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와 성서 전통 전반에서 파레시아는 대체로 권리나 요구, 자기 의사를 오롯이 표현하거나 자유와 신앙을 숨김없이 충만하게 표현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자유와 권리, 신앙을 온전히 표현할 때 사용된 이 파레시아 개념이 어떻게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부상했는가? 20세기 중후반 주체성, 권력, 지식 등과 같은 핵심적인 철학의 주제와 관련해서 독특한 고고학적, 계보학적 통찰을 보여준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는 이 파레시아에 대한 이해의 역사적 변이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주체의 특수한 주체화를 이룩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본문 중)

김동규1)

 

파레시아(παρρησία; parrhesia)는 그리스어 판(pan, 모든 것)과 레시스(rhesis, 말함)의 합성어로, ‘전부, 또는 모든 것을 말한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파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든 시민이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공적으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이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공적 장소에서 자유롭게 연설할 권리가 없으면 민주적인 의사 결정과 합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파레시아는 민주주의 체제의 핵심적인 권리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Papademetriu 2018, 18-19).

 

하지만 파레시아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전통에서만 나타난 말은 아니다. 이 말은 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마가복음 8:32, 새번역)라는 구절에서 “드러내 놓고 말하다”라는 표현이 바로 그리스어 파레시아를 번역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말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행동을 설명할 때도 파레시아가 사용된다. 예를 들면,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사도행전 4:31, 새번역)에서 ‘담대히 말함’ 역시 파레시아를 번역한 것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와 성서 전통 전반에서 파레시아는 대체로 권리나 요구, 자기 의사를 오롯이 표현하거나 자유와 신앙을 숨김없이 충만하게 표현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자유와 권리, 신앙을 온전히 표현할 때 사용된 이 파레시아 개념이 어떻게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부상했는가? 20세기 중후반 주체성, 권력, 지식 등과 같은 핵심적인 철학의 주제와 관련해서 독특한 고고학적, 계보학적 통찰을 보여준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는 이 파레시아에 대한 이해의 역사적 변이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주체의 특수한 주체화를 이룩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푸코의 분석은 서양사 전반을 횡단하며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그것을 다 언급할 수는 없고 일부 중요한 변곡점 역할을 하는 특정 시기에 관한 그의 분석만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개념과 사상이 발전적으로 진보하거나 어떤 지식의 축적을 겪는다고 보기보다는 시대별로 특정 개념에 대한 이해가 단절되고, 각 시대의 이해는 다른 시대의 것과 서로 통약 불가능하며, 어떤 불연속적 변이를 겪는다는 데 주목한다. 푸코에 의하면, 앞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계기와도 같이 기능했던 파레시아의 이념은 초기 그리스도교와 4세기 이후 수도원 공동체에서 특이한 굴곡을 보여준다. 진실을 말한다는 게 이전에는 공중에 공개적으로 자기 의사를 말하거나 자신을 둘러싼 주위 세계에 숨김없이 진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면, 초기 그리스도교와 중세 수도원 전통에서는 자신을 숨김없이 말한다는 게 어떤 공개적 장소에서의 말이 아니라 참회의 고백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자기가 어떤 극적 개심을 한 존재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보여 주는 일종의 연극적 주체성을 마련하는 기틀이 되었다. 푸코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푸블리카치오 수이”(publicatio sui) 개념을 해석하면서 이것이 “자기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것은] 두 가지를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다시 말해 죄의 길을 선택하면서 순결보다는 불결을, 하늘보다는 땅과 먼지를, 신앙의 보배보다는 영적 빈곤을 선호한 자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이 영원한 삶보다는 영적 죽음을 선호한 자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그것은 죄인이 죄인으로서 자신의 죽음을 갈망하는 연극의 상연이었다. 그것은 자기 포기의 극적 상연이었다. (Foucault 2004, 73[75])

 

수도원 전통에서는 각 수도권의 계율을 따라 이런 자기 고백과 자기 상연은 의무로서 자리 잡게 된다. 고해 성사나 스승에게 자기 삶을 고백하고 일종의 훈육을 받는 시스템이 자리함으로써 (적어도 수도원에 속한) 주체 역시 이 시스템 안에서 특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 말하자면 이 주체는 자기 자신의 사욕을 포기하고 자기를 그리스도교의 어떤 규율과 진리에 희생시키는 자기-포기의 주체로 서게 된다.

