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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한국 교회는 소수의 이주민 유입에도 혼란을 겪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주민과 함께 그들을 이웃으로 만나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늘어나는 이주민 인구로 보아 교회 내 이주민 유입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역 교회는 이제 “누구와 예배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직면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일 국적의 사람들만 예배애 참석했다면 앞으로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본문 중)

 

권주은(목사, 구미국제교회)

 

저는 경북 구미에서 이주민을 만나고 있는 구미국제교회 권주은 목사입니다. 교회 이름을 정할 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주민 교회’나 ‘다문화 교회’라고 한다면 왠지 한국인을 포함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인도 포함하는 의미를 담기 위해, 고민 끝에 교회 이름을 구미국제교회로 결정했습니다. 이름처럼 다양한 국적, 다양한 문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으니 목사로서는 설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인들과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로 시작했기 때문에 중국어로만 예배를 드려서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제교회가 되면서 다문화 공동체가 되다 보니 영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도 영어를 못하고 참여자들도 대부분 영어권 출신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한국어로만 소통하였습니다. 사실 그냥 한국어는 아닙니다. 어설픈 영어 단어와 한국어를 섞고 거기에 보디랭귀지와 함께 거의 연극을 하다시피 대화하고 설교를 하고 나면 울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까지 구미에서 이주민을 만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주민을 만나는 선교를 꿈꾸었던 것은 아닙니다. 청소년 시절 저의 장래 희망은 고향 교회 앞에서 편의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 교회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좋다기보다 그냥 교회가 좋았습니다. 교회 사람들과 교제하고 만나고 하는 모든 시간이 그냥 좋았습니다. 매일 교회에 가고 싶은데 목사가 되는 것은 자신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마당을 부담 없이 매일 밟을 수 있는 직업을 고민한 끝에 생각한 것이 교회 앞에서 편의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다녀오고 복학하여 대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뭔가 신앙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선교사로 사역하던 사촌 누나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가서 선교 훈련을 받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보게 되었기에 사실 그냥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도망처럼 떠난 중국 선교 훈련이었습니다. 선교 훈련 당시에 만난 선교사 중 한 분이 저에게 고백하며 결혼하자고 프로포즈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는 당시 25살 휴학생으로 한국으로 돌아가 복학을 해야 했기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끈질기게 매일 몇 시간씩 결혼하자고 요청을 하셨고, 그런 말을 듣다 보니 저도 마음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바울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한 그 말씀처럼 저도 결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 년의 선교 훈련을 마치고 이듬해 그 선교사와 함께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몇 달 뒤 결혼을 하였고 저는 대학교 3학년에 복학하였습니다. 이후 교회 앞 편의점에 대한 마음은 접어 두고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아내와 선교를 할 계획을 가졌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전에 한국에 있을 때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중국 유학생이 국내에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중국을 다녀오고 나니 그 사실이 좀 더 확연히 눈에 보였습니다. 저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학교에 있는 중국 유학생에게 말을 붙이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중국 유학생 친구가 생겼습니다. 그러던 중 친분이 두터워진 중국인 유학생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친구들과 함께 모이기 시작하다 보니 저희들의 모임을 주위에서 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나는 신학생도 아닌데 우리 모임이 교회가 되어도 되는가?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교회라고 불러 주니 자연스럽게 저희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생겨난 교회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름도 과감하게 구미중국인교회라고 저어서 불렀습니다. 그렇게 저는 26살 경영학과를 다니던 대학교 3학년에 중국인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인 교회에서 다문화 교회로

 

중국인들과 교회를 개척하고 5-6년이 지나도록 저는 그냥 청년이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한 것도 아니라서 다른 호칭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세례와 성찬에 대한 고민 그리고 주위의 여러 관계에 대한 고려 때문에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학 공부를 시작한 후에는 또다시 저에게 새롭게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보였습니다. 너무도 신기했습니다. 교회 주위에는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이주민이 눈에 보이니 마음에 그들과 친구가 되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2013년에 ‘구미중국인교회’에서 ‘구미국제교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국적, 다양한 민족, 다양한 인종,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열방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중국인들 사이로 한 명, 두 명 조금씩 국적이 다양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모임이 다문화적으로 변화되며 좋은 점도 많았지만, 언어적 소통의 어려움과 생각이나 먹는 음식들이 다름에서 오는 곤란함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어설픈 한국어로 드리는 것도 난감한데 성도 간의 교제도 어설픈 한국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단어 몇 개만 가지고서도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캄보디아, 네팔, 미얀마, 중국, 스리랑카, 르완다, 나이지리아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서로 형, 누나, 언니로 서열을 정하며 한국어로 대화하는 모습은 정말 국제교회, 즉 다문화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신기한 특징입니다.

