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의 태도는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 장로님의 딸이 연애를 통해 혼외 임신을 했다고 하자. 이때, 생명 입장에 충실하게 낙태를 시키지 않고 공개적으로 싱글맘으로 낳아 기르게 해주고, 그것을 신앙 양심에 따른 선택으로 여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 배운 바가 있어서 ‘낙태는 살인입니다’라고 말은 해도, 그 일이 자기 딸에게 일어나면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역시 이야기는 정치나 윤리나 당위가 아닌 현실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본문 중)
양혜원(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눈뜨면 코로나19 전염병 소식부터 확인하게 되는 생활을 1년가량 해가던 작년 말, 결국 아무런 대안 법안 없이 낙태죄가 폐지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기사를 접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정(2019. 4. 11.) 이후 개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곧 해를 넘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낙태죄 조항이 있기는 했어도 거의 사문화된 법으로 존재하다가, 국가가 인구 조절 정책에서 출산 장려 정책으로 방향을 틀고 프로라이프 의사들이 법적 행동을 취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행동을 촉발하였고, 호주제 폐지 이후 낙태죄 폐지를 여성 단체들의 최우선 순위로 만들게 하면서 결국 현재의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2021년이 되어 낙태죄는 폐지되고 법의 공백 상태를 맞이했음에도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전염병 상황이 가장 긴급한 현안이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 낙태죄 조항이 사문화된 법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체감하는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 자주 보도되는 아동 학대와 유기와 살인 사건들은 상대적으로 낙태를 더 나은 선택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즉,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낙태를 하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지형 속에서 낙태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자니 가닥을 잡기가 쉽지 않다. 그런 데다가, 낙태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의 태도는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 장로님의 딸이 연애를 통해 혼외 임신을 했다고 하자. 이때, 생명 입장에 충실하게 낙태를 시키지 않고 공개적으로 싱글맘으로 낳아 기르게 해주고, 그것을 신앙 양심에 따른 선택으로 여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 배운 바가 있어서 ‘낙태는 살인입니다’라고 말은 해도, 그 일이 자기 딸에게 일어나면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역시 이야기는 정치나 윤리나 당위가 아닌 현실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1994년, 낙태반대연합운동이 처음 발족하고 국회 앞에 낙태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러 갔을 때, 나도 참여한 적이 있다. 라브리를 통해서 알게 된 단체였는데, 가보니 개신교계는 정말 한 줌도 되지 않았고, 가톨릭 수녀님들이 단체로 참가하셨다. 내가 무슨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갔던 것은 아니다. 나의 생각은 매우 소박하고 약간은 미신적인 데가 있었다. 이런 데에 참가하면 내가 낙태를 하게 되는 상황에 처할 일이 미리 예방되지 않을까 하는, 나쁜 일은 피해가고 싶은 그런 소박한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 당시 나는 결혼 전이었고, 우리 세대에게 결혼 전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말 그대로, 결혼 ‘전’이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본능적으로 여자의 몸은 쉽게 침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수잔 브라이슨이라고 하는 철학자는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Aftermath: Violence and the Remaking of a Self)에서 여자들에게 강간은 일종의 선-기억(prememory)처럼 남아 있다고 했다. 즉, 한 번도 강간을 당한 경험이 없는데도 강간을 당했을 때 그것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강간당한 여성들의 후-기억(postmemory)이 문화와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여성들에게 자신이 미래에 당할 강간의 선기억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여자들은 자라면서 듣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자신의 몸은 쉽게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익힌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여자들은 강간 문화에서 자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운동권 성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그때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여자의 몸을 가진 이상 이 문제와 무관할 수는 없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그때 품었던 생각은, 혹 내가 열정에 무장 해제되는 순간이 온다면, 나에게는 운동권 성향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비한 피임 지식 또한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한 과 친구가, 어떤 대화 맥락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자신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라고 한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친구가 진보적으로 보이기도 했고, 혼란스럽기도 했고, 그런 복잡한 심경으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훗날 교회 청년들 중에 혼전 섹스를 한 경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임신하면 어떡하려고 겁도 없이…’ 하는 생각부터 내 머리를 스친 것은, 역시 내가, 순결한 처녀는 피임 지식으로부터도 순결해야 하는 걸로 알았던 세대임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여자들이 낙태를 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하고, 낙태를 하는 태아의 경우도 다양하다. 한국의 경우 여아와 장애아가 아마도 선별 낙태를 당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 한 가지 한국 사회의 특이한 점은, 기혼 여성의 낙태율이 더 높고, 기혼 여성은 낙태에 대해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낙태를 하러 가면 시선이 곱지 않은데, 결혼하고 나서 갔을 때는 그런 시선에서 자유로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국의 경우 낙태에 대한 낙인은 결혼 여부를 가리지 않고, 오히려 경제적 여유가 되는 기혼 여성이 낙태를 할 때 비판의 여지가 더 큰 것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 사회에서 낙태가 피임의 일환으로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편은 피임에 협조적이지 않고 여자가 피임에 너무 밝으면 그것도 이상하게 보니, 결국 원하지 않는 임신은 낙태를 하면서 자녀 수를 조절했던 것이다. 그 당시 라브리도 함께 했던 낙태반대운동은 적어도 결혼한 커플들의 낙태는 줄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낙태반대집회에 참여했을 때 나는 결혼 전이었고, 그때 내가 생각했던 두 가지 상황—폭력과 연애—중 하나로 인해 임신이 되었다면, 그때는 낙태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는 법적으로도 낙태가 허용이 되는 경우이고, 문화적으로는 (결혼 여부를 막론하고) 오히려 하지 않으면 미쳤냐고 할 상황이다. 앞에서 예로 제시한 장로님의 딸의 경우를 연애에 의한 혼전 임신이라고 명시한 이유는, 강간에 의한 것일 경우 답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연애에 의한 경우도 사실 어느 정도 답이 정해져 있다. 거기에는 딸의 연령과 앞으로의 가능성, 그리고 상대 남자의 가능성 등이 다 고려될 것이다. 둘 다 성인이고, 남자가 직장을 가지고 있고, 결혼 적령기이고, 결혼해서 살 만하면, 서둘러 결혼하는 것이 장려될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낙태를 종용할 확률이 높다. 결혼을 하겠다고 해도 여자가 아직 학생이거나 남자가 영 탐탁지 않으면, 그런 경우도 낙태를 종용할 확률이 높다. 남자가 나 몰라라 하거나 도망갔을 경우는 당연히 낙태를 종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혼전 임신을 한 여자가 낙태를 하지 않을 가능성은 상대 남성과 결혼을 하는 경우일 때가 가장 높다.
