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얍복 강가의 야곱 이야기가 ‘나-너‘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 같다. 자신을 정의하고 지켜 주는 모든 것을 강 건너로 보낸 후, 어두운 밤에 홀로 남은 야곱. 교리나 설교, 이성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옷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만나는 하나님. 이들의 격한 씨름이야말로 부버가 말하는 참된 만남일 것이다.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마르틴 부버 지음 | 『나와 너』

대한기독교서회 | 2020년 3월 20일 | 272쪽 | 12,000원

 

어느 날 어린왕자가 살던 소행성 B612에 장미 한 송이가 핀다. 어린왕자는 장미를 돌보며 서로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만, 많은 각별한 관계가 그렇듯 결국 틀어지고 어린왕자는 장미꽃을 남겨둔 채 소행성을 떠난다.

 

그렇게 지구로 온 어린왕자는 장미가 가득 핀 광경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나에게 유일무이했던 것이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되는 경험, 한때 소중했던 것이 무의미해지면서 나 역시도 무가치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어린왕자에게 있어 소행성의 장미꽃 한 송이와 지구에 차고 넘치는 장미꽃은 같지 않다.1)

 

‘너’와 ‘그것’

 

이 둘의 구분이 『나와 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틴 부버는 모든 사람은 두 근원어를 가진다고 말하는데, 바로 ‘나-너’, ‘나-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자가 소행성의 장미꽃과의 관계이고, 후자는 지구의 장미꽃들과의 관계다.

 

인간은 이 두 항을 벗어날 수 없다. “처음에는 관계가 있다”2)는 부버의 선언처럼, 모든 존재는 관계를 맺는다. 역으로 말하면, 관계에서 벗어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나’는 가족, 친구, 스마트폰, 칫솔 등 무수한 관계 가운데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나-그것’의 관계, 그리고 ‘나-너’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그것’의 관계는 “자기가 경험하고 사용하는 물건만으로 만족하는” 관계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상의 일부만을 ‘사용’하고 ‘경험’하는 것인데, 여기서 ‘그것’은 단순히 사물이 아니라, ‘그’와 ‘그녀’이기도 하다. 즉, 대상을 단순히 사물로 대하는 것만이 ‘나-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대상이 심지어 생명일지라도 나와 동떨어진 존재로 여기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나와 너』 표지, ⓒ대한기독교서회

 

반면 ‘나-너’의 관계는 온전하고 직접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어떠한 관념 형태도, 어떠한 예비지식도, 어떠한 공상도 … 어떠한 의도도, 어떠한 욕망도, 어떠한 예측도” 불필요하고 도리어 해가 되는 관계, 내 “존재 전체를 바쳐서만” 가능한 관계다. 그렇게 만나는 상대는 수단이지도, 일부분이지도 않은 ‘너’ 그 자체다.

 

이 두 관계의 본질적인 차이를 깨달은 어린왕자는 장미꽃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꽃이 되어준 그 장미꽃은 한 송이지만, 수백 송이의 너희들보다 나에겐 더 중요해. 왜냐하면 그 꽃은 내가 직접 물을 주고, 유리 덮개를 씌우고, 바람막이를 세워주고, 그 꽃이 다치지 않게 벌레까지 죽였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투덜댄다거나 뽐낼 때, 심지어 토라져 아무 말도 안 할 때에도 나는 귀를 기울여주었어. 그건 바로 내 장미꽃이니까.3)

 

영원자 ‘너’

 

책의 3부에서 부버는 궁극적 너, 즉 신을 이야기한다. 두 근원어는 신과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우리는 신 역시 ‘나-너’로 만나기도, ‘나-그것’으로 한정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양쪽의 기록이 가득하다.

 

우선 ‘나-그것’의 관계로는, 율법에 매여 생명을 잃었다고 비판받는 바리새인, 형식적 제사에 취한 구약성경 속 제사장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의 하나님은 문자와 예배 속에 박제된 신이다.

 

그렇다면, ‘나-너’의 관계는 어떨까? ‘그것’만을 섬기는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하나님을 독대한 예언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어찌해 볼 수 없는 ’너‘를 만난다. 그들이 가진 신 관념, 종교 의식, 신앙 체계를 모두 무력화시키는 ‘너’와 강렬히 조우한다.

 

개인적으로는 얍복 강가의 야곱 이야기가 ‘나-너‘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 같다. 자신을 정의하고 지켜 주는 모든 것을 강 건너로 보낸 후, 어두운 밤에 홀로 남은 야곱. 교리나 설교, 이성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옷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만나는 하나님. 이들의 격한 씨름이야말로 부버가 말하는 참된 만남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와 만나는 ‘나’ 역시 필연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너’를 만난 예언자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생을 바쳐 말씀을 대언한다. ‘너’에게 끝내 환도뼈를 얻어맞은 야곱은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된다. ‘나-너’의 관계는 우리를 안락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땅 위에 나타나서 우리를 거꾸러뜨리는 ‘무서운 신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그것’의 관계로 피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날이 그 어느 때보다 수많은 ‘그것’에 노출되고, 관계 맺기 쉬운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과의 관계도 인간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부버는 말한다.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느니라. 그러나 ‘그것’만을 사는 자는 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삶은,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기 때문이다.

 


1) 『어린왕자』와 『나와 너』의 비교는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를 참고하였다.

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요한복음 1장 1절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3)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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