 

구두 표현 행위는 자기희생이다. 사유들을 구두로 표현하는 이 항상적이고 철저하며 희생적인 행위에, 수도원 수도사들에게는 의무였던, 항상적이고 철저하며 희생으로 이 사유를 구두로 표현하는 행위에, 이 항상적인 구두 표현 행위에 그리스 교부들은 엑사고레우시스(exagoreusis)라는 이름을 붙였다. (Foucault 2004, 87[92])

 

푸코는 일차적으로 이런 행위를 단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려는 의도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진실 말하기와 주체의 주체화가 어떤 제도적 상황 안에서 수립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런 해석의 장을 분석하고자 한다. 즉, 고백 안에서 나는 참된 자기가 되는 자기-이해에 대한 해석의 장이 열린다. 이에 그는 초기 교회와 중세의 특정한 그리스도교적 주체성 성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생각에 그리스도교 내에서 우리는 훨씬 더 복잡한 자기 테크놀로지의 전개를 보게 된다. 이 자기 테크놀로지는 존재의 인식−세계의 인식 혹은 자연의 인식−과 자기 인식 간의 차이를 유지하고 있고, 이 자기 인식은 해석되어야 할 객관적인 주어진 것의 장으로서 사유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구체화된다. 그리고 해석자의 역할은 사유의 가장 미세한 움직임들을 꾸준히 구두로 표현하는 작업을 통해 수행된다.…진실 생산은…매우 엄격한 조건 없이는 달성될 수 없었다. 그 엄격한 조건이란 자기희생을 내포하는 자기 해석학이다. (Foucault 2004, 89-90[94-95])

 

이 맥락에서 조금 더 유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자기-해석학적 고백의 또 다른 확장이나 변형, 정확하게는 푸코가 언제나 주목하는 근대에서의 변형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자신이 고백을 수행함으로써 이전의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희생시키면서 자신에 대해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기예가 내포되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목적 관계 안에서의 주체의 형성이 서구의 근대적 주체의 전형이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앞서 수도원에서 이루어진 고백의 훈육은 실은 교회 전체에서 이루어진 고해와 같은 성사의 형태로 신자 전체를 교회가 지도하는 권력 관계로 확장된다. 이렇게 교회의 신도들을 지도하는 사목 권력이 근대적 주체의 전형을 탄생시킨 기제 역할을 했다. 즉, 사목자 앞에서 죄를 고백하거나 품행의 지도를 받음으로써 주체를 통치하는 통치성의 전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목은 두 자기 방식으로 통치성의 단초가 된다. 우선 사목 고유의 절차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법, 구원, 진실 아래 다른 유형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일체의 대각을 통해서 말이다. 사목은 이렇게 통치성의 단초가 된다. 또한 사목은 특수한 주체, 자신의 공덕이 분석적 방식으로 판별되는 주체, 연속된 복종의 네트워크에 종속된 주체, 자신에게 강요된 진실의 추출 행위를 통해 주체화되는 주체를 구성함으로써 통치성의 단초가 된다. 근대 서구의 이런 전형적인 주체를 구성해 냄으로써 비로소 사목은 서구 사회 권력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되었던 것 같다. (Foucault 2004b, 187-88[264])

 

그리스 아고라, ⓒpixabay

 

