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주기적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갑질이 작동할 수 없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대안적 제도가 필요한 이유는 ‘을’에 위치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즉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갑’에 위치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기는 마찬가지다. 왜냐면 관계적 존재인 인간은 수평적 관계에 있을 때라야 다른 사람과 참다운 만남을 가질 수 있고, 그런 만남 속에 있어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본문 중)
남기업(토지+자유연구소 소장, 희년함께 공동대표)
지난 5월 10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억울하다고 자살을 했다. 아파트 주차 갈등으로 인해 입주민에게 구타를 당해 코뼈가 부러졌는데, 사과는커녕 그만두라고 협박까지 당한 것이 직접적 이유였다.
그가 쓴 짧은 유서를 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 전체 31자로 작성된 유서엔 맞춤법이 틀린 글자가 꽤 있었다. 그 유서는 “제 결백 발끼세요”로 끝맺고 있었다. 가난하고 배움이 짧은 사람이었다. 억울함을 호소할 데 없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 없음을 죽음으로 증명해 보이려 했다는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다.
그의 비극적 죽음이 알려지자 그 아파트의 한 입주민이 청와대에 청원서까지 올렸다. 그 내용에 따르면, 그 경비원은 입주민을 위해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그 아파트에서는 ‘비타민’과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런데 가해자인 입주민은 경비원을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했고, 심지어는 “우리 애들 10명 풀어서 땅에 묻어줄까”라고 협박도 했다고 한다. 청원서를 쓴 입주민은 가해자에게 사형은 아니더라도 무기 징역형을 주기를 바란다고 썼다.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인지 결국 그는 구속 수사를 받게 되었다.
‘갑질’은 가난의 문제다
우리는 이 비극을 전형적 갑질이 낳은 결과라고 말한다. 그런데 입주민과 경비원은 단순한 갑을 관계가 아니다. 경비원에 대해서 입주민은 ‘슈퍼 갑’이다. 왜냐면 입주민들이 경비원에 대해서 안 좋은 민원을 관리 사무소나 경비 회사에 제기하면 그의 직위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갑질을 당하면 그만두면 되지, 왜 경비원을 계속하냐’고. 생계 때문이다. 경비원은 주로 노인이 하는데,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43.8%(2017년)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그렇다. 가난하기 때문에 갑질을 당해도 경비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 경비원의 자녀들의 삶도 녹록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취직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서로 보건대 다른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자살의 배후엔 가난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게다가 그는 배우지도 못했다. 만일 그가 평균 정도의 교육 수준과 경비원을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경은 주기적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갑질이 작동할 수 없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대안적 제도가 필요한 이유는 ‘을’에 위치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즉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갑’에 위치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기는 마찬가지다. 왜냐면 관계적 존재인 인간은 수평적 관계에 있을 때라야 다른 사람과 참다운 만남을 가질 수 있고, 그런 만남 속에 있어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삼성 이건희 회장 개인의 최대의 불행은 타인과 참된 만남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성경이 말하는 갑질 청산의 대안, 희년
갑질 청산의 대안은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하신 시내산 ‘율법’에 들어 있다. 바로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시내산 율법의 정점에 위치한 ‘희년’이다(레위기 25장). 안식일과 안식년을 포함하고 있는 희년 제도의 목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종에게 7일에 하루를 쉬게 한 것은 수평적 관계 형성을 위한 최소한의 긴급 조치다. 7년에 1번씩 부채를 탕감하고 종을 해방하는 것(신명기 15장) 또한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바꾸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다. 주인과 종의 관계,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는 갑을 관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7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인 희년이 되어 어쩔 수 없어서 팔아버린 토지를 되돌려 받는 것은, 갑을 관계의 전형인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를 청산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갑을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려는 성경의 대안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불쌍한 이들을 한없이 측은히 여기며 가난한 아들을 바라보면 가슴 아파 견디지 못”(출 34:6 中 현대어 성경)하는 존재라고 설명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가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건 분명 한계가 있지만,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면 불쌍한 사람들이 양산되는 구조를 고치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필자는 본인이 사는 아파트에서 4년 동안 아파트 회장을 두 번 역임했다. 