이처럼 임신도 낙태도 모두 결혼한 여성의 특권이 되는 상황은, 우리가 낙태를 생각할 때 섹스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여자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은밀하게 이 여자의 임신은 누구와의 섹스의 결과이고, 이 여자는 임신으로 이어지는 섹스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한다.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심리의 메커니즘이다.
기독교인이 낙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생명 입장부터 제시하며 들어가지 않고 이처럼 섹스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낙태는 사실 생명 문제만큼이나 섹스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서 페미니즘의 관찰은 정확하다. 하지만, 페미니즘 진영이 지나치게 섹스 문제로 낙태 이슈를 끌고 간다면, 기독교 쪽에서는 섹스 문제를 너무 무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래서 그 두 진영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현재와 같은 법의 공백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앞으로 몇 차례 더 낙태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데, 그 전에 먼저 낙태가 이처럼 섹스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국의 성문화를 잘 보여주는 박완서의 단편 「그 가을의 사흘 동안」(1980)을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한국전쟁 중 강간을 당해 임신하고 낙태한 경험이 있는 한 여의사가, 서울 변두리에 낙태만 전문으로 하는 산부인과 병원을 차리고 거의 30년간 영업을 하다가 지역 재개발 때문에 병원 문을 닫기 전까지 사흘간의 시간이 소설의 배경이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일어나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병원의 일상 사이사이 여주인공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소설의 서두와 말미를 장식하는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분만이다. 낙태만 전문으로 하겠다며 개업한 병원의 첫 환자가 응급 분만 환자였고, 마지막 환자는 임신 말기 낙태를 원하는 스무 살 남짓한 여자였는데, 그녀를 위해 분만 절차와 다르지 않은 낙태를 한 후, 그 아이를 살리려는 여의사의 노력과 실패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임신은 ‘죽을 병’이 되는가이다. 이 말은, 처녀가 임신을 하면 집에서도 나가 죽으라고 내쫓던 시절, 배 속의 애를 없애기 위해서 자기가 죽을 각오까지 하게 만드는 사회라는 뜻이다. 그 정도로 처녀의 임신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배가 불룩한 채 갑자기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면 그걸 임신이라고는 차마 (생각했어도) 말하지 못하고 ‘죽을 병’이라고 둘러댈 수밖에 없는 사회가 이 소설의 배경이다. 그런데 처녀가 임신했다는 것이 어찌나 큰 스캔들인지, 강간의 폭력성은 오히려 그에 비해 묻힌다는 게 이 소설이 보여주는 우리 성문화의 단면이다. 처녀의 임신이 스캔들인 이유는 처녀가 섹스를 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낙태보다 더 심각한 게 처녀가 섹스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 섹스가 동의에 의한 것인지 강제에 의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이중적 억압이 자신의 모성 욕망까지 억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여의사가, 새벽에 동네 교회에서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신도의 무리에 섞여 오열하는 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페미니스트 관점에서는, 이 소설의 궁극적 메시지를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해석하고 낙태 행위를 옹호하는 기반으로 삼는데, 나는 좀 다르게 본다. 혼외 임신을 비난하는 사회에 맞서기 위해서 낙태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결국 계속해서 혼외 임신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 뿐이다. 그 비난에 맞서기 위해서 당당하게 임신한 배를 내밀고 다니는 여자들이 많아지는 게 오히려 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까? 그러면 여자가 알아서 낙태를 해주어서 홀가분했던 남자들이 제법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가려졌던 남자들의 역할이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기로 남자 없이 임신이 된 경우는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점잖으신 분들이 많이 읽는 매체에 좀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섹스 이야기 없이 추상적인 생명 논의만 되풀이하는 낙태 논쟁은 육체 없는 영혼의 논쟁에 머물고 만다. 임신이 얼마나 육체적인 사건인가를 생각하면 매우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요즘은 생명 잉태의 육체성을 오히려 더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는 원하는 유전자를 가진 정자를 골라 여자 홀로 임신할 수도 있고, 자궁을 남겨둔 트랜스젠더 남자가 아이를 가질 수도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남자와 여자가 직접 얽히는 임신은 오히려 고전적이고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제는 좀 더 뼈와 살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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