 

점심 식사도 메뉴는 꼭 2-3가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나라별로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거나, 할랄 닭고기만 먹는다거나 하는 부분들이 있기에 메뉴는 꼭 2-3가지를 준비하여 모두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노력했습니다. 가끔 오리 머리나 매미, 또는 적응이 어려운 향신료가 들어간 생선 요리를 이주민 성도들이 가져올 때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꾹 참고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다양한 국적,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 다양한 언어가 모이다 보니 공부를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캄보디아, 네팔, 미얀마, 중국, 스리랑카, 르완다, 나이지리아 등 각 나라의 경제, 정치, 문화 등을 공부하여 그들과의 대화에서 공감과 이해를 하기 위해 작게나마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중국인 교회에서 다문화 교회로 변해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서로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중국인 교회에서 다문화 교회로 전환되었고 지금까지 수많은 대륙, 국가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다양한 경험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낯선 땅으로 가는 것에는 설렘도 있겠지만,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주민이 우리나라에서 살며 겪는 어려움 중 제일 큰 것은 외로움입니다. 이전에 우연히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중에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이주민과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그 친구가 직장에서 미등록 체류자로 단속되며 추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단속에 아무런 짐을 챙기기 못한 그 친구가 전화로 자신의 집 주소를 알려주며 짐 정리를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기 전에 그가 한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제 전화기 연락처에 있는 유일한 한국인 친구입니다. 친구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 한국 생활에 유일한 한국인 친구였다는 말에 오히려 미안했습니다. 이주민으로 살아가며 한국인과 아울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 친구의 고백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이주민 생활에서 힘든 것 중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사고입니다. 교통사고나 산업 재해와 같은 긴급한 일들이 생겨나면 고국에 사는 우리 한국 사람도 당황하기 쉬울 것입니다. 누구나 갑작스러운 일을 만나면 크게 어려움을 느낍니다. 이주민들은 얼마나 더 당황스럽고 힘들까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이주민들로부터 도와 달라는 전화를 받을 때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움직입니다. 그중 가장 어려운 전화들은 이미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친구들입니다. 부산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작업반장과 굴삭기 운전자 그리고 캄보디아인 이렇게 3명이 작업을 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작업반장이 잠시 전화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바닥에 묻힌 철근을 자르는 작업 중이던 캄보디아인을 굴삭기가 후진을 하며 압착하여 죽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고 후 동료 캄보디아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분하며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목사님~, ‘낙’ 죽었어. ‘낙’ 죽었어.

 

너무나 놀랐습니다. 저는 잘 못 들었다고 생각하여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말은 전과 같았습니다.

 

목사님~, ‘낙’ 죽었어. 조금 전에 ‘낙’ 죽었어.

 

그도 말을 이어 가지 못했습니다. 낙은 교회에서 제가 아주 사랑하던 성도였습니다. 아내와 딸을 캄보디아에 두고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던 성실한 친구였습니다. 바로 일어나 부산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으로 갔습니다. 이주민이고 가족이 없기에 장례식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너무 쓸쓸한 그 죽음에 화가 났습니다. 어두운 지하 터널 눅눅한 공사장, 굴삭기가 소리 내며 뒤에서 그를 덮쳐 올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살려달라고, 사람 있다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겠지만 지하 터널 안 시끄러운 굴삭기 소리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그를 생각하니 화가 났습니다. 최선을 다해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던 그 친구의 죽음이 너무 허망했습니다. 쓸쓸히 별이 되어버린 그 친구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단지 시간이 많이 흐른 그 어느 날에도 잊지 않고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지금도, 앞으로도 그 친구의 이름이 잊히지 않고 오래 기억하려고 합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있지만, 생명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주민들이 한국 생활이 길어지면 결혼하고 출산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저도 딸 셋의 아빠입니다. 그러다 보니 출산과 이후 산후조리의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특별히 임신과 출산을 하는 가정에 마음이 많이 갑니다. 대부분 돌보아 줄 가족이 없기에 임신 후 건강 관리와 출산 준비가 미흡합니다. 그러기에 정말 내 가족, 내 딸이 타지에서 외로이 임신하고 출산을 한다는 마음으로 산모를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대부분 임산부는 출산 후에 저희 집으로 퇴원을 합니다. 집에 혼자서 산후조리를 한다는 것은 신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심리적으로도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그 과정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희 셋째 딸이 태어날 때 이틀 차이로 먼저 출산한 중국인 성도가 저희 집에서 아내랑 함께 한 달 정도 산후조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희는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민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지역 교회의 환대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2024년 4월 말 통계 자료에 의하면, 국내 거주 이주민이 260만 명이 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사상 최대로 많은 이주민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한국 교회는 소수의 이주민 유입에도 혼란을 겪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주민과 함께 그들을 이웃으로 만나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늘어나는 이주민 인구로 보아 교회 내 이주민 유입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역 교회는 이제 “누구와 예배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직면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일 국적의 사람들만 예배애 참석했다면 앞으로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한 장소에 있을 때 묘한 불편감을 느낍니다. 외국인과의 만남과 교류가 어색하고 낯선 상황에서 일어나는 두드러진 현상들이 있습니다. 비속어, 인종 차별적 단어, 혐오 발언, 비하하는 몸짓, 같은 공간에 이주민이 들어왔을 때 자리를 옮겨 앉는 행동, 이주민이 사용했던 식판이나 그릇을 따로 관리하는 등의 경우를 말합니다. 우선 의도치 않은 차별이나 무례한 행동으로 당사자에게 정서적 상처와 사회적인 좌절감을 줄 수 있습니다. 대부분 공개적이거나 노골적이거나 의도한 것이 아닌 무의식 가운데 나타나는 차별적 행동에 이주민들이 큰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전문가들은 ‘미세 차별’(Micro aggression)이라고 말합니다. 인문학적 용어로 ‘선량한 차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들이 상처받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주민을 환대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먼저 이주민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때,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열 수 있습니다. ‘강도’보다는 ‘빈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일이 아닌 일상의 작은 만남이라도 지속적으로 함께 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진정한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먼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그들과 소통하고 서로의 문화와 언어를 존중한다면, 사랑으로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그들이 존중받는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한다면 그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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