근대인들은 어떻게 해서 사목 권력의 주체 구성을 모방하게 되었을까? 이런 발생과 기원, 전승의 문제에 대해서 푸코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푸코가 더 크게 문제 삼는 것은 사법 체제와 같이 근대화된 사회 질서 안에 예속된 형태로 (강요된) 진실을 말하는 행위가 강요되는 근대적인 주체의 해석학 그 자체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근대화된 체제에서 분류되는 여러 질서 안에서의 말하기가 등장한다. 즉, 학문 분류를 따라 정립된 근대의 사회 질서, 즉 법률 체제, 의학 체제, 정치 체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법률 체제의 경우에 주체는 법적 주체로서, 법률 체제와 연결된 치안 통치에서는 용의자나 범죄 혐의자로서, 주체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또한 정신 의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의학이나 상담의 체제에서 의사 또는 상담가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 방식으로 주체성이 정립된다. 말하자면 이제 파레시아로서의 고백이 사법 체제나 의학적-심리학적 상황 속에서 자백이나 정신 감정의 형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근대와 현대의 형벌 체계 내부에 이른바 자백의 덫이 설치되었다.…부족하거나 불충분한 자백을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거나 보강해야 했는데, 그만큼 자백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이었다. 그리고 주체의 자기-진리진술을 대체하는 이 다른 것은, 원한다면 ‘타자의-진리진술’이라고 불러도 될 것인데, 이 다른 것이 감정이다. 범죄의 정신 의학적 감정, 심리학적 감정 말이다. 이런 것들이 자백을 대체하며, 그 공백을 채우며, 자백이 남긴 희거나 검은 공간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범죄자 자신이 정식화할 수 없던 범죄자의 진리를 출현시키려고 한다. (Foucault 2012, 210-11)

 

이처럼 푸코에게 주체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근대에 이르러 사법적, 정신의학적, 심리학적 제도 안에서, 법정에서 피고인의 입장으로, 의학적 진단의 상황에서는 환자로, 심리학적 상담의 상황에서는 내담자의 입장으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된다. 만일 그렇다면, 진실 말하기란 언제나 타자 앞에서, 곧 판사나 수사관 앞에서, 의사 앞에서, 상담가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고, 그 앞에 소환된 주체는 그런 특정한 상황 속에 대상화된 형태로 어떤 심판이나 진단, 또는 처방이나 조언을 얻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근대적 주체는 스스로 결단하여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제도 안에서 무언가를 말해야만 하는 자로 정립된다. 더 심한 경우, 근대적 인간 주체는 진실을 말한다기보다 특정 체제 안에 종속된 채로 어떤 강요된 진실을 말하는 주체가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푸코는 근대의 통치성 안에서 주체가 예속되는 상태와 특정 체제 안에서의 진실과 주체의 관계를 분석하여 그 유형을 광범위하게 제시했다.

 

이와 더불어 푸코는 다시 고대의 파레시아로 돌아간다. 즉, 그는 파레시아를 계기로 삼아 주체의 자유로운 실천을 보여주는 형태가 어떤 것이 있는지 밝힌다. 고대의 파레시아는 그리스도교 사목 권력 하에서의 주체성이나 근대적인 사법 또는 정신 의학의 체제에서의 주체성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때 말하는 주체는 진실이나 진리의 인식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주체로 자신을 정립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행위의 창조자이자 실천자로 생성한다는 게 푸코의 제안이다. 즉, 고대 그리스나 로마 곳곳에서 실천된 솔직하게 말하기란, 자기의 행동과 실천에 대한 약속이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자신의 창조적 삶을 오롯이 공중 앞에 보여 주기로 하는 결단이다. 이에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레시아는 발언자가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진리와 어떤 관계를 맺는 언어 활동이다.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자신의 생명과 어떤 특유한 관계를 맺고, 비판함으로써 자신이나 타자와의 어떤 특유한 관계를 맺으며…자유와 정의를 통해서, 도덕 법칙과 어떤 특유한 관계를 맺는 언어 활동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발언자가 진리와의 개인적 관계를 표명하고, 타자나 자신을 개선하고,…진리를 말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진리를 말함으로써, 자기 삶을 위험에 빠트리는 언어 행동이다. (Foucault 2016, 86[101])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단순화한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자기 욕망을 솔직하게 말하고 살지 않는다. 학교, 군대, 병원, 교회, 경찰서 등 제도화된 기관 안에서의 소위 정상적인 삶의 유지를 위해서 실제 욕망은 숨기면서 그 제도화된 체제에 부합하는 적절한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푸코에게 이런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제도와 절차 안에서 어떤 특정한 진실을 고백하는 일에 불과하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기 위해, 특정한 제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진실을 오롯이 말하고 표현하는 것, 이것이 푸코가 의도하는 파레시아다. 이런 점에서 파레시아는 단지 말하기가 아니라 실존의 자유와 연관된 말이다. 자신의 존재와 욕망을 오롯이 드러냄으로써 어떤 위험도 감수하며 자기 삶을 구축해 갈 자유 말이다.

