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캐슬>과 한국교육
– 우리는 교육이란 이름으로 무엇을 해 온 것인가? –
자녀 교육과 관련한 대한민국 상류층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JTBC의 <SKY 캐슬>이 전 국민의 관심을 끌며 곧 종영을 앞두고 있다. 이 드라마가 이렇게 인기를 끈 것은 모두의 관심인 교육 문제를 다루면서, 이제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가리고 감추었던 우리 속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저렇게까지 해야 돼?”라고 말은 하면서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내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고 출세시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야”라고 생각하며 행동해 왔다. 다만 이를 여러 가지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왔을 따름이었다. <SKY 캐슬> 주민들의 극단적인 행태들은 사실 우리도 여력만 있다면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교육은, 아니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지난 100여 년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자. 지난 세기에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를 통해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던 신분 질서가 해체되고 기득권층이 완전히 붕괴되는 경험을 했다. 물론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파들이 새로운 신분과 기득권을 얻기 했지만 그들은 부와 권력만 획득했을 뿐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지는 못했다. 이마저도 해방과 함께,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해체되었다.
기존의 신분 질서가 해체된 해방 후의 대한민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신분 상승의 통로로 주목한 것이 교육이었다. 그래서 부모들은 시골에서 소 팔고 논 팔아서라도 자식을 고등학교와 대학에 보내려 했고, 더 깬 사람들은 미국 유학까지 보냈다. 그렇게 공부를 한 자녀들은 대한민국의 중산층이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상류층까지 치고 올라가기도 했다. 이들은 단지 경제적으로만 중산층이 되는 것을 넘어서 조선시대의 사대부 전통을 잇는 ‘배운 자’로서의 정당성도 함께 얻어 그야말로 재산만 가진 졸부들과는 구별되는 계급을 형성한 것이다. 그때 나온 말이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었고, 이는 대한민국의 교육 신화가 되었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교육 신화는 50년도 지속하지 못했다. 개천에서 출세하여 용이 된 사람들이 중상류층 계급을 형성하자 사회가 이제는 개천에서는 용이 나기가 쉽지 않고 용 새끼를 사육해서 용으로 만드는 사회로 바뀐 것이다. 이미 기득권 집단이 된 용들이 한강에, 반포대교와 올림픽대교 사이에 둑을 쌓고 그 사이에서 용을 사육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사교육 시스템이다.
대학 서열화를 기본 축으로 삼게 된 우리의 교육 상황에서 대학 서열화의 최정점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똑같이 제공되는 공교육만으로는 남들보다 앞설 수가 없다. 그래서 낮에는 공교육을 받으면서 밤에는 사교육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개인 과외 정도의 소박한 수준에 머물던 사교육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거대한 산업이 되기 시작했다. 사교육 산업은 대입정책 변화에 따라 수능 사교육, 논술 사교육, 내신 사교육으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어떤 교육정책이 나오더라도 적응할 수 있는 내성을 키우기 시작했다. <SKY 캐슬>의 김주영 코디가 보여준 것은 ‘입시 코디네이터’는 대입 수시 전형에 맞춘 컨설팅 사교육이 극단화한 모습이다.
<SKY 캐슬>은 개천에서 난 용들이 그 자녀와 손자도 용으로 만들어가려는 욕망의 실체와 그 결과를 확대해서 보여준다. 그런데 <SKY 캐슬>에서는 그다지 부각되지는 않는 것이 있다. 이 욕망의 이면에 숨어있는 ‘불안’이라는 커다란 배후다.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들의 욕망의 배후에는 용의 자식들이 용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뱀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과 불안은 극단적으로 기형화된 한국의 교육과 학부모를 움직이는 두 축이다. 물론 그들이 현재 소유한 지위와 기득권 정도에 따라 욕망과 불안의 비율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욕망이 더 크고, 가진 것이 적을수록 불안이 더 크겠지만 어차피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SKY 캐슬>이 보여주는 자녀교육에 대한 왜곡된 욕망과 불안은 정도와 모양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날 전 국민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모의 욕망과 불안이 만들어낸 교육이란 가면을 쓴 잔혹한 폭력 시스템 아래에서 우리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SKY 캐슬>이 제기하는 것도 ‘지금 우리가 교육이란 이름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단지 아이들만 불행하게 하고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과 전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죽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교육, 아니, 성적과 입시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입시와 성적을 비관해서 죽는 아이들을 언론은 보도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며 그만큼 이 일에 국민들이 무덤덤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1년에 100명도 넘는 아이들이 입시와 성적을 비관하여 죽는 나라가 과연 정상적인 나라인가? 해방 이후 공부 때문에 자살한 청소년의 숫자가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한국 군인 숫자보다 더 많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자랑하는 ‘교육열’의 결과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 문제에 주목하지 않고 아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과연 자살한 아이들만 문제일까? 최근 학교 현장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우울증을 앓는 아이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서 학급당 학생 수는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지만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교사들은 에너지를 다 쏟고 탈진하고 있다. 서울대생의 절반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보도 역시 우리가 그렇게 공들였던 교육이 아이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교육 밀집 지역에서는 사교육을 통한 대학입시 성공 신화들이 떠돈다. 하지만 그 몇 개 신화의 뒤에 감추어진 수많은 실패 사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적인 무능력의 결과로 치부하여 부끄럽게 함으로써 말을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 실패 사례는 물론이고 성공 신화가 된 사례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왜곡된 교육이 아이들 내면에 만들고 있는 상처에 대해서는 모두가 침묵한다. 사교육의 밀집도와 비례해서 소아정신과 병원이나 심리상담센터가 증가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면 용케 입시 경쟁에서 승리해 최고의 대학에 합격하고서도 우울증이나 정신적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성공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은 끊임없이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경쟁을 해왔다. 하나라도 실수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자기를 들들 볶으며 반복 학습의 지겨움을 이겨냈다. 그렇게 경쟁에서 승리한 아이들은 사회의 모든 혜택을 독점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경쟁에서 뒤처진 친구들은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차별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남 좋으라고 공부하는 것 아니다. 너 좋으라고 공부하라는 것이야”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내면화하면서 자란 아이들에게 자신과 자기 가족의 이익만 보이고 주변 사람이나 약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인가? 이 또한 괴물이 아닌가? 이렇게 경쟁에서 승리한 아이들이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서 약자의 아픔도 보듬을 줄 모르고 사회의 공동선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사는 것을 우리는 비난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혹 쓰러진 약한 친구를 보듬느라고 자기 시간을 빼앗겨 경쟁에서 뒤처질 것을 염려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우리는 <SKY 캐슬>을 벗어나야 한다. 아니, 우리를 <SKY 캐슬>에 가두어버린 우리 속의 욕망과 불안의 사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SKY 캐슬>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갈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글은 열매소식지 제268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_ 정병오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