입만 열면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왜 마을 일엔 관심을 두지 않냐는 지인의 충고가 마음을 찔러 시작한 아파트 회장 첫 2년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기간이었다. 나를 제외한 대다수의 동 대표들이 나를 쫓아내기 위해서 불법적 해임 투표를 3번씩이나 강행했고, 매달 1~2회 열리는 회의 때마다 온갖 욕설과 폭력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며, 고소·고발을 무려 15번이나 당했다. 투명성과 상식으로 아파트를 운영하려고 했던 필자를 부담스럽게 여겼고, 나아가서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불법과 비리를 바로잡을 것을 두려워 했다. 2년 동안 그들을 향해 저주 기도를 얼마나 많이 올렸는지 모른다. 회장 자리를 권유한 지인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아파트 주민들의 도움으로 2년을 무사히 버틸 수가 있었다. 버티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필자를 괴롭혔던 동 대표들이 잘못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했고, 두 번째 회장 2년 동안은 뜻이 맞는 입주민들과 함께 아파트를 개혁하는 일을 했다. 두 번째 2년은 신나게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경험의 시간이었다.
우리 아파트에서도 있었던 경비원의 자살
첫 2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동 대표 중 ‘몸통’은 ‘직업이 동 대표’였고, 이미 우리 아파트에서 여러 번 회장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아파트의 모든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었다. 40명에 가까운 우리 아파트의 유급 직원들은 그에게만 잘 보이면 계속 근무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가 갑이었고 아파트의 관리소장 이하 전 직원들은 ‘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몸통’과 가까운 직원일수록 관리·경비·청소 서비스의 질이 나쁘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그에게만 잘 보이면 직위를 유지하고 각종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우리 아파트에서 한 경비원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몸통에게 온갖 충성을 다하지만 입주민에 대한 경비 서비스의 질은 형편없었던 한 경비원이 성실하게 근무하는 같은 조 경비원을 조그만 꼬투리를 잡아서 괴롭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안하무인 격으로 힘없고 열심히 일하는 경비원을 괴롭히고 주민들에게 형편없는 경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몸통의 비호 때문이었다.
이런 시스템, 즉 억울한 사람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질서를 나는 두 번째 회장 임기 때 뜯어고쳤다.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잘하는 직원들이 오래 근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또한 무조건 민원이 많이 들어왔다고 징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민원의 성격을 면밀히 따져서 억울함이 없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물론 이렇게 해도 질이 안 좋은 입주민이 있어서 경비원들이 고충을 겪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만, 갑질하는 입주민은 많이 줄어들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파트에서 사고가 종종 난다. 경비원의 자살, 관리소장의 비리, 아파트 회장의 관리비 횡령 등. 그런데 이런 일에 입주민들은 잘 나서지 않는다. 누군가 비리를 저지르고 갑질을 하는 건 알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아파트에 비리가 판을 치고, 심지어 자살하는 끔찍한 사고까지 일어나는 까닭은 상식적인 주민들, 특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경험으론, 기도하는 사람 2~3명만 동대표가 되면 아파트는 바뀔 수 있다. 한계는 있지만 억울한 사람을 양산해 내는 구조를 고칠 수 있고, 아파트의 공동체성도 활성화할 수 있다. 내가 사는 마을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스며드는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이 땅에 임할까? 우리가 이 땅에 드러나도록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억울한 사람이 줄어드는 사회다. 수평적 만남, 참된 만남으로 충만한 사회다. 그런데 이런 나라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인들이 기도하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 못지않게 내가 사는 아파트의 질서를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에 가깝게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한 경비원이 자신의 결백을 밝혀 달라면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파트 근무자 중에는 자살을 고민하는 직원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다면,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생겨나는 구조를 고쳐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가 사는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성은 그런 현장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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