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난리를 만난 것 맞습니다. 이럴 때 정부와 사회가 교회를 향해서 뺨도 때리고, 속옷도 빼앗고, 오 리를 가자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명보다 귀한 예배를 양보하면서 좇아가고 있는데, 자꾸 더 하라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그러시잖아요. 뺨도 돌려대라고 말입니다. (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원대학교 교수, 기윤실 공동대표)

 

코로나19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델타변이 바이러스의 전염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면서 코로나19의 위험성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지난 6월 말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7월이 되면 확진자 숫자도 줄어들고, 그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도 낮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 모이는 것이 좀 여유로워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무엇보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교회에 모일 수 있는 인원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좌석의 20%까지 허락되던 예배 참석 인원이 이제 30%로 늘어날 것이고, 특히 백신 접종을 1회라도 한 사람은 그 숫자에서 제외된다고 했으니 더 많은 수가 예배에 참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교회에 모이는 분들이 대개 고령자들이고, 이분들은 백신 접종의 우선권을 가지셔서 많이 접종을 했으니 잘하면 좌석에 50% 이상을 채워도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교계에서는 예배당이 가득 차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렇게 모일 수 있게 되면 과연 좌석의 50%를 채울 수 있을지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아무래도 방역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니,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했습니다. 1년 반을 텅 빈 예배당을 대상으로 예배 인도하고 설교하던 목회자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설레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정작 7월에 들어서자 델타 변이 바이러스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방역 단계가 높아졌고,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역시 최고인 4단계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20%가 아니라 최소 인원만 참여하여 방송을 송출할 수 있습니다. 전부 비대면으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인지 몰라도, 일부 목회자들이 서울시를 대상으로 한 재판에서 승소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결과는 예배 참여를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20인 미만 범위 내에서 수용인원 10%만 참석하면’ 예배가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재판 결과에 따라 방역 당국은 예배 참석 인원을 수용인원의 10% 이내로 해서, 최대 19명까지 참석할 수 있다는 새로운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예배에 더 많은 인원이 참석할 수 있는 길을 찾겠다고 재판을 시작했고, 재판 결과가 그렇게 나온 줄 알았는데, 오히려 족쇄가 되고 말았습니다. 1천 명 좌석을 가지고 있는 교회이면 전에는 100명까지 참석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크기와 관계없이 무조건 19명으로 제약된 것입니다. 다행히 후에 교계와 조정이 되어 예배 참석 인원은 19명에서 크기에 따라 99명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만, 당시는 꽤 마음을 졸였습니다.

솔직히 이제 슬슬 부아도 올라옵니다. 코로나 상황이라고 이해를 해 보려고 해도 이렇게 예배로 모일 수 없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견디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걸 느낍니다. 그래도 양해를 하고 정부 당국의 지침에 따랐는데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지니 버티는 것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생각을 좀 바꾸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찌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 말씀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에 딱 맞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산상수훈은 성경에서 가장 귀한 말씀입니다. 오롯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산상수훈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 5장부터 8장의 말씀이 성경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말씀은 참으로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너무 주옥같은 말씀인데 그렇게 살아낼 자신은 없습니다. 아마 지금 읽은 이 말씀 역시 우리가 지키며 살기에는 쉽지 않은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른편 뺨을 친 사람에게 왼편 뺨을 마저 대라는 말씀이나,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도 벗어주라는 게 쉽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 중 하나는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 리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십 리라고 해 봐야 4km 정도 되는데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생각났나 봅니다. 방역 당국에서 ‘2주간 더, 4주간 더’라고 할 때, ‘우리한테 왜 이러냐’라고 할 게 아니라 ‘2주 가지고 되겠느냐’라고, 아니 ‘4주 가지고 되겠느냐’라고 하면서 그냥 우리가 이 사회도 어렵고, 소상공인들도 방역으로 인해 어려운데 솔선수범해서 한 4주, 한 8주 더 하겠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얼마 전 기윤실에서 ‘코로나와 한국 교회’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면서 이웃 종교의 시선으로 한 번 성찰해 보고자 신부님과 스님을 초청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배나 미사, 법회가 모이기 어려운 상황인데 다른 종교는 반응이 어떤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스님이 먼저 말하는데 “나라가 ‘국난’에 처했는데 우리가 희생해야죠” 하는 겁니다. 정말 불교다운 표현입니다. 국가에 난리가 났는데, 우리가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교회를 향해서 이런 제안을 합니다. 이럴 때 교회가 먼저 나서서 우리가 문을 닫겠다고 하면 어떻겠냐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해서 국민들의 마음을 많이 얻었다고 합니다. 역시 역사가 오래되고, 큰 조직으로 정부를 상대로 역할을 해 본 종교다운 대처가 엿보였습니다.

그렇죠. 나라가 어렵고, 사회가 어렵고, 전 세계가 전염병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국가가 난리를 만난 것 맞습니다. 이럴 때 정부와 사회가 교회를 향해서 뺨도 때리고, 속옷도 빼앗고, 오 리를 가자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명보다 귀한 예배를 양보하면서 좇아가고 있는데, 자꾸 더 하라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그러시잖아요. 뺨도 돌려대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그건 너무 어렵고, 우리가 오 리가 아니라 먼저 십 리를 가겠다고 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100년 전에는 3.1 만세 운동하면서 일본군 총칼에 머리를 디밀어 본 적도 있지 않습니까? 나라가 어렵다는데 우리가 앞장서서 먼저 깨지겠다고 할 수 있죠. 이 사회에서 그래도 교회가 이런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방법이고, 또 우리 보고 그렇게 살라고 하신 말씀인데, 우리 예수쟁이들이 따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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