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실습을 빌미로 한 노동력 착취, 학생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장 실습 제도, 책임을 회피하고 성과 위주의 경쟁을 부추기는 하청 구조, 인격을 보호받지 못하는 감정 노동의 문제는 여전하다. 아무리 외쳐도 변하지 않는 현실을 볼 때 낙담하고 포기하기 쉽다. 바뀌지 않는 현실임을 알면서도 마땅히 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변화를 외치는 선지자적 비관주의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최주리(기윤실 청년활동가)

 

지난 2017년, 전주의 콜센터에서 현장 실습을 하고 있던 고등학생 홍수연 양이 저수지에 뛰어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수연 양은 특성화고 졸업을 앞두고 콜센터의 해지 방어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과도한 업무 강도와 계약서와 다른 열악한 근무 환경과 처우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한 지 4개월이 되던 2017년의 겨울, 결국 홍수연 양은 저수지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등에 세간의 시선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다음 소희>(2023. 2. 개봉)는 그 사건으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그 사건을 다시 소환하여 이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았다. 무수히 쏟아지는 사회의 각종 사건, 사고와 비극 속에 우리가 이 영화를 지금 주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다음 소희>(2023) | 감독 정주리 | 138분

 

어느 지하 연습실. 소희는 춤을 추고 있다. 매번 같은 동작에서 실수를 하고 넘어지지만 그 때마다 다시 일어나 춤을 춘다. 포기하고 다음 동작으로 넘어갈 법도 한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하는 소희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에는 소희를 응원하는 마음이 슬며시 자리 잡는다.

 

소희는 특성화고 동물미용과 졸업을 앞둔 3학년 학생이다. 전공과는 다르지만 대기업 하청 콜센터에서 현장 실습으로 일하게 된 소희는 사무직 여직원이 되었다는 기쁨에 부풀어 출근한다. 근로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얼레설레하다 서명을 하고 시작하게 된 업무는 콜센터 업무 중에서도 가장 힘든 편에 속하는 해지 방어 업무였다. 그렇지만 소희는 열심히 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취소하고 밤늦게 남아 미달된 콜 수를 채웠다. 첫 출근의 생기와 기대는 사라졌지만,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욕설과 성희롱도 묵묵히 참았다. 아이가 죽어서 다른 혜택이나 위약금도 상관없으니 그냥 해지해 달라는 체념 어린 고객의 말에도 기계처럼 새로운 제품을 홍보하며 해지 방어 상담을 이어 간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그렇게 몸과 마음을 갈아 넣으며 실적 1위를 찍었으나, 약속된 인센티브는 지급되지 않았다. 팀장은 정직원이 아닌 현장실습생들이 바로 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센티브는 몇 주 후에 지급된다고 말할 뿐이었고, 월급은 알 수 없는 각종 명목이 공제된 후에 계약서 상의 금액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금액으로 지급되었다. 소희는 이러한 부당함에 열심히 저항했다. 부당 노동을 강요하고 상담사를 착취하는 회사의 구조를 폭로하고 이에 일조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회사 주차장에서 번개탄을 피워 목숨을 끊은 전 팀장의 죽음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할 때, 전 팀장의 죽음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버텨보기도 하고, 아무도 가지 못하게 한 그의 장례식에도 몰래 다녀온다. 그러다 결국 소희는 부당한 처우와 실적 압박, 폭언을 일삼는 새로운 팀장에게 소리 지르며 반항하다가 정직 3일의 징계를 받게 된다.

 

이를 알게 된 담임 선생님은 소희에게 말한다. “세상일이 다 그래. 우리 소희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학교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선생님들이 애쓰고 있는데 이렇게 학교 평판을 떨어뜨리면 후배들의 취업까지 막게 된다며, 괴로워서 울고 있는 소희에게 죄책감을 지울뿐만 아니라 잘 참고 다시 출근하라고 떠민다. 그렇게 정직 3일이 지나 다시 출근하기 전날, 소희는 모든 것을 소진한 얼굴로 저수지로 걸어들어간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연인 유진은 영화의 반이 지나서야 등장한다. 소희의 사건을 조사하게 된 경감 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매뉴얼에 따라 사건을 단순 자살 사고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이상한 낌새를 발견하고 소희의 흔적을 쫓게 된다.