 

푸코는 그 원형이 어슴푸레하게나마 기원전 4세기 어간에 활발히 활동한 그리스 견유학파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그 당시 견유학파는 어떤 관습이나 전통에 복속되기를 거부하고 묶이지 않은 개들처럼 자유롭게 살며 따로 더 많은 재화나 의복을 쟁여놓지 않고 단순한 삶을 추구했던 이들이다. 이런 삶 덕분에 견유학파는 아무런 제약 없이 살 수 있지만, 때로는 삶의 관행에 부조화하기 때문에 그 삶 자체가 전투적이고 투쟁적이 되었다. 그는 이것이 단지 어떤 시대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심지어 “서양사 전체를 횡단하는” 모형이라고 본다.

 

나는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견유학파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생각하듯이 고대 철학 속의 좀 특수한, 특이한, 그리고 결국은 망각해 버린 형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 아래서, 다양한 목표를 갖고, 서양사 전체를 횡단하는 역사적 범주이며, 이것이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러한가를 말이다. 견유학파는 사상사와 일체이며, 또한 서양의 실존과 주체의 역사와도 일체인 것이다. (Foucault 2009, 161)

 

[또한] 그것은 실존의 양식의 형식 아래서 삶에 의해 증명되는 전투주의다. 이 혁명적 전투주의에 고유한 실존의 양식은, 삶에 의한 증거를 확고히 하면서, 사회의 여러 습관, 관습, 가치와 단절하고 갈라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가시적 형식을 따라, 그 항상적 실천과 무매개적 실존에 의해, 다른 삶, 참된 삶인 다른 삶의 구체적 가능성과 그 명백한 가치를 표명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또한 혁명적 전투주의의 경험과 삶의 중심에서 이렇게도 근본적이고 동시에 이렇게도 수수께끼 같고 흥미로운 진정한 삶의 테마가 발견된다. 이 진정한 삶의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이미 제기한 것이지만, 그 주제화는 서양 사상 모두를 답파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Foucault 2009, 170)

 

이처럼 진실을 말하기는 주체와 관련된 행동 양식이다. 그것은 단지 내가 인식한 진리를 해석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 자체의 실존적 자유를 향유하기 위한 약속의 행위다. 이러한 푸코의 파레시아를 프레데릭 그로는 다음과 같이 잘 정의한 바 있다.

 

파레시아는 진실에 관한 어떠한 말이다. 진실-말하기는 논증의 전략에도 속하지 않고 설득의 기술에도 속하지 않으며 교육학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진실-말하기가 그것을 언표하는 이에게 (죽음을 포함한) 위험의 공간을 제시해 줄 때, 그곳에 파레시아가 존재한다. 또한 파레시아를 통해서 말하는 이는 자신의 담론의 참된 내용과 결합되는데, 이는 (고백에서와 같이) ‘타자’에 대한 복종의 형태로, 자기 자신의 안녕에 대한 희망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유에 의해 구조화되는 자기와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을 감수하는 위험 속에서 그러한 것이다. (Foucault 1996, 116-17[177])

 

지금까지 보면, 비록 특정한 시기와 전통 내에서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사목 권력 안에서 진실 말하기는 주체를 죄를 고백하는 연극을 수행해야 하는 예속된 주체성으로 만들어 내는 모형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그것이 서구 근대 권력 체제 내에서의 주체성 형성의 범례를 제공한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 보인다. 이런 푸코의 서술 덕분에 많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푸코를 반-그리스도교 사상가라거나 그리스도교에 어떤 오명을 선사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푸코가 마치 자신의 전체 철학적 입장에서 이례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서양사 전체를 횡단하는” 모형으로서의 견유학파의 파레시아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주체 모형 중 어떤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한 여지를 남겼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푸코는 역사의 어느 시기에서 개념과 진리의 단절과 변이를 엿본다. 그런데 유독 견유학파에 대해서는, 그것이 “서양사 전체를 횡단하는” 것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일종의 초-역사적 모형의 역할을 부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견유학파의 대담한 진실 말하기는 그리스도교 전통 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는 여지가 생겨나는데, 그것을 푸코는 비록 간략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개혁적이고 반-제도적인 수도적 실천에서 찾는다.

