는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해결된다고 말하고 개신교에서는 고통스러운 죽음 끝에 아름다운 천국과 끔찍한 지옥 중에서 어디로 갈지를 택하라며 무섭게 닦달한다. 점점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영국 본토를 오가며 일하는 버디의 아빠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벨파스트를 떠날 것을 고민하게 된다. 버디의 엄마는 모든 것이 익숙하고 평생 살아온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이방인 취급과 차별을 당할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버디에게는 이러한 걱정들이 중요치 않다. 좋아하는 소녀의 옆자리에 앉고 수학 시험을 잘 보고 가족들과 영화를 보고 웃고 떠드는 게 더 중요할 뿐이다.

 

영화 <벨파스트> 스틸컷.

 

이 영화의 감독인 케네스 브래너는 자신의 고향인 벨파스트를 배경으로 자신의 추억을 담아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벨파스트의 전경을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느 벽에 이르러 카메라가 벽 너머를 비추면, 1969년 벨파스트로 전환이 되고 컬러였던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게 된다. 이후 버디네 가족이 보는 영화와 TV 화면만이 컬러로 표현된다. 흑백 화면은 흰색과 검은색 두 개의 색만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고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어 단순하고 밋밋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흑백 화면은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수많은 회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색이 초록색이거나 파란색, 혹은 갈색이어도 알 수 없고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채로운 색으로 만드시고 제각기 고유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드셨다. 그러나 그 차이를 차별과 편견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흑백 화면으로 서로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 편’과 ‘내 편’이 의미 없어지고 결국은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흑백의 시선으로 말이다.

 

봉합되지 못하고 점점 극심해지는 갈등에 버디네 가족은 결국 벨파스트를 떠나게 된다. 벨파스트에서의 마지막 날 버디는 좋아하던 소녀에게 꽃과 카드를 주며 다시 돌아오겠다고 인사한다. 소녀를 뒤로하고 아빠에게 돌아온 버디는 묻는다. “아빠, 쟤랑 저한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쟤는 천주교일까요?” 아빠는 버디에게 그 아이가 힌두교이거나, 남침례교, 혹은 채식만 하는 적그리스도일 수도 있지만 친절하고 올바르며 서로를 존중한다면 그 아이와 가족들이 언제든 집에 와도 좋다고 답한다. 종교 다원주의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지 ‘나와 같은 이웃’만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직업이나 외모, 조건 등 그 사람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존재 자체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도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미워할 권리가 주어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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