 

소희의 학교에서는 교육청이 취업률에 따라 인센티브와 지원금을 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업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노동청에서는 고등학생의 현장 실습은 해당 교육청의 소관이라고 말하고, 교육청은 교육부의 정책에 따라 다른 지역 교육청과도 취업률로 경쟁하는 상황 속에서 일개 공무원인 자신들이 바꿀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소희의 회사에서는 소희가 원래 가정불화가 있었고 이전에도 자해를 하는 등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며 직원들의 입단속을 요구한다. 오히려 소희의 죽음으로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말도 더한다. 가족들은 일하느라 바빠서 이런 학교와 회사인줄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 아무도 현장실습생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은 소희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장 실습 중에 퇴사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빨간 명찰이나 조끼를 입게 해서 취업률을 떨어뜨린 사람이라는 죄책감을 갖게 하기 때문에, 억지로 버티거나 자퇴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알코올 중독이나 인터넷상의 폭언, 각종 산업 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이 영화에는 억울한 사건을 파헤치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고 통쾌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열정 넘치는 정의의 사도나 해결사는 없다. 보통의 현실이 그렇듯이 말이다. 혹자는 소희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상황을 보았다면 퇴사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소희는 회사의 선배들과 학교 친구들의 모습, 이를 방관하는 학교와 교육청, 경찰들을 보면서, 자신과 같은 약자들을 보호해 줄 마음이 별로 없는 이 사회에서는 다른 곳에 가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잘못을 책임지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소희는 열심히 삶을 살았음에도 그저 ‘가정불화 속에서 정서적으로 불안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잘못’을 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던 소희를 죽음으로 내몬 원인이 정말 소희의 ‘잘못’ 때문이었을까?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전주의 홍수연 양 사건 이후로 현장실습생사망대책회의가 만들어졌고 홍수연 양이 일했던 LG U+콜센터인 LB휴넷은 유가족에게 대면 사과를, 원청인 LG U+는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많은 현장실습생이 권리의 사각지대에서 목숨을 잃거나 몸과 마음을 다쳤다. 최근까지 직업계고 현장실습생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분류되지 않아서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보건법 등으로 보호받지 못했으나, 2023년 3월에 직업교육훈련촉진법 개정안이 의결되어 직장 내 괴롭힘, 강제 근로와 폭행 금지 조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장 실습을 빌미로 한 노동력 착취, 학생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장 실습 제도, 책임을 회피하고 성과 위주의 경쟁을 부추기는 하청 구조, 인격을 보호받지 못하는 감정 노동의 문제는 여전하다. 아무리 외쳐도 변하지 않는 현실을 볼 때 낙담하고 포기하기 쉽다. 바뀌지 않는 현실임을 알면서도 마땅히 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변화를 외치는 선지자적 비관주의가 우리에게 필요하다.1)

 

아무도 잘못을 책임지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저수지에 가라앉았던 소희의 핸드폰이 발견된다. 소희의 마지막 순간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켠 핸드폰에는 다른 것은 다 지워졌지만 영화의 첫 장면에서 줄곧 실패했던 춤 동작을 성공하고 환하게 웃는 소희의 영상만이 남아 있었다. ‘다음 소희’에게 다음을 약속해 주기 위해, 우리는 이 영화를 보아야 하고, ‘다음 소희’가 다음 동작을 성공할 수 있도록 우리는 이 사회에 한 번 더 변화를 외쳐야 한다.

 


1) 손봉호 교수가 제시한 ‘선지자적 비관주의’의 태도에 대한 설명은 [기윤실아카데미] “그리스도인의 삶과 길” 강좌1 3강 “선지자적 비관주의: 기독교적 역사철학과 그리스도인의 사회 공헌”을 참고하라.

 

* <좋은나무> 글을 다른 매체에 게시하시려면 저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02-794-6200)으로 연락해 주세요.

* 게시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표기하셔야합니다.
(예시)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26627/ (전재 글의 글의 주소 표시)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좋은나무> 뉴스레터 구독하기

<좋은나무>에 문의·제안하기

문의나 제안, 글에 대한 피드백을 원하시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편집위원과 필자에게 전달됩니다.
_

<좋은나무> 카카오페이 후원 창구가 오픈되었습니다.

카카오페이로 <좋은나무> 원고료·구독료를 손쉽게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_

 

 

 


관련 글들

2024.06.28

“왜 우리는 뉴진 스님이 없을까요?”(박진규)

자세히 보기
2024.06.26

: 인샬라(홍종락)

자세히 보기
2024.06.24

전쟁과 기억(이정일)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