 

비록 고대 견유주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 단지 사후적으로 개연적이라고 해도,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교 통해 전승되었던 모형이며, 그리스도교에서 다시 활성화되었다. 중세에 걸쳐 번성하고 발전한 다소 이단적인 운동에서 [이 재활성화의] 다른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12세기 말 프랑스 서부 앙주와 투랭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 영감을 준 로베르 다르브리셀(Robert d’Arbrissel)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그는 누더기 옷을 입고, 맨발로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가서 성직자들의 탈도덕화에 맞서 싸우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참회를 촉구했다. 또는 발도파 운동에서, 다시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발견된다. 그들은 고정된 거주지가 없고, 사도들처럼 두 명씩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의 벌거벗은 모습을 따라간다.…진리의 스캔들로서의 삶의 선택, 몸 자체에서 진리의 가시적인 극장을 구성하는 방법으로서의 삶의 박탈은 그리스도교 역사를 걸쳐 나오는 주제일 뿐만 아니라 교회, 제도, 부유함, 도덕의 느슨함을 개혁하려는 모든 개혁 노력에서 특히나 생생하고 강렬하며 강력한 실천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내가 반-교회적었다고 말할 그리스도교적 견유주의, 반-제도적 견유주의가 있었다. (Foucault 2009, 168-69)

 

푸코는 이렇게 중세의 몇몇 수도사적 삶에서 드러나는 빈자적-개혁적 삶을 “그리스도교적 견유주의”라고 부르면서, 제도화된 교회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진실을 말하는 실천가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편으로 푸코를 단적으로 반-그리스도교적이라고 보는 단순한 시선을 거두어 내고, 어떤 것에도 거리끼지 않고 진실을 말하려고 했던 수도사와 개혁가의 발자취를 푸코의 시선에 기대어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특히나 특정 교파의 입장을 곧 나의 입장으로 치환시키는 ‘위장된’ 진실 말하기가 팽배한 현실에서, 이런 푸코의 시선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진실 말하기, 곧 파레시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도록 자극하고 있다.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참고 문헌

 

Foucault, Michel (2009). Le courage de la vérité: Le governement de soi et des autre II. Cours au Collége de France, 1984. Paris: Gallimard/Seuil.

 

Foucault, Michel (2004a). L’origine de l’herméneutique de soi: Conférences prononcées à Dartmouth College, 1980. Édition établie par Henri-Paul Fruchaud et Daniele Lorenzini. Paris: J. Vrin. 국역본: 『자기해석학의 기원』. 오트르망 심세광·전혜리 옮김. 서울: 도서출판 동녘, 2022.

 

Foucault, Michel (2012). Mal faire, dire vrai: Fonction de l’aveu en justice: Cours de Louvain, 1981. Édition établie par Fabienne Brion et Bernard E. Harcourt. Louvain: Presses universitaires de Louvain, 2012.

 

Foucault, Michel (2004b).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Édition établie sous la direction de François Ewald et Alessandro Fontana, par Michel Senellart. Paris: Seuil/Gallimard. 국역본: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오트르망 옮김. 서울: 난장, 2011.

 

Foucault, Michel (2016). Discours et vérité: Précédé de La parrêsia. Édition et apparat critique par Henri-Paul Fruchaud et Daniele Lorenzini. Paris: J. Vrin. 국역본: 『담론과 진실』. 오트르망 옮김. 서울: 동녘, 2017.

 

Gros, Frédéric (1996). Michel Foucault.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국역본: 『미셸 푸코』. 배세진 옮김. 서울: 이학사, 2022.

 

Papademetriu, Kyriakoula (2018). “The Performative Meaning of the Word παρρησία in Ancient Greek and in the Greek Bible.” The Performative Meaning of the Word παρρησία in Ancient Greek and in the Greek Bible: Ancient and Modern Perspectives on Freedom of Speech. Edited by Peter-Ben Smit and Eva van Urk, 15-38. Leiden and Boston: Br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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