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 군사합의”를 무산시키면서 북은 북대로 남 탓을 하고 남은 남대로 북 탓을 하고 있다. 신뢰를 쌓지 못한 남과 북의 정부는 작은 마찰력에도 불씨를 키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한데 남북의 소통 창구는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본문 중)

윤은주1)

 

지난 11월 21일 북한은 ‘만리경-1호’로 알려진 정찰 위성을 쏘아 올렸다. 지난 5월과 8월에도 시도했지만 실패했었는데 이번엔 성공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다음 날 22일 “9·19 군사합의” 제3항의 효력 정지를 선언했다. 지상, 해상, 공중에서 적대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었다. 그러자 23일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방성 명의로 “9·19 군사합의” 파기를 뜻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합의에 따라 중지했던 모든 군사적 조치들을 회복한다며 곧바로 감시 초소를 재설치하고 해안포 개방 조치를 했다. 2019년 북미 하노이 회담 불발로 경색됐던 남북 관계는 2018년 이전으로 추락하고 있다.

 

남북 관계는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독립적인 관계라 할 수 없다. 새롭게 출현한 냉전 체제에 하부로 편입되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전시 작전권이 미국에 있는 상태에서, 한미 동맹을 축으로 전략이 수립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후속 합의서로 체결한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는 전쟁을 끝맺지 못한 채 정전 협정 상태로 있는 한반도 상황 관리를 위해 남북 정상이 합의한 최초의 군사 합의서였다. 요지는 1. 상호 적대 행위 중지 2. 비무장 지대(DMZ)의 평화 지대화 3. 서해 해상 평화 수역 조성 4. 남북 교류 협력 시 군사적 보장 등이다. 내용을 보면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기초적인 합의지만 남과 북이 독자적으로 추진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림1> 9·19 군사합의 해상, 지상, 공중 제한 구역

(한겨레 2022.3.22. 김은정 기자)

 

2항은 정전 협정 당시 규정했던 비무장 지대(DMZ)로의 회복을 추구했다.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정해놓은 DMZ에 화력이 집중된 현실을 바로 잡자는 취지였다. 3항 서해 평화 수역 조성은 꽃게잡이 철마다 북방 한계선(NLL) 인근에서 벌어지는 어선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공동 어로 수역을 정하는 것이다. 남북 어선의 접근이 어려운 지점에서는 중국 어선이 싹쓸이하는 경우가 많고, 중국 어선은 우리 어선을 보호하는 해경을 공격하기까지 한다. 평화 수역 조성으로 남북 어부의 민생을 보호하고, 분쟁 대신 공조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하는 뜻깊은 합의였다.

 

<그림2> 북방 한계선과 해상 분계선2) (경향신문 2009년 1월 30일 안홍욱 기자)

 

“9·19 군사합의”를 무산시키면서 북은 북대로 남 탓을 하고 남은 남대로 북 탓을 하고 있다. 신뢰를 쌓지 못한 남과 북의 정부는 작은 마찰력에도 불씨를 키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한데 남북의 소통 창구는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정면으로 부인해 온 윤석열 정부는 북한과의 협력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미국, 일본과의 합동 군사 훈련에 더 큰 관심을 보일 뿐이다. 2019년 북한 핵 문제 해결의 마지막 기회를 놓친 미국은 이제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견제하는 데 일본과 우리를 앞장세우고 있다.

 

북한은 한반도에 전개되는 미국의 전략 자산들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한미 합동 군사 훈련은 2015년부터 기존의 방어적 훈련(작전계획 5027)을 선제 타격이 가능하고 최고 지도자 제거 작전(작전계획 5015)을 동반하는 군사 훈련으로 전환했다. 전시 작전권 반환 준비의 일환이었지만 참수 작전을 포함하고 있어서 북한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2017년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은 2022년 선제적 핵무기 사용을 담보하는 “핵무력정책법”을 제정했다. 한미와 북한은 각기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군사적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다. 당분간 북한 문제에 관심을 보일 여력이 없다. 또한 미·중의 패권 경쟁이 지속적인 변수로 작용하는 한 한반도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와 더불어 지정학적 힘이 부딪히는 최전선이 될 것이다. 한미 동맹으로 묶인 우리가 미국을 위해 나가 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미국은 이미 일본을 주력군으로 삼아 한미일 연합 군사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북한을 뛰어넘지 못하고 주저앉은 사이 국제 정세는 새로운 판짜기에 돌입해 있다.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해 온 윤석열 정부는 올해 4월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워싱턴 선언으로 한미 동맹을 강화했다. 북한의 핵 무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미국이 자국 본토를 방위하는 수준으로 핵 억제력을 제공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자체 핵무장론까지 등장한 마당에 일차적 안전망이 제공된 셈이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는 더 큰 자신감을 가지고 북한과 대화를 추진할 수 있지 않은가. 미국의 관심이 유럽과 중동 전쟁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 위기관리 능력을 우리 스스로 보여 줄 필요가 있지 않은가. 담대한 구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전 정부를 능가하는 대북 정책을 펼칠 수 있지 않은가.

 

변하지 않는 북한을 변하게 하는 데에는 총체적인 지혜와 힘이 필요하다. 북한이 “9·19 군사합의” 무효화를 선언했다고 우리가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대화 국면을 만들어야 한다. 북한은 러시아와 정상 회담 이후 항공우주 산업을 강화해 나갈 것이다. 경제 협력도 모색하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북한과의 접촉을 통해 남·북·러 협력의 길을 타진해 봄 직하다. 러시아의 고도화된 기술이 북한으로 전격 넘어가지 않도록 와신상담(臥薪嘗膽)해야 한다. 북러 관계 관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후퇴를 거듭하는 패망의 길이 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는 부시 대통령이 택한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에 견줄 수 있는 ABM(Anything But Moon) 정책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 안보에 있어서 주인 의식을 가지고 대북 정책과 대러 정책을 새롭게 구상해야 한다. 북한이 원하는 체제 보장의 길도 제시해야 한다. 성공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외교 역량은 높이 평가될 것이다. 성경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상수(上手)를 가르친다. 비정상적인 국가 북한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미래 시대를 선도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의 길로 나아가길 기원한다.

 


1) (사)뉴코리아 대표, 북한학 박사.

2) “북방 한계선”(NLL)은 한국 전쟁 직후 1953년 8월 유엔군 사령관 Clark 대장에 의해 임의로 그어졌다. 이는 국제 해양법상 12해리 선과 달라 온전한 영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1999년 12해리 영해선을 “해상 분계선”으로 주장했고, 2002년에는 서해 5도를 오갈 수 있는 폭 1마일 길을 제외한 수역을 